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가 살짝 연 좁은 문, 다시 열어젖힌 차준환과 이해인

김양희 한겨레신문 기자 2023. 4. 1.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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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피겨세계선수권에서 사상 최초 남녀 동반 은메달
2026 동계올림픽에서 동반 메달 기대감 높여

(시사저널=김양희 한겨레신문 기자)

#1. 아역 배우로 《돌아온 일지매》 등 드라마에 출연하고, 오리온 초코파이 등 광고를 찍었다. 여러 가지를 경험하면 좋을 것 같아서 스케이트를 탔다. 그리고 "바람을 가르는 시원한 느낌이 좋아서" 금방 빠져들었다. 그때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소년은 커서 한국 남자 피겨의 '처음'이 됐다. 차준환(21·고려대)이다. 

#2. 김연아가 등장하는 아이스 쇼에 갔다. 가장 먼저 '반짝반짝 빛나는 의상'이 눈에 들어왔다. 얼음 위 점프는 마냥 신기했다. 그때부터 부모님을 졸랐다.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되고 싶다"고. 8년의 세월이 흐른 후, 소녀는 한국 피겨 사상 최연소 세계 톱10에 이름을 올렸다. 이해인(17·세화여고)이다.

2023 피겨스케이팅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나란히 은메달을 획득한 이해인·차준환이 3월27일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며 메달을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 남자 피겨 최초의 이름, 차준환

한국 피겨는 3월25일 일본 사이타마현에서 끝난 2023 국제빙상경기연맹(ISU) 피겨스케이팅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사상 최초로 남녀 싱글 시상대에 나란히 섰다. 이해인이 먼저 김연아(은퇴) 이후 10년 만에 처음으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고, 다음 날 차준환도 세계 2위를 차지했다. 피겨세계선수권에서 한국 선수가 메달을 딴 것은 그동안 김연아가 유일했다. 톱10 안에도 들기 버거웠던 '피겨 불모지'였던 한국이다. 하지만 차준환과 이해인이 김연아가 살짝 열어놨던 좁은 문을 다시 열었다. 둘의 활약 덕에 한국은 2024년 피겨세계선수권 남녀 싱글 출전 티켓을 각 3장씩 따냈다.    

차준환은 한국 남자 피겨에서 독보적 존재다. 여자 싱글의 김연아처럼 그의 길은 남자 싱글의 역사가 되고 있다. 주니어 시절부터 빛났다. 2016~17 시즌 한국 남자선수로는 최초로 한 시즌에 두 차례 주니어 그랑프리 메달을 획득했고,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도 한국 남자선수 최초로 동메달을 따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 남자 싱글 전체 참가 선수 중 최연소였던 그는 역시나 한국 남자 피겨 올림픽 최고 순위(15위)를 역사에 남겼다. 2018~19 시즌에는 한국 남자 첫 시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 진출해 동메달을 획득했다. 코로나19 팬데믹 탓에 국외로 훈련을 가지 못하면서 많은 제약이 있었지만 2021년 세계선수권 때 한국 남자선수 최초로 톱10(10위)에 올랐고, 2022년 4대륙 선수권대회 때는 최초로 시상대 맨 꼭대기(금메달)에 섰다. 고관절 부상 등을 딛고 일궈낸 결과물이다.

 생애 두 번째 참가한 올림픽(2022 베이징올림픽) 때는 자신의 순위를 한껏 끌어올렸다. 풍부한 표현력으로 세계 5위에 등극했다. 그리고, 하뉴 유즈루(일본)가 은퇴하고 네이선 첸(미국)이 학업을 위해 시즌을 거르는 동안 세계선수권에서 기어이 개인 최고 점수로 세계 톱2가 됐다.

 차준환의 장점은 곡 해석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손끝, 발끝으로 전해지는 그의 안무 수행력은 어릴 적부터 배운 발레와 현대무용으로 더욱 극대화됐다. 이번 세계선수권에서 경쟁자들보다 적게 쿼드러플 점프(공중 4회전)를 뛰었는데도 2위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더 중시하는 그는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을 대비해 쿼드러플 점프를 더 연마할 계획이다. "궁극적으로는 4회전-3회전 콤비네이션 점프, 쿼드러플 플립 등 고난도 기술을 구사할 수 있도록 훈련할 것"이라고 했다. 쿼드러플 악셀(공중 4.5회전)까지 뛰는 선수(일리아 말리닌·미국)가 등장해 쿼드러플 점프 완성도를 높이는 일은 더욱 중요해졌다. 

이해인 선수·차준환 선수 ⓒREUTERS 연합·EPA 연합

이해인, 점프 안 되는 날엔 분해서 눈물 터뜨리기도

이해인 또한 차준환처럼 주니어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트리플 5종 점프를 초등학교 5학년 즈음에 다 뛰었다. 점프가 안 되는 날에는 분해서 눈물까지 터뜨렸다. 점프에 감이 잡혔을 때는 아예 귀가하지 않고 링크 안에서 잠을 잔 적도 있다. 자정 넘어 새벽 2시까지 연습하다가 잠을 자고 다시 오전 7시에 일어나서 연습하는 식이었다. 이해인은 "한창 트리플 점프를 배울 때여서 조금이라도 더 뛰어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했다.

이해인의 노력은 곧바로 주니어 대회 성적으로 이어졌다. 이해인은 만 14세이던 2019년 9월 ISU 주니어 그랑프리 3차, 6차 대회에서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2021년 세계선수권 때는 한국 피겨 최연소 세계선수권 톱10(10위)의 기록을 썼다. 그때가 이해인의 시니어 데뷔 무대였다. 그의 활약에 한국은 2022년 베이징겨울올림픽 출전 티켓을 두 장 확보했다. 

하지만 정작 베이징 무대에는 서지 못했다.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컨디션 난조를 겪으면서 올림픽 출전 티켓은 유영·김예림에게 돌아갔다. 스스로에게도 마음에 큰 생채기가 났다. 그러나 이해인은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시도조차 안 하면 성공할 기회조차 없다"는 그의 좌우명처럼 또 다른 기회를 엿봤다. 조용히 칼을 간 이해인은 2022년 세계선수권에서 7위에 올랐다. 2023년 4대륙 선수권대회 때는 2009년 김연아 이후 13년 만에 금메달을 따냈다. 쇼트 프로그램에서 6위를 하고도 프리 스케이팅 클린 연기로 역전을 일궈냈다. 그리고 이번에 개인 최고점으로 세계선수권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해인은 대회 후 "(올림픽 출전 좌절 후) 나 자신에 관한 의심을 조금 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면서 "이번 대회를 통해 자신감을 찾았다"고 했다. 

평소 그림 그리기, 글쓰기를 좋아하는 이해인은 2023~24 시즌 트리플 악셀(공중 3.5회전)에 도전한다. 힘든 과제지만 기술을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다. 이번 세계선수권대회에는 피겨 강국 러시아 선수들이 제재 때문에 출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준환과 이해인의 가장 큰 무기는 '긍정 마인드'다. 여러 실패 속에서 얻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 이해인은 "매일 스케이트를 탈 때마다, 대회에 나갈 때마다 배우는 게 있다. 매일이 배움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차준환 또한 "여러 번 실패 끝에 얻는 성취감이 즐겁다. 도전하는 것이 인간의 욕구인데 힘들었던 것이 성공하면 '왜 이제 이게 성공했지?' 하는 마음도 든다"며 웃는다.

차준환은 "스케이트는 나의 인생 길잡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꿋꿋하게 앞길을 걸어가며 스케이터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점점 더 성장해 나가는 것 같기 때문"이란다. 얼음 위에 서는 순간 영광도 있었고, 시련도 있었고, 아픔도 있었다. 분명한 것은 차준환·이해인 모두 스케이트 자체를 많이 사랑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연아 키즈'들은 오늘도 거침없이 세계를 향해 도전하고, 또 도전한다. 자신의 이름을 빙판에 새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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