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동물권 넘어 ‘그것’의 권리까지 챙기라고?”…실험실의 그는 고통받았다 [씨네프레소]
박창영 기자(hanyeahwest@mk.co.kr) 2023. 4. 1. 19:03
[씨네프레소-73]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주의: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최근 얼룩말 세로의 동물원 탈출 소동은 동물권(동물의 권리)에 대한 논의의 장을 마련했다. 물론 동물원이 동물들에게 가혹한 공간이라는 지적이 있었던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세로의 탈출은 우리가 관념적으로 생각하던 동물원의 잔인성을 보다 구체적인 모양으로 떠올리게 했다. 한참 동안 도심을 질주한 얼룩말을 보며 인간은 그동안 세로가 얼마나 답답했을지 상상하게 된다. 그것은 유사성에 기반을 둔 공감이다.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유가 제한된 공간에서 염증을 느끼고, 이동의 자유를 갈망한다는 사실을 세로의 달리기를 통해 새삼 깨달은 것이다.
이번 사건이 동물원 폐지 움직임으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대중의 마음에 그 씨앗을 뿌린 것만큼은 확실하다. 동물도 마음껏 돌아다니고 싶다는 점에서 인간과 다르지 않다는 인식이 점점 더 확산하면 우리는 동물원 자체를 없애거나 적어도 동물원에서 동물의 권리를 보다 많이 보장하는 쪽으로 변해가게 될 것이다. 일각에선 인권에 대한 논의도 피곤한데 동물권까지 신경 써야 하냐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의 권리 역시 점차 넓은 범위로 확장돼 왔다는 점을 보면 동물권 확대는 장기적으로 피할 수 없는 흐름이 될 것이다.
결국 ‘나와 다른 존재’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선 ‘사실 그도 나와 비슷하다’는 동질감이 필요하다. 노예제와 신분제가 폐지되고, 더 많은 소수자의 인권이 보호되는 쪽으로 변해 온 역사에서 확인 가능하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2017)은 바로 이 유사성과 동질감에 대한 이야기다. 냉전 시대 미국 항공우주 연구센터의 비밀 실험실에 한 생명체가 연구를 목적으로 잡혀 오고, 이 생명체는 자신을 통해 더 많은 가치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로 인해 고통받는다. 특히, 실험실 보안 책임자인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는 ‘그것’을 당장 해부해 연구해야 한다며, 학대의 수위를 높여간다.
“화장실 나서며 손 씻는 남자는 나약한 남자”
스트릭랜드는 다른 존재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는 인간이 실험실 속 생명체를 막 대해도 되는 이유를 “사람은 신의 형상대로 창조됐고, ‘저것’은 그렇지 않다”는 데서 찾는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청소부 젤다(옥타비아 스펜서)가 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고 하자 그는 “인간처럼 생겼다”며 순환 논증을 하다가 “(당신보다는) 내 모습에 더 가깝다”는 인종차별적 사고를 드러낸다. 그의 머릿속에는 백인, 유색인종, 실험실 속 ‘그것’ 순으로 우월성의 순위가 정해져 있는 셈이다. 소변을 보기 전에만 손을 씻는 그는 화장실에서 언제 세면대를 쓰는지에 따라서 남자의 우열을 판단한다. 다시 말해, 자기 건강에만 관심이 있는 그는 용변 전에만 손 씻는 남자를 강한 인간으로 보고, 남을 배려하기 위해 용무 후에도 손을 씻는 남자를 깔본다.
그의 인간 우열 판단 체계에서 장애인은 아래에 있다. 스트릭랜드는 언어 장애인인 청소부 엘라이자(샐리 호킨스)를 거리낌 없이 무시한다. 벙어리라는 모욕적 표현은 물론이고 “말을 못 한다는 점 때문에 흥분된다”는 성희롱도 일삼는다. ‘다름’은 ‘열등함’이라고 해석하는 그는 타인과 자신의 유사성을 찾고 공감하려는 노력을 좀체 하지 않는다.
“그 사람처럼 소리 못 내는 나도 괴물인가요?”
엘라이자는 그와 정반대 편에 서 있는 인물이다. 그는 다른 존재와의 공통점을 적극적으로 찾아내고, 교감한다. “나도 그 사람처럼 입을 뻥긋거리고, 나도 그 사람처럼 소리를 못 낸다”는 엘라이자는 생명체를 ‘그’라고 부른다. 생명체를 ‘그것’이나 ‘저것’으로 지칭하는 스트릭랜드와 대조되는 모습이다. 실험실에서 맛없는 것만 먹는 ‘그’를 위해 삶은 계란을 가져다주고, 지루해하지 않도록 턴테이블을 가져가 음악을 틀어준다. 엘라이자는 그의 취향을 존중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한다.
주인공인 엘라이자 외에도 이 영화엔 자신과는 다른 존재를 존중하는 여러 사람이 등장한다. 로버트 호프스테틀러 박사는 그와 엘라이자가 교감하는 모습을 보고, 그를 실험용으로 쓰는 데 죄책감을 갖는다. 이에 박사는 ‘그’를 탈출시키려는 엘라이자의 계획을 돕는다. 스트릭랜드는 자신이 생명체를 잡아 온 곳에서 원주민들이 그를 신으로 받들고 있었다고 회상한다. 원주민들은 그가 지닌 ‘인간에게 없는 면모’를 차별의 근거로 간주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더 조심스럽게 접근하며 배려해야 할 대상으로 봤다.
혐오를 통해 드러나는 건, 대상이 혐오받을 만한 존재라는 게 아니다
역사는 엘라이자와 스트릭랜드의 싸움으로 이어져 왔다. 단기적으로는 모든 것을 제압할 힘을 지닌 스트릭랜드가 이기는 것처럼 보여도 장기적으로는 더 많은 존재를 배려한 엘라이자의 승리로 끝났다. 수많은 반대에도 참정권이 확대됐고, 어린이, 노약자, 소수자의 권리를 더 많이 보장하게 됐다. 영화는 묻는다. 누군가의 권리에 관해 주장할 때, 당신은 엘라이자와 스트릭랜드 중 어느 쪽에 가까운가.
영화의 특징적인 부분 중 하나는 실험실 안의 생명체를 인간 눈에 익숙한 이미지로 그려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에겐 아가미와 갈퀴, 비늘이 있고, 피부는 녹색이다. 토토로처럼 많은 관객이 한 번쯤 쓰다듬어 보고 싶어 할 만한 외양으로 그리지 않았다.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희석지 않기 위해서다. 인간이 친근하게 느끼지 않을, 어떤 면에서는 두렵게까지 여길 만한 외모를 지닌 생명체를 어떻게 대하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야 ‘다른 존재’에 대한 진정한 태도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제목은 ‘물의 모양’ 또는 ‘물의 형태’다. 물에는 정해진 모양이 없다. 하트 모양 컵에 담으면 하트 모양이 되고, 뱀의 형상을 한 그릇에 따르면 뱀 모양이 된다. 물의 모양은 실제로는 이를 담은 용기의 모양을 드러내는 것이다. 엘라이자 앞에서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되는 그를 보며 우리가 발견하는 건 엘라이자는 편견 없이 사랑하는 그릇이란 점이다. 반면, 그를 잔인하게 학대하는 스트릭랜드를 통해 드러나는 사실은 그가 학대받을 만한 존재라는 게 아니다. 스트릭랜드는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학대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누군가를 향한 사랑이나 혐오를 표현할 때, 발화자 자신에 대해 많은 정보가 노출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아래 기자 페이지 ‘구독’ 버튼을 누르면 더 많은 영화와 드라마 리뷰를 볼 수 있습니다. ‘씨네프레소’는 매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매일경제에서 직접 확인하세요. 해당 언론사로 이동합니다.
- “일본 침몰한다”던데...한국이 그들을 절대 무시해선 안되는 이유는? [한중일 톺아보기] - 매일
- “알몸은 다른 방식으로 연결”…은밀한 사교모임 ‘나체식당’ 충격 - 매일경제
- 아내를 두명 이나 죽인 남자의 황당 변명…“아들을 못 낳았잖아요”[사색(史色)] - 매일경제
- 19억 잠실 아파트가 부른 참극…재산 상속 갈등에 친누나 살해한 30대 - 매일경제
- “꽃구경 어디로 가세요?”…통신사 데이터로 본 ‘벚꽃 핫플’ - 매일경제
- [속보] 강남 납치·살인 3명 구속영장…강도살인·사체유기 혐의 - 매일경제
-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김재원 실언 눈감아준 與 속내는 - 매일경제
- “폭탄 들고 서문시장 간다”…경찰, 尹 겨냥한 테러 암시글 게시자 추적 - 매일경제
- “갤S23 ‘멍멍 에디션’ 출시”…삼성 만우절 장난에 한술 더 뜬 리뷰들 - 매일경제
- 스페인 “한국 우루과이전 아까워…이겼을 수도” [A매치] - MK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