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토링] 일본을 모르면 백전백패라 했거늘

이남석 발행인 2023. 4. 1.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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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열정·소통의 리더 이순신⓱
한일 관계 개선한다는 명분으로
강제동원 피해자 구상권 청구 포기
일본이 더 많은 걸 요구할 수 있어
일본 내부 꿰뚫어 보지 않은 결과

임진왜란 때 신립의 전사戰死가 시사하는 바는 크다. 육전에 능한 왜군의 전투력을 얕잡아봤다가 굴욕적인 패전을 맛봤기 때문이다. 적을 알면 백전백승일 텐데, 섣불리 응전하다가 화를 입었다. 최근 일본 정부가 독도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고, 일제강점기 때 조선인을 강제동원했다는 논란을 희석하는 내용을 골자로 삼은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의 검정 결과를 발표했다. 윤석열 정부는 이런 기류를 과연 알았을까.

일본이 일제강점기 때 강제동원을 희석하는 내용을 담은 초등학교 교과서의 검정 결과를 발표했다.[사진=뉴시스]

도순변사 신립은 각 도에서 차출한 병마 8000기를 거느리고 의기당당하게 충주성 북쪽 단월역丹月驛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일의 눈물 섞인 호소에 신립은 군사를 내주며 "패군한 죄는 공을 세워 갚으라"고 명을 내린 뒤 종사관 김여물, 충주목사 이종장 등과 함께 군사회의를 열었다.

'적이 조령으로 몰려올 때 어떻게 막을까'라는 게 의제였다. 조령은 남부지방에서 한성으로 가는 세 갈래 길 가운데 중간에 위치한 요충지로 왜군의 입장에선 절대 긴장을 풀 수 없는 지역이다.

아군의 의견은 두 가지로 갈렸다. 김여물과 이종장이 먼저 의견을 제시했다. 아군은 적고, 적군은 많은 점을 감안해 험지 요새인 조령의 지형지물을 이용한 전술을 펴자는 것이었다. 복병전과 게릴라전을 병행해 왜군에 타격을 입히자는 주장이었다.

반면 신립은 계곡에서 싸우기보단 기병전에서 유리한 평야에서 승부를 보자고 주장했다. 적의 전력에 무지한 탓인지, 임기응변도 없던 탓인지, 자만심 때문인지, 대장 신립은 참모들의 의견을 묵살하며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였다.

그러자 김여물이 열변을 토해냈다. "훈련도 부족한 데다 전쟁 경험도 없는 아군 8000병마로 평지에서 대규모 왜군과 싸우는 것은 이로울 게 없습니다. 천혜의 지형을 활용하지 않을 것이면, 차라리 한강에 의지해 한성이나 지키는 것이 옳을까 합니다."

반론을 들은 신립은 "염려 마오. 적군은 내가 감당할 것이니"라고 장담했다. 신립의 무모한 고집에 김여물은 '죽을 운명'을 직감하고 아들에게 탄식을 담은 고별 서신을 보냈다.

신립은 충주 달천강을 등진 탄금대彈琴臺에서 배수진을 치고 "죽기로 싸워 나라의 은혜를 보답하자"며 장병들을 격려했다. 강을 등지고 있어 쉽게 달아날 수도 없는 8000기병은 결사항전 태세를 갖췄다. 신립은 용장이었으나 전쟁은 용기로만 하는 게 아니었다.

왜군은 순식간에 상주·함창·문경을 차례로 함락하고 조령 밑에 이르렀다. 적장 소서행장은 치밀했다. 조선군이 복병전술을 펼칠 것을 대비해 척후대를 먼저 보내 지형을 면밀히 살폈다. 조령은 험난한 산곡이 30리가량 뻗쳐 나간 외길목이었다.

소수의 군사가 지키고 있어도 돌파하기 힘든 지역이다. 그럼에도 조선군은 조령에서 아무런 책략을 쓰지 않은 채 평야에서 왜군을 기다렸다. 왜군은 아무런 저항 없이 너무도 쉽게 조령을 돌파했다.

충주 단월역에 이르러 군사를 정돈한 왜군은 신립의 진을 향해 좌우 두갈래로 쳐들어갔다. 때를 맞춰 가등청정의 부대가 죽령을 넘어 충주에 도착, 신립의 진을 압박했다. 4월 28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조선군은 왜군에 완패했다. 신립은 탄금대에서 전사했고, 충신 김여물도 역시 전사했다. 이 소식은 당일 파발마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신립의 패인은 적의 화력을 너무 얕잡았다는 거다. '섬나라 군대' 왜군이 육지에서 싸울 수 있겠느냐는 정확하지 않은 정보가 패착으로 작용했다. 적을 알면 백전백승이요, 적을 모르면 백전백패다. 어떤 전쟁에서든 적의 사정을 꿰뚫어야 승리의 발판을 놓을 수 있다. 이는 조선시대를 넘어 현 시대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최근 일본 정부가 독도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고, 일제강점기 때 조선인을 강제동원했다는 논란을 희석하는 내용을 골자로 삼은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의 검정 결과를 발표했다. 지난 3월 16~17일 한일정상회담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한일 관계를 개선한다는 명분 하나로 '강제동원 피해자의 구상권 청구'까지 포기했는데, 이 전략이 되레 부메랑으로 돌아온 격이 됐다.

사실 우려했던 일이긴 하다. 윤 정부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를 위한 배상 책임을 일본 기업이 아닌 국내 기업에 맡기면서도 구상권마저 청구하지 않기로 해 논란을 빚었다. 이 때문에 많은 전문가는 한일정상회담 이후 '전 정부 시절 위축됐던 일본이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면서 우려를 표했는데, 그게 벌써 현실로 나타나고 말했다.

외교부는 3월 28일 대변인 명의의 성명을 통해 "일본 정부는 역사를 직시하는 가운데 미래 세대의 교육에 있어 더욱 책임 있는 행동을 보여줘야 할 것"이라며 유감을 표시했지만 이미 꼬여버린 문제의 실타리를 풀 수 있을진 의문이다. 일본 정부의 생각, 일본 내부의 분위기를 꿰뚫어 보지 않은 채 섣불리 강제동원 해법을 공개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마치 신립처럼 말이다.

과거의 패착 되돌아봤나

믿었던 신립의 패배에 조정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고, 선조는 좌불안석이었다. 도승지 이항복이 좌의정 류성룡에게 자신의 손바닥에 쓴 글씨를 내밀었다. 입마영강문立馬永康門. '말을 영강문에 세웠다'는 뜻으로 '선조를 모시고 피신하자'는 취지였다. 류성룡이 도승지의 뜻을 은밀히 전하자, 선조도 못 이기는 척 몽진蒙塵(먼지를 뒤집어쓸 각오를 하면서 가는 피난)을 받아들였다.

선조는 대신들을 불러 파천(왕의 피난)을 논의했다. 영의정 이산해는 "잠깐이라도 평양으로 행행(임금의 행차)하심이 옳을 걸로 아뢰옵니다"라고 읍소했다. 이항복도 "서관(황해도와 평안도를 함께 이르는 말)을 거쳐 명나라로 가서 회복을 도모할 수밖에 없습니다"며 가세했다.

그러자 장령 권협權悏이 "상감, 못 가십니다! 종묘사직이 있는 한양을 사수해야 할 일입니다"며 반대했다. 얼마나 바닥에 깊이 조아렸는지 권협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 내렸지만 선조는 그저 듣기만 할 뿐이었다.

참으로 뻔뻔한 인물도 있었다. 전임 이조판서 유홍兪泓이 상소문을 올렸다. "마혜(삼 따위로 만든 짚신)는 궁중의 소용이 아니옵고, 금은보화는 적병을 막는 병기가 아니오니, 이런 것을 준비해 피난하는 일은 망국지본이옵니다. 모름지기 굳게 도성을 지켜 군신이 사직과 함께 죽는 것이 가할 것입니다."

유홍은 정작 남보다 먼저 가솔을 북쪽으로 피난시켜 놓고 이따위 주장을 했다. 당시 서울을 지킬 군사는 대략 7000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마저 오합지졸 수준이라 틈만 나면 달아났다. 중앙관청의 관료들도 '도긴개긴' 마찬가지였다. 내로라하는 인사들의 친인척들은 저마다 짐을 챙겨 북쪽으로 진작에 떠났다.

일본 초등학교 검정교과서에는 '징병' 대신 '지원'이란 단어를 썼고, 독도는 '한국이 불법 점거'했다고 표현했다.[사진=연합뉴스]

조정에서 설왕설래가 한창일 때 좌의정 류성룡이 입을 열었다. "여러 왕자를 각 도로 나눠서 보내되 중신을 대동케 하시오." 이에 따라 선조의 아들 중 임해군 진珒을 함경도로, 순화군 규珪는 강원도로 피난시키기로 했다.

"경은 유도대장을 맡아 한성을 지키시오." 선조가 류성룡에게 이같은 지시를 내리자, 그 자리에서 도승지 이항복이 만류했다. "압록강을 건너면 명나라 땅이니, 조정에 있는 대신 중에 이 일에 대처할 만한 재주와 자격이 있는 인물은 좌상 류성룡뿐이옵니다. 좌상으로 하여금 한성을 지키게 하면 종국에는 패군지장이 될 뿐입니다. 대가를 호종(임금이 탄 수레를 시중 들며 따르는 일)을 맡기면 반드시 크게 쓸 일이 있을 것입니다."

선조는 이항복의 건의에 따라 좌의정 류성룡은 파천에 동행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우의정 이양원을 유도대장, 이전李戩에게 좌위장, 변언수邊彦琇에게 우위장, 박충간朴忠侃을 순검사로 삼아 서울을 지키도록 명했다.

또 경림군慶林君 김명원으로 도원수를, 신각申恪으로 부원수로 삼아 한강을 사수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대궐을 호위해야 할 5군영의 금군은 거의 도망친 상태였다. 소위 옥당이니 은대(승정원)니 6조3사의 관료들도 달아나 버리고 없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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