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 비슷한 녀석들이 유치창깨고 끌어낸 일이 생생하다"

윤수현 기자 2023. 4. 1.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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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동현 동아투위 부위원장 "강제 해직 인정하고 사죄하라"

[미디어오늘 윤수현 기자]

1975년 3월17일. 언론인 160명이 강제 해직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1974년 10월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자 박정희 정권은 기업을 압박해 광고를 끊는 방식으로 동아일보를 압박했다. 시민들이 동아일보 격려 광고를 냈지만 역부족이었고, 결국 사측은 직원 백여 명을 회사 밖으로 내쫓았다. 강제 해직된 언론인들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이하 동아투위)를 구성해 싸움을 이어갔으며 한겨레 창간의 주역이 됐다.

동아일보·동아방송 언론인들이 강제 해직된 지 48년이 지났지만 이들의 명예는 회복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싸움도 끝나지 않았다. 미디어오늘은 23일 서울 충무로역 인근 동아투위 사무실에서 김동현 부위원장을 만나 동아투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김 부위원장은 동아일보가 해직 언론인에 대한 명예 회복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래는 일문일답이다.

▲미디어오늘과 인터뷰 중인 김동현 동아투위 부위원장. 사진=미디어오늘.

- 동아투위가 결성된 지 48년이 지났다. 당시 분위기는 어땠나.

“군부 독재 시대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노예의 삶이 강조된 야만의 시대'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언론인은 어땠을 것 같나. 동아투위 사건이 벌어지기 전 미국 학자가 김일성을 두고 '코미니스트 게릴라 리더'(Communist guerrilla leader)라고 표현했다. 이를 직역하면 뭔가. 빨치산 지도자다. 기사에 그렇게 썼다는 이유로 기자와 부장이 구속됐다. 김일성을 '공비 두목'이 아니라 지도자라고 표현한 것은 반국가단체를 찬양·고무했다는 거다. 정보부 요원이 편집국에 나와서 매일 '기사 줄여라 늘려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 시대에 살았다. 그러니 기사가 오죽했을까. 서울대 학생들이 동아일보 앞에서 언론 화형식을 열 정도였으니.”

- 결국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했다. 동아일보에 상주하는 기관원들을 쫓아내고, 이전이었으면 빠질 기사도 넣었다. 데스크도 자유언론에 대한 관심이나 여론이 크다 보니 막을 수 없었다. 그러니 광고 탄압이 들어왔다. 기업들이 모종의 이유로 동아일보 광고를 해약했다.”

- 그 유명한 동아일보 광고 탄압사건이다.

“광고가 빠지니 어쩔 수 없지 광고면을 백지로 냈다. 나중에 광고주를 찾아가 왜 광고를 뺐는지 물어봤다. 광고주는 '정보부와 국세청에서 연락이 왔다'고 했다. 국세청에서 광고를 빼라고 하니 한 달 전에 이야기가 됐던 광고도 빠지게 됐다. 그 이후 정보부가 동아일보 사주를 압박했고 '문제가 되는 기자들을 자르면 광고를 다시 넣어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1975년 3월17일 동아일보 사옥 밖으로 쫓겨났다.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한 게 1974년 10월24일인데, 반년 만에 그런 결과가 나왔다.”

1975년 3월, 회사 밖으로 내쫓긴 언론인들

▲ 19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하고 있는 동아일보 기자들. 사진=동아투위.

- 1975년 3월17일. 회사에서 쫓겨난 그날을 기억하는가.

“생생하다. 일부 위원들은 동아일보 사옥 2층에서 단식하고, 우리는 편집국에서 농성하고 있었다. 일종의 파업이다. 그런데 새벽 3시쯤이었나, 조폭 비슷한 사람들이 몰려왔다. 회사는 전국에 있는 판매국 직원들을 동원했다고 하는데, 조폭 비슷한 녀석들이었다. 유리창 깨고 뛰어 들어와서 우리를 끌어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우리 일 하나만 하겠다. 기다려달라'고 했고, 선언문을 읽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나가보니 천관우 선생을 비롯해 언론계 인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쫓겨났다.”

- 강제 해직 후 삶은 어땠나.

“회사(쌍용) 오너와 관련된 책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오너를 취재해서 자서전 같은 책을 쓰는 거다. 그러는 사이 민권일지 사건이 발생했다. 정권이 동아투위 소식지 내용을 문제 삼아 위원들을 구속시켰다. 당시 동아투위는 신문에서 보도되지 않은 사건들을 기사로 써서 배포하곤 했다. 나처럼 돈 버는 사람들이 구속된 위원들 뒷바라지를 했다. 수입의 10%는 무조건 기부했다. 백지 광고 사태 당시 광고주던 사람들도 우리에게 후원금을 줬다. 그런데 해직 기간이 기약 없이 길어지게 됐다. 금방 복직할 줄 알았는데…”

“동아일보가 설마 그렇게 할 거라고는”

- 복직을 기대했다는 걸로 봤을 땐 동아일보에 대한 희망이 남아있었던 것 같다.

“동아일보가 설마 그렇게 할 거라고는 상상 못했다. 언론사의 핵심은 인적 자산이다. 그런데 100명이 넘는 언론인을 해직시켰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애정도 남아있었고. 그런데 2008년 과거사위가 동아투위 사건과 관련해 '동아일보사가 정권의 요구대로 기자 등을 해임했으니 해직자들에게 사과하라'고 결정했다. 동아일보가 이듬해 소송을 제기하면서 기대가 사라졌다. 동아일보는 '백지광고 사태 때문에 경영이 어려워졌고, 자구책을 구하기 위해 구조조정을 했다'고 주장했다. 얼마나 실망스러웠겠나. 결국 사과하지 않았다. 업보는 자기들에게 다 돌아가게 돼 있다. 옛날에는 동아일보가 1등 신문이었지만, 요즘은 보수신문들 순서도 '조중동'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강제 해직에 대한 업보라고 생각한다.”

- 결국 대법원은 '정권의 압력을 받아 기자들을 해고했다'는 과거사위 결정을 증거 부족을 이유로 취소시켰다.

“판결이 납득이 안 된다. 물론 국가배상 소송에선 14명이 승소하기도 했다. 1인당 1000만 원을 받았는데, 14명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인정받지 못했다. 법리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아쉬운 판결이다.”

- 이후 회사에서 해직기자들을 복직시키려 시도하지 않았나.

“민주화 이후로 기억한다. DJ 때였나. 동아일보와 동아투위가 협상을 했다. 동아일보 입장에선 탐나는 기자들이 있었던 것. 그런데 조건이 있었다. 이부영, 성유보 같이 극한투쟁을 했던 사람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다. 그래서 동아투위도 '일부만 들어가는 건 동의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유신정권과 언론인은 같이 갈 수 없다”

▲동아미디어센터. 사진=미디어오늘.

- 언론사 취업 당시 왜 동아일보를 선택했나.

“그때는 동아일보 말고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위세도, 퀄리티도. 언론 중의 언론이었다. 다른 언론사와 비교해 대우도 괜찮았다. 다른 신문사가 정권이 무서워 내지 못하는 소식도 동아일보에선 가끔 나갔다. 동아일보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사회부에서 시작해 법조 출입을 오래 했다. 매일 법원에 가서 재판을 방청했다. 검찰을 만나 사건을 취재하기도 했고. 중간에 월간지 신동아로 가서 르포 기사를 쓰기도 했다.”

- 동아일보에 대한 애정이 컸을 것 같은데, 결국 직장을 잃었다. 젊은 나이에.

“얼마 지나지 않아 복직할 줄 알았다. 그래서 친구들에게도 '평생 글 못쓸 줄 알았으면 안 나갔을 건데'라고 농담삼아 이야기하기도 한다. 다만 그때 분위기를 봤을 때 자유언론을 요구하고, 해직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유신정권과 언론인은 같이 갈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사형수가 되고, 변호사가 재판 중 구속되는 일도 있었다. 야만의 시대였다.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인식이 없었을 때다. 그런데 기자들이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

- 조선투위 위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당시 정권이 해직기자들의 취업을 막았다고 한다.

“취업해서 출근했는데 정보부 사람이 회사에 있더라. 당시에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이사를 하면 경찰 정보과에서 가장 먼저 전화가 왔으니. 빅브라더 사회였다. 심지어 그 정보부 사람은 내 결혼식에도 왔다. 화가 나서 '인생에서 중요한 날인데, 오늘은 당신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하니 '미안해서 왔다'고 하더라. 그래도 나중에는 친해지긴 했다. 그 정보부 사람이 공항으로 파견을 갔는데, 업무적으로 도움을 받기도 했다. 관계라는 게 참… 직업상으로는 동아투위와 좋지 않은 관계였지만, 인간적으로는 세상이 얽혀 있다고 느꼈다.”

- 이후 광고업계에 매진했다.

“광고단체연합회 부회장까지 지냈다. 언론계에도 참여를 했다. 한겨레 창간 때 사회부로 오라는 제의가 있었는데 안 갔다. 밖에서 도와주고 싶었다. 지금도 주주다.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후 기업에 있다보니 현실감각이 생겼는데, 한겨레는 참 순수했다. 신문에 증권 시세를 싣지 않겠다고 했으니.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 현실에 적응할 필요도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나뿐만 아니라 동아투위 사람들 거의 다 한겨레 창업에 관여했다.”

- 동아투위에 가담하지 않고 남아있는 동료들도 있었지 않은가.

“기자로서 생활을 해야겠다거나, 경제적인 이유로 가담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어쩔 수 없는거다. 처음에는 갈등이 있었는데, 나이가 드니까 다 얼굴보고 살게 됐다. 치유되지 않는 고통은 없다고 하는데, 그렇게 된 것 같다.

동아투위 위원들끼리는 누구보다 가깝게 지내고 있다. 형제들 같다. 어려운 환경에 처했고, 서로 도와가면서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연대 의식이다. 중국 공산당도 보면 대장정에 참여한 사람들은 연대 의식을 갖고 있지 않나. 그런 공통점을 가지고 살고 있다. 동아투위 위원들 중 정치인이 된 사람도 있고, 언론인 생활을 이어간 사람도 있다. 출판업계 사람도 있고. 하는 일은 다르지만 정적으로 모임을 갖고 만난다. 동아일보에 재직한 기간은 짧았지만, 그때 생긴 정신은 영원한 거니까.”

“재산 상속받았으면 책임도 상속받아야”

▲동아일보, 채널A 사옥. 사진=미디어오늘.

- 동아일보 사주, 후배 기자들에게 바라는 건 있는가.

“명예 회복이다. 지금 이 나이에 돈을 요구하겠는가, 복직시켜달라고 하겠는가. 강제 해직을 인정하고, 사죄하고, 명예를 회복시켜주면 될 일이다. 우리를 복직시켜주면 그 다음날 사표 쓰고 나오면 되는 거 아닌가. 바라는 건 그거밖에 없다. 명문이라 불리는 인촌 가문의 대를 이었지 않은가. 할아버지,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았으면 책임도 상속받아야 한다. 과거를 매듭 지어주면 좋겠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분노'하길 바란다. 기자라는 직업은 특권을 가지고 있다. 세상의 맨 앞자리에서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는 특권 말이다. 그런 특권을 누리고 있으면, 국가나 사회의 부조리에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 물론 뉴미디어의 발달로 정보 독점이 없어졌고, 기자 일은 더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기자들이 제 역할을 해야 하는 건 분명하다. 기자들이 샐러리맨으로 바뀐 것 같다는 걱정이 있는데, 노력해줬으면 좋겠다.”

김동현 부위원장은 1969년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사회부에서 법조 출입을 맡았으며 동아투위 사건 후 강제 해직됐다. 이후 쌍용그룹에 들어가 홍보담당 상무를 지냈으며 한국광고단체연합회 부회장직을 역임했다. 현재는 동아투위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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