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 불명의 닮은꼴 인물 묘사… 우울과 공허를 대면하다 [박미란의 속닥이는 그림들]
베를린·서울 오가며 활동하는 회화 작가
타국에서 주변인으로 살며 키워낸 내면
두 도시 간 파란 새벽은 낮밤과 다른 감정
서로 다른 존재의 미묘한 공감 이끌어내
기하학적인 건축구조 띤 장면 속 배경에
인체 조명하는 극적인 빛의 활용 돋보여
김진희(33)의 그림 속 인물들은 마치 한사람처럼 닮은꼴이다. 모호한 생김새로 그린 이들은 성별도, 나이도, 국적도 뚜렷이 드러내지 않는다. 특정한 색채 없이 투명한 피부가 주변 세상의 빛깔을 투영해낸다. 김진희는 베를린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는 회화 작가다. 유학 시절 인물을 그리면 질문을 많이 받았다. 동양인을 그리면 ‘왜 동양인만 그리느냐’고 묻고 서양인을 그리면 ‘왜 동양인이 서양인을 그리느냐’고 묻는 식이었다. 인종과 관계없이 다양한 개인의 서사를 다루기 원했으나, 사람들은 동양인인 작가의 외양적 정체성에 우선 주목했다. 국적 없는 얼굴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에 지금 같은 인물들을 만들어냈다.
새벽 시간, 어두움에 가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햇살이 비추기 이전 방 안은 푸른 그림자로 가득하다. 그 작은 우주 안에 무엇이든 묻어둘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부푼 마음 끝자락에 진솔한 언어들이 새어 나온다.
베를린의 새벽은 서울의 아침이다. 두 도시 간 파란 새벽을 유예하거나 앞당기며, 김진희는 특유의 시간을 보다 또렷이 대면한다. 베를린의 새벽이 보내온 사진들과 서울의 새벽이 전송한 문장들에는 낮밤과 다른 감정이 짙게 배어 있다. 새벽 시간은 서로 다른 존재 간의 미묘한 공감을 이끌어낸다. 잠들지 않은 이들 사이 나눈 비밀이 새벽녘 곳곳에 숨어 있다. 그림자가 다 걷히면 특별하지 않을 고백들이 잠시 이 새벽의 주인이 된다.
‘새벽의 아래 불을 켜다’(2023)의 화면 중앙에 커다란 원탁이 보인다. 전구 빛을 투영하는 밝은 탁자는 하늘 위 지지 않은 달을 닮았다. 새벽 한 조각을 밝혀 원탁에 둘러앉은 네 사람이 일제히 관객을 응시한다. 그 가운데 유독 작게 그려진 한 사람이 눈에 띈다. 한쪽 무릎을 세운 채 원탁 위에 올라앉아 사선 아래를 가만히 내려보는 모습이다. 하단부의 그림자 속 강아지 한 마리는 이 눈길 교환의 장에 참여하기보다 그저 주인을 본다.
김진희의 회화에서 빛은 중요한 요소다. 장면 속 배경은 대부분 기하학적 건축구조를 띠고 있다. 빛은 원통 모양 기둥의 양감을 강조하거나, 직각으로 떨어지는 모서리의 꼭짓점에 밝게 고이며 연극적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원만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인체를 조명하는 데 있어서도 극적인 빛의 활용이 돋보인다.
‘새벽의 아래 불을 켜다’의 원탁을 밝히는 불빛은 인물들 간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에 주목하도록 이끈다. 한편 ‘쌓여가는 공백’(2022)은 문틈에서 새어 나온 빛이 한 사람의 얼굴 위에 드리우는 모습을 근접 화면으로 보여준다. 어두움 속의 인물이 밝은 곳의 사건을 은밀하게 엿보는 장면이다. 이때 빛은 푸른 그림자가 드리운 인물의 표정을 더욱 섬세하게 들여다보도록 한다. 밝은 곳의 사건보다 어두운 자리의 감정 표현에 주목하도록 돕는 것이다. 마음속에 쌓여가는 공백의 이유가 시선 닿는 밝은 곳의 사건 때문이든, 자신이 발 디딘 어두운 현재의 시간 때문이든 상관없다. 그 감정을 감내하며 공백을 대면하는 또렷한 눈빛이 오롯이 돋보인다.
공간과 인물의 정서를 연결 짓는 장치 또한 빛이다. 기하학적 형태 위에 드리운 빛의 온도가 공간과 인물을 하나의 몸처럼 소통하게 한다. 인물들이 머무르는 곳은 주로 집과 같은 사적인 공간이다. 또는 극장 등 공적 공간 안에서 발견한 사적 순간의 장면이다. 작가는 장소 자체가 지닌 특성을 드러내기보다 각 공간에 깃든 인물의 몸짓과 표정을 내보이기 위한 무대장치로서 배경을 활용한다. 인물은 공간의 일부가 되고, 공간은 인물의 확장이 된다.
부재의 자리가 애틋한 까닭은 떠나간 무엇이 존재했던 탓이다. 상실의 경험이 불러오는 슬픔은 꿈꾸던 행복의 크기에 알맞게 비례한다. 공허한 우울감이 아프고도 아름다운 이유는 그래서일 테다. 그 냉혹한 감정이 늘 온난함의 결핍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말이다. 마음 한구석의 안쓰러운 갈망을 우리는 내심 사랑하는 것이다.
어두움은 언제나 상대적이다. 새벽의 그림자는 밤중 까만 세상에 대하여서만 푸르고 아침이 밝아오기 이전이라야만 어둡다. 잠든 것들과 깨어난 것들 사이에서, 꿈과 일상이 마주 닿는 경로에서 숨어 있던 감정들이 발에 챈다. 낮밤의 경계에서 수면을 찰박이며, 낯선 나를 마주하는 찰나의 시간. 완전히 가라앉지도 떠오르지도 못한 채 새벽녘 그림자를 조심히 어루만지는 때다.
“어떤 대상의 상실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어딘가 어색하다. 의식적으로 행동할 수도, 무의식적으로 행동할 수도 없다. 의식적으로 행동하기엔 개인의 감정을 표준화하는 듯한 거리낌이 들며, 반대로 무의식적으로 행동하기엔 나의 감정을 모두 들킬까 염려스럽다.”
2019년 김진희가 작가노트에 적은 글귀다. 어떠한 사건으로부터 경험한 감정이 스스로에게 낯설수록 타인 앞에 드러내 표현하는 일이 어려워진다. 긍정적 기분이든 부정적 마음이든 마찬가지다. 그 감정이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이 클수록, 남의 공감을 바라기보다 내면 깊이 묻어 간직하고 싶어진다.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는 순간 세세한 정서와 느낌들이 그저 납작한 문장으로 축소되어 흩어질 것만 같아서다. 나의 고유한 아픔이 모두가 아는 보편적 감정으로 변모할까 걱정되어서. 그러다 문득 혼자만의 시간이 찾아오면 오래된 감정을 다시 꺼내어 가만히 들여다보곤 하는 것이다. 그때가 나의 새벽이다.
근작 회화 ‘극장에서’(2023)는 좌석에서 일어나 빛을 등지고 떠나는 사람의 장면을 선보인다. 파란 새벽 그림자를 한 몸 가득 품고 극장을 바삐 떠나가는 이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보인다. 모두의 극장에서 잠시 떠나 새벽 방 안에 머무는 시간이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아주 사적인 무대 위에 가장 개인적인 감정을 올려놓고 마음껏 슬퍼하는 일, 온 힘 다해 울어내는 일. 그러나 결코 감정에 침몰하지 않으며 무던히 그 시간을 지새워야 한다. 서로의 새벽을 공감하고 보듬으며 각자의 아침을 기다리는 것이다. 빛나는 날에 적응하기 위한 아주 잠깐의 과정이니까, 마침내 지나갈 어둠이니까.
박미란 큐레이터, 미술이론 및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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