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한 취미생활, ‘글리’로 가도 되나요

한겨레21 2023. 4. 2.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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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의 플레이리스트]영화 같은 믹스를 만드는 10년차 DJ GLEE의 플레이리스트
DJ GLEE의 공연 영상 섬네일. 서울커뮤니티라디오(SCR) 유튜브 갈무리

친구의 블로그에서 귀여운 섬네일을 보았다. ‘멜티드’(Melted)라고 적힌 흘러내리는 풍선껌 같은 글씨 앞에서 음악을 트는 디제이(DJ)였다. 호기심에 이미지를 클릭해 첫 곡을 듣는 순간 마음이 몽글해졌다. 하지만 이 감동은 디제이가 주는 게 아니라 ‘원곡이 좋아서’이지 않나.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 박하게 평가하려는데,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찌릿한 흥분이 느껴졌다. 아니, 이 노래랑 이 노래가 이렇게 이어진다고? 새로운 맥락이 만들어지며 평범한 내 일상도 조금 근사해지는 기분이 든다. 이래서 사람들이 디제이가 만든 1시간짜리 세트를 듣는 걸까.

“저는 그게 한 편의 영화 같은 거라 생각해요. 수많은 쇼트가 모여 신을 이루고 또 그게 모여 하나를 이루는 게 영화잖아요. 디제잉도 비슷해요. 여러 곡으로 하나의 흐름이자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거죠. 무엇보다 선곡이 중요해요. 요리로 치면 신선한 재료를 고르는 것도 능력이잖아요. 디제이는 감독이자 요리사 역할이고요. 하지만 같은 노래들을 재료로 삼는다고 같은 믹스가 나오진 않아요. 선곡의 순서나 믹싱에 따라 천차만별인데요. 똑같이 백종원 레시피 보고 만들어도 내 요리는 꼭 맛없는 것처럼요. 그게 또 디제이 문화가 재미있는 부분이에요.”

어느덧 10년째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디제이 글리(박은규·31), 하지만 그는 자신을 디제이라 소개하지 않는다. 본업이 있어서일까. 그는 한 이동통신사에서 사무직으로 일한다. “저보다 훨씬 진지하게 디제잉에 임하는 분들이 많이 계세요. 그래서 제가 그걸 전면에 내세우는 게 조심스러울 때가 있어요.” 혹시 더 ‘중심’으로 가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없냐고 묻자 그는 천성과 맞지 않단다.

“저도 음악을 틀면서 기회들이 생기고 한발 내디디면 더 잘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게 체질이 아닌데 그렇게 애쓴다면 오래 지속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지금도 한 달에 한 번 정도 음악을 트는데, 일처럼 느껴지지 않게끔 적당히 스케줄을 조절하곤 해요.”

그는 꿈을 취미로 남겨두기로 선택했다. 자라온 환경의 영향도 컸다. “어릴 땐 뭐 하나 실패하면 큰일 터지는 걸로 알고 자랐어요. 줄곧 안정적인 게 최고라는 말을 듣고 자랐죠. 그래도 그런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게 저에게는 더 큰 가치였어요. 제가 하고 싶은 것들도 당연히 제 삶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더 중요한 것들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직장 연수원 시절, 동기들은 생각했단다. 쟤는 금방 나갈 거라고. 음악 틀러 다니는 걸 보니 회사랑 안 맞아 보인다고. 오산이었다. “제가 하는 일이 회사의 제안서를 쓰고 그걸로 고객을 설득하는 일이거든요. 피티(PT) 자료 만들고, 발표의 흐름을 만들고. 그런데 웃긴 건, 여기서 쓰이는 메커니즘이 디제이 믹스나 유튜브 플레이리스트 만들 때도 도움을 주더라고요.”

본질적으로 같은 일이었다. 흐름을 갖추고, 스토리를 만들어, 감동시키는 일.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남들도 좋아하게 만드는 일. “그리고 또 하나, 제가 회사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건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 때문이에요. 디제이 신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회사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풍기는 분위기만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까지 조금씩 달라요. 두 공간의 사람들과 모두 어울린다면 그만큼 제 시야, 제 세상이 넓어지는 거라 생각해요.”

마치 유럽인의 삶 같다. 나의 전부를 시장에 내놓지 않으면서 안정적인 기반 위에서 다양한 시도를 하는 모습이. 그런 그의 코어한 취향을 엿볼 수 있는 유튜브 플레이리스트를 가져왔다. 혹시 이게 마음에 든다면, 당신은 그가 트는 음악 역시 좋아할 것이다.

정성은 비디오편의점 대표PD

DJ GLEE(인스타그램 @dancewithglee)의 추천 플레이리스트

❶DJ 브레이크봇의 보일러룸 믹스. 유튜브 갈무리

❶DJ 브레이크봇의 보일러룸 믹스

https://youtu.be/LXgTp40Y3zo

누군가는 이제 한물갔다고 하지만, 여전히 내겐 최고의 DISCO 프로듀서이자 DJ 슈퍼스타 브레이크봇(Breakbot).

❷언니네 이발관 5집 녹음 스케치

https://youtu.be/N3W8GohXcz0

한국 인디, 나아가 한국 대중음악 명반 언니네 이발관 5집 ‘가장 보통의 존재’의 비하인드 스토리.

❸이옥섭 감독 영화 <4학년 보경이>. 유튜브 갈무리

❸이옥섭 감독 영화 <4학년 보경이>

https://youtu.be/crHde6oZWW4

사실 이옥섭 감독 영화 중에 <연애다큐>(2015)를 가장 좋아하는데 그게 없어서, 차선으로.

*남들의 플레이리스트: 김수진 컬처디렉터와 정성은 비디오편의점 대표PD가 ‘지인’에게 유튜브 영상을 추천받아, 독자에게 다시 권하는 칼럼입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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