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불공정 계약·보수 미지급… 부조리에 멍드는 ‘K콘텐츠’ [심층기획-예술인 권리침해는 ‘현재진행형’]

이강은 2023. 4. 2.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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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고무신’ ‘구름빵’ 성공 이면엔…
작품 흥행에도 작가 저작권 보호 못받아
제작·출판사에 권리위임 계약 발목 잡혀
이우영 작가 법적분쟁 끝 안타까운 죽음
특단 대책 없이는 언제든 사태 재발 가능
불공정행위에 우는 예술인들
9년간 예술인 신문고에 1474건 접수
수익배분 거부 77%… 불공정계약 13%
상당수가 프리랜서… 권리주장 힘들어
원작자 보호 실질적 법체계 확립 시급
# 4인조 밴드 활동을 하던 가수 A씨는 2021년 B사와 전속계약을 했다. 하지만 서로 신뢰관계에 금이 가면서 갈등을 빚자 B사는 지난해 계약 해지 의사를 표시했고, 리더였던 A씨 등 밴드 멤버들도 동의했다. 그런데 B사는 돌연 A씨의 계약만 해지하지 않더니 공연 기획과 연습, 연주 활동 지원 등 소속사로서 의무를 게을리했다. 평소 눈 밖에 났던 A씨에게 ‘반성하라’는 차원에서 일종의 괘씸죄를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해당 밴드는 사실상 해체됐고, A씨는 한동안 손발이 묶이는 처지가 됐다.

# 전통 예술단체 회원인 C씨는 지난해 내부 갈등을 겪던 단체의 정상화 과정에서 일방적으로 제명당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단체 운영을 저해하는 행동을 하였을 경우 징계되는 것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제출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C씨는 정당한 문제 제기조차 용납하지 않는 서약서라고 판단해 제출을 거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제명으로 공연에 참가할 수 없어 생계마저 위협받는 상황에 몰렸다.
참다못한 A씨와 C씨는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운영하는 ‘예술인 신문고’에 피해 내용을 신고했고, 문화체육관광부 조사 결과 각각 소속사와 단체의 ‘예술창작 활동 방해행위’가 인정돼 구제받는 길이 열렸다.

이처럼 문화예술 현장에서 불공정한 계약과 갑질 피해, 보수 미지급, 부조리한 관행 등에 시달리며 창작·공연 활동에 어려움을 겪는 예술인이 적지 않다. 이런 실태를 방치할 경우 장르를 불문하고 세계적 위상이 높아진 이른바 ‘K컬처·콘텐츠’의 경쟁력에도 악재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K컬처와 콘텐츠 힘은 창작자를 비롯한 예술인의 창의적 영감과 열정, 흥이 원천인 만큼 그 원천을 오염시키거나 메마르게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유명 만화 ‘검정고무신’을 그린 이우영(51) 작가의 안타까운 죽음이 시사하는 바가 큰 이유다.

이 작가가 그림을 그린 ‘검정고무신’은 만화에 이어 2차적 저작물인 애니메이션과 게임, 캐릭터 사업화 등으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사업 대행업체에 저작물과 모든 2차적 사업권에 대한 권리를 위임하는 계약을 한 게 이 작가의 발목을 잡았다. 그는 ‘검정고무신’ 캐릭터로 개별 창작·출판 활동을 하다 2019년 저작권 위반 혐의로 고소 및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을 당했다. 생전 “대행회사는 원작자 동의 없이 마음대로 캐릭터 사업을 하고 원작자는 왜 대행회사 허락을 받아 만화를 그려야 하는지, 왜 피고인의 몸으로 재판을 받아야 하는지 어리둥절하다”고 억울함을 토로했던 이 작가는 창작 의욕마저 꺾인 채 얼마 전 하늘로 가버렸다.
앞서 ‘아동문학의 노벨상’이라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추모상(알마상)’을 한국인 최초로 수상한 백희나 작가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백 작가가 신인 시절이던 2003년 출판사와 계약하고 이듬해 출간한 ‘구름빵’은 세계 각국에서 인기를 끌었고, 뮤지컬과 애니메이션 등으로도 만들어져 적잖은 수익을 냈다. 하지만 백 작가는 ‘구름빵’ 캐릭터가 2·3차 저작물로 사업화되는 과정에 어떤 관여도 할 수 없었고, 정당한 보상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원고료 등 명목으로 일정 금액을 받고 저작권 등 권리 일체를 출판사에 넘기는 ‘매절(賣切) 계약’의 덫에 걸려서다. 그는 결국 2017년 계약 내용이 불공정하다며 소송전을 불사했지만 울분만 삼켜야 했다. 법원이 ‘계약 체결 당시 부당하거나 불공정한 법률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없다’며 2020년 출판사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특단의 대책이 마련되지 않는 한 제2의 ‘검정고무신’, ‘구름빵’ 사태는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 실제 예술인 권리침해 사례는 분야를 막론하고 심심찮게 일어난다. 지난해 9월 ‘예술인 지위와 권리의 보장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기 전까지 약 9년간 예술인 신문고에 접수된 불공정행위는 모두 1474건이었다. 구체적으로 수익 배분 거부·지연·제한이 1137건(77.1%)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 △불공정 계약 강요 185건(12.6%) △예술창작활동 방해·지시·간섭 122건(8.3%) △정보의 부당 이용 및 제공 30건(2.0%) 순이었다. 예술인 권리보장법 시행 이후 올 3월 현재까지도 수익 배분 거부·지연·제한(42건, 56.0%)과 불공정한 계약 강요(14건, 18.7%) 등 75건이 접수됐다. 피해 본 사실을 모르고 있거나 알아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속수무책인 예술인까지 감안하면 피해 사례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권리침해 유형 중 수익 배분 거부·지연·제한과 불공정한 계약 강요가 압도적인 데는 전업·겸업 예술인 상당수가 프리랜서(자유계약자)인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우영·백희나 작가처럼 계약 당시 처한 형편이나 관행, 법률적 지식 미비 등으로 사업자의 의도에 말려들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문체부가 3년마다 실시하는 예술인 실태조사(2021년 기준, 14개 예술 분야 5000명 대상)에 따르면, 전업·겸업 예술인 중 프리랜서는 각각 78.2%와 72.2%에 달했다. 예술활동 계약 체결 경험률은 ‘서면 계약’(48.7%)과 ‘구두 계약’(6.1%) 합쳐 54.8%에 그쳤다. 서면 계약도 문체부 표준계약서를 사용한 경우는 66.0%였다. 10명 중 3명가량은 엉성한 계약서에 서명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창작자 등 예술인들이 정당한 권리를 보장받으며 맘껏 활동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가 강화돼야 한다고 주문한다. 예술인복지재단의 예술인 대상 법률상담 업무를 돕고 있는 김필성 법무법인 가로수 변호사는 “나중에 (원작과 2차 저작물 사업화 등을 통해) 큰 수익이 날 경우 사업자와 창작자가 적절히 나눠 갖는 법적 근거가 시급하다”며 “저작권 외에도 원작자를 보호하는 방안 등 예술인 권리보장을 위한 실질적인 법체계가 중장기적으로 확립돼야 한다”고 말했다.
문체부와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해 웹툰 창작자 및 사업자(제작사·플랫폼)와 손잡고 웹툰 생태계 상생 방안을 모색한 ‘웹툰상생협의체’ 모델의 분야별 확산도 요구된다. 웹툰상생협의체의 한 관계자는 “협의체에 보완할 부분도 적지 않았지만 웹툰작가 단체와 업계 관계자들이 서로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면서 균형점을 도출하는 기회가 생긴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예술 분야·직종별 특성을 감안한 맞춤형 인식개선 교육, 예술 분야 이해도가 높은 전문 지원인력 확충, 지방자치단체를 비롯한 공공기관의 솔선수범 등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높다. 문체부 이은복 예술정책관은 “예술인이 더 자유롭고 공정한 환경에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부조리한 문제와 잘못된 관행을 개선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김기복 예술인 권리보장위 초대 위원장 “계약과정 보이지 않는 압박 많아… 구조적 문제 개선을”

“이우영 작가의 비극적 죽음을 보고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많은 예술인이 저작권 등 작품활동 관련 계약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강요나 압박을 받지 않도록 구조적 문제를 찾아 개선해야 합니다.”
김기복 예술인 권리보장 및 성희롱·성폭력 피해구제 위원회 초대 위원장.
김기복(65) 예술인 권리보장 및 성희롱·성폭력 피해구제 위원회(이하 예술인 권리보장위원회) 초대 위원장은 31일 세계일보 인터뷰에서 위원회도 예술인들을 돕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며 이같이 밝혔다.

지난해 9월 시행된 ‘예술인의 지위와 권리의 보장에 관한 법률’에 따라 올 초 출범한 예술인 권리보장위원회는 예술인의 지위와 권리 보장 정책의 수립 및 시행에 관한 사항, 예술인 권리침해행위 신고 사건에 관한 사항 등을 심의·의결하는 기구다. 권리침해 신고가 많은 분야의 예술인과 변호사·노무사 등 12명 위원이 위촉됐고, 위원 간 호선으로 김 위원장이 뽑혔다. 배우 출신인 김 위원장은 1999년부터 연기자 노조 사무총장과 한국 방송실연자(출연자)권리협회 이사장, 문화예술공정위원회 2기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예술인 권리보장 법률 시행과 위원회 출범은 예술인 보호를 위해 많이 진일보한 것”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위원회의 역할이 심의·의결로 제한된 점을 크게 아쉬워했다. 김 위원장은 “예술인들의 권리가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방안이나 정책을 만드는 데 위원회가 주도적으로 참여하도록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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