[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 벚꽃, 그리고 인간실격

한겨레 입력 2023. 4. 2. 18:45 수정 2023. 4. 2.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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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

‘크라잉넛’ 기타리스트 이상면이 먼저 읽고 그리다.

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

까만 밤이 계란프라이같이 동그란 태양을 삼키려다 입천장 데어서 와락 토해버린 듯한 햇살 쏟아지는 화창한 토요일 오후, 예전에 사두었던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실격>을 침대에 누워서 읽었다. 벚꽃이 피기 시작한 화창한 날이라 그런지 제목부터 음산한 <인간실격>은 어두운 보석 곰팡이처럼 검은빛을 발휘하며 우울함은 더욱 선명하게 반짝였다.

부잣집 대가족의 막내아들 ‘요조’는 엷은 연둣빛 이파리처럼 여리고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이며 심지어는 미소년이다. 비극의 3요소(부잣집 아들, 여린 감수성, 미남)를 겸비한 주인공 ‘요조’는 아직 발자국 없는 첫눈처럼 순수하고, 만지면 사라져버릴 듯이 수줍음이 많은 소년이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도 모르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대화조차도 힘들어한 그는 결국 익살스러운 사람인 척하며 하얀 첫눈이 지저분하게 진창이 되듯 자기 파괴의 길을 걷게 된다.

<인간실격>은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한다. 일본의 전후세대에 남들보다 유복하게 자라났지만, 집안의 재력이 고리대금업으로부터 흥했다는 것을 알고 자기혐오에 빠졌다고 한다.

주인공 요조는 자기혐오에 빠진 모습으로는 세상과 맞닥뜨릴 수 없어서 어릿광대 같은 삶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그렇게 나름대로 잘 살아가던 중, 어느 날 과장된 슬랩스틱 코미디로 일부러 웃기려고 넘어졌는데, “일부러 그랬네”라고 하는 친구에게 가면이 벗겨진 자신의 민낯을 들켜버린다. 자신의 치부를 들켜버린 이 부분에서 어찌나 민망하던지. 돌이켜보면 내가 이상한 타이밍에서 갑자기 욱하고 급발진하면서 화를 내는 경우는 이렇게 숨기고 싶은 모습을 간파당했을 때인 것 같다.

인간은 성악설도 아니고 성선설도 아니고, 그저 약하게 태어난 존재라고들 한다. 가재처럼 타고난 갑옷이 생기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린 가면을 쓰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물론 ‘내추럴 본 생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개는 나처럼 투명한 가면을 쓴 채로 살아간다. 나는 가면이 꼭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숨기고 싶은 얼굴을 들키거나 나와 괴리가 너무 큰 잘생긴 가면을 쓰고 다니다 벗겨졌을 때, 수치심과 충격은 배가 된다.

​세상에는 무수한 모양의 가면이 있다. 우리는 멋진 가면을 선택할 수 있다. 기왕이면 가면과 본모습이 닮아갈 수 있는 게 좋겠다. 그 가면의 표정과 마음이 충분히 닮아졌다면 또 새로운 좋은 가면을 찾아본다. 그렇게 쌓여왔던 가면들과 나 사이의 간극들을 좁혀가는 노력이 삶의 본질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갑각류 같은 갑옷을 갖고 태어나진 않았지만, 좋은 가면으로 자신을 보호해 가며 성장해 나갈 수 있다.

<인간실격>이 재미있는 이유는 유머가 있기 때문이다. 역시 명작들은 재미가 있어야 한다.

“여자에게 받은 러브레터로 목욕물을 데운 남자가 있다더군요.”

“어머, 싫어, 당신이죠?”

“우유를 데워 마신 적은 있지요.”

“어머, 그런 분하고 있으니 영광이네요. 우유 많이 드세요.”

​사실 엄청 우울한 소설이면서도 대사가 찰져서 킥킥거리면서 재미있게 봤다. 부잣집 도련님에 잘생기고 유머까지 있고 여자에게 인기도 많은 요조가 살짝 부러울 뻔했으나 그렇다고 요조처럼 퇴폐적으로 살고 싶진 않았다.

90년대 스무 살 시절만 해도 자고로 예술가라면 랭보나 오스카 와일드처럼 퇴폐적이고 탐미적인 매력이 있어야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유튜브로 ‘장수의 비결’ 같은 거 검색하면서 담배 끊고, 운동하고, 식단 챙겨가며 웰빙 생존을 이어가고 있다. 오히려 20대 초반의 내가 지금의 나를 봤다면 자본주의와 타협한 타락한 예술가의 초상이라고 욕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책장을 덮고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과연 ‘인간다움’이라는 정의는 누가 만들었으며, 누가 ‘인간실격’이라고 선언할 수 있는가? 신이 아닌 이상, 적어도 인간인 우리들은 서로에게 ‘인간실격’이라는 규정을 지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에게조차도 말이다.

벚꽃들이 실격하여 어지러이 휘날리는 봄날, 잠시 다자이 오사무의 우울한 향기에 취해 보길 권한다. <인간실격>에서 부끄럽지만 숨기고 싶은 치부를 용기 있고 담담하게 고백한다는 것 자체에서 묘한 공감과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우울하고 부끄러운 과거들을 안고 살아간다. 그래도 살아가자. 인간은 모순적이라 아름답다.

신이 주신 시간과 삶에 대하여 감사하듯 예의를 갖추고 하루하루 불안이라는 빙산을 깨부수며 살아가자. 그리고 마지막 숨을 거두었을 때, 인간실격인 상태로 살아갔는지 인간으로서 살아갔는지 오직 신만이 판단할 일이다.

밴드 ‘크라잉넛’ 베이시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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