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검찰과의 전쟁으로 지지층 결집해 대선 나가려는…트럼프
제목을 읽다가 '우리나라 정치 얘기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건 당신의 기분 탓만은 아닐 수도 있다. 지금부터 소개하려는 얘기는 분명 미국 정치 이야기인데, 우리나라의 상황과 겹치거나 비교되어 보이는 부분이 꽤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차기대선을 치른다면 야당의 제1후보가 될 사람이 다양한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이 유력정치인은 자신은 죄가 없는데 정권으로부터 정치적 마녀사냥을 당하고 있으며, 검찰의 수사권이 그 무기로 쓰이고 있다면서 검찰을 악마화한다. 자신을 부당한 탄압의 희생자로 돋보이게 하여 강성지지층을 결집시키고, 그 힘으로 당내 경선을 돌파하고 차기 대선에 나가려 한다. 미국 얘기고, 장본인은 트럼프다.
도널드 J. 트럼프. 2017년부터 2021년까지 미국의 45대 대통령을 지냈다. 미국은 우리나라와 정당 구조가 달라서 '당 대표'라는 직위가 없지만, 트럼프는 소속정당인 공화당(현재 미국의 야당)에서 여전히 가장 힘센 정치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공화당의 기존 세력과는 다른 힘을 기층에서 끌어들여 공화당 기존 엘리트들의 애를 먹이고 있다.
대선 앞두고 불거진 여배우 관련 추문
트럼프 측은 스토미 다니엘스 측과 협상을 벌여 입을 닫는 대가로 13만 달러를 주기로 한다. 이 13만 달러는 '입막음 돈(hush-money)'라는 단어로 유명해졌다.
조용히 넘어가는가 싶던 이 사건은 트럼프의 대통령 임기중인 2018년에 월스트리트저널의 특종보도로 세상에 알려진다. 트럼프의 집사변호사이자 법률적 해결사로 불리던 마이클 코언이 책임을 뒤집어쓰고 나섰다. 스토미 다니엘스에게 준 13만 달러는 트럼프 선거자금이 아니라 자기 개인 돈이었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나중에 이를 코언에게 변제해 줬다. 코언이 트럼프 기업에 법률서비스를 제공한 데 대한 수수료로 처리했다. 하지만 개인 돈이라 하더라도 이는 트럼프의 선거를 돕기 위해 쓰인 것이니 선거를 목적으로 한 기부금이 되고, 그렇다면 법으로 정해진 한도와 용처를 넘은 것이며, 이 과정에 회계 조작이 있었다는 등의 이유로 코언은 3년 징역형을 받는다.
그렇다면 트럼프는?
수갑 차는 트럼프? 체포-구속되나?
미국 사법제도에서는 검사장도 소속정당이 있으며, 선거로 뽑히는 선출직이다. 트럼프 기소를 주도한 맨해튼지방검사장 앨빈 브래그는 민주당원이다. 트럼프는 이 점을 들어 그의 수사를 '정치적 마녀사냥'이라고 비난해 왔다. 하지만 검찰이 수집한 증거와 여러 증인들의 증언을 듣고 기소가 타당하다고 결론을 낸 건 중립적인 일반시민들로 구성된 대배심(Grand Jury)의 투표였다.
브래그 검사장 입장에서도 부담은 크다. 트럼프가 선거자금과 기업회계 양쪽으로 법을 위반했으니 형사적 중죄로 처벌해 달라는 것이 그의 기소내용으로 보이는데, 과연 유죄평결과 수년간의 징역형으로 결론이 날지, 혐의 일부가 인정되지 않고 가벼운 벌금형 정도로 끝날지는 두고 봐야 한다는 것이 미국 유력 언론들의 전망이다. 후자로 결론 난다면 트럼프는 더욱 기세등등하게 정치적 마녀사냥론을 주장할 거고, 브래그는 커리어에 큰 상처를 입게 된다.
트럼프 기소여부 결정은 꽤 시일이 걸릴 것 같더니, 한국시간 금요일 오전에 대배심 투표결과가 '기소'로 나왔다는 속보가 떴다. 트럼프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형사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전직대통령이 된다.
일반적 절차와 관행에 따르면, 검찰 측은 기소된 피고인의 변호사와 어느 날 몇 시에 맨해튼지방검찰청에 나올지를 협의하여 정한다. 트럼프는 플로리다 마러라고 리조트에 살고 있으므로, 자진출두한다면 아마도 전용제트기 편으로 뉴욕 인근 공항에 도착한 뒤 차량편으로 맨해튼지방검찰청에 오게 될 것이다. 첫 재판은 4월 4일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트럼프가 여당 정치권력과 그 하수인인 검찰에 당하는 '순교자' 이미지를 만들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트럼프가 자진출두를 거부하면 검찰은 플로리다 주 당국에 트럼프의 압송을 요청해야 한다. 일이 이렇게 흘러가면 트럼프가 원하는 '그림'이 만들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검찰청에 도착한 피의자는 화이트칼라 범죄자라 하더라도 혐의가 무거우면 수갑이 채워진다. 트럼프 관련 사건에서 이미 사법처리된 다른 관련인물들의 경우 맨해튼검찰청 도착과 함께 수갑이 채워졌고, 그 모습이 미디어에 공개됐다.
수갑이 채워지든 아니든, 트럼프 또한 지문채취와 머그샷 촬영 등의 절차를 거쳐 맨해튼 형사법원의 유치장에 들어갈 전망이다. (맨해튼지검 사무실 바로 옆이다.) 트럼프는 전직대통령의 예우를 받고 있으므로 이 과정에 경호원들이 따라붙고,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법원은 특별경호구역으로 관리될 것으로 예상된다.
첫 재판이 열리면 판사가 피고 트럼프에게 기소사실과 법적 혐의 내용을 알려주고, 피고 트럼프는 본인이 무죄를 다툴 것인지 아니면 혐의를 인정하는지 답변한다. 검사 측과 변호사 측은 향후 재판 절차와 일정 등을 협의한다. 트럼프는 일단 귀가가 허용될 것으로 보인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트럼프가 당일 플로리다 자택에서 저녁식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금까지 결백을 주장한 트럼프가 유죄를 순순히 정할 리 없고, 유무죄 판결이 나기까지 재판은 불구속 상태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엘리엇 히긴스가 AI에 시켜서 만든 그림은 트럼프가 유죄판결을 받아 오렌지복 죄수복을 입고 징역을 살다가 '쇼생크 탈출' 식으로 탈옥해 맥도널드 햄버거를 먹으며 눈물 흘리는 데까지 이어지지만, 이는 상상의 영역이다.
그렇다면, 트럼프의 대선 도전은 여전히 가능할까? 유죄판결을 받더라도 문제없다는 게 미국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BBC는 해설기사에서 "미국 법에는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대통령 선거에 나서거나 대통령으로 복무하는 -심지어 감옥에서 - 것을 막는 조항이 없다"고 전했다.
"죽음과 폭력이 따를 것"…트럼프의 협박
그간 트럼프는 소셜미디어 게시물로 지지자들을 자극해서 검찰에 정치적 압력과 물리적 협박을 가해 왔는데, 그 내용이 대단히 악성이다.
트럼프는 지난 3월 18일, 자신이 체포될 거라며 지지자들에게 항의 행동을 촉구했다. 트럼프가 말하는 건 그냥 피켓 들고 모이는 집회가 아니다. 2021년 1월 6일, 트럼프는 자기가 이긴 선거인데 대통령 자리를 뺏기게 생겼다며 지지자들에게 행동을 요구했고, 지지자들은 사상 초유의 의회난입 폭동을 일으켰다. 사람이 여럿 죽었다. 트럼프는 뉴욕에서 이런 사태를 일으켜 달라고 지지자들에게 신호를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체 어떤 인간이 한 인간-미국의 전 대통령이며, 사상 어느 대통령보다 많은 표를 얻었고 지금은 공화당의 대선후보 중 선두인 사람을,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의 혐의로 기소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거짓에 근거한 기소가 초래할 죽음과 파괴가 우리의 나라에 재앙적일 것임이 알려져 있는데? 왜? 누가 그런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미국을 진심으로 싫어하는 타락한 사이코패스만이 그런 짓을 할 것이다."
검사를 '타락한 사이코패스'라고 비난하는 글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트럼프는 이번엔 야구방망이를 든 자신과 앨빈 브래그 검사장을 나란히 배치한 사진을 올린다.
다수의 미국 언론은 이 사진이 전설적인 조폭 알 카포네를 그린 영화 <언터처블>의 유명한 장면을 연상시킨다고 풀이했다. 이 장면에서 알 카포네(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는 자신이 배신자로 판단한 사람의 머리통을 야구방망이로 수박 깨듯 부순다. (영상의 1분 40초쯤부터가 문제의 장면 / ▶ 해당 영상 보러 가기)
[ https://youtu.be/QHH9EYZHoVU ]
첫 군중유세 장소에 담긴 트럼프의 '깊은 뜻(?)'
트럼프가 첫 집회장소로 선택한 곳은 텍사스 주의 웨이코(Waco)라는 작은 타운이다. 이 타운 외곽의 산기슭에는 수십 년 전 '다윗파'라는 기독교 종말론 이단종파가 무리를 이루어 살고 있었다. 클린턴 대통령 임기 첫해인 1993년, 이 무리를 이끄는 교주 데이비드 코레시가 무기를 비축하고 마약복용과 미성년자 간음을 일삼는다는 제보가 접수되자 연방정부는 무장요원들을 투입해 교주 검거와 압수수색에 나선다.
하지만 다윗파 신도들은 모여 살던 건물을 요새화한 채 총을 쏘며 저항했고, 교전 과정에서 신도 6명과 연방요원 4명이 죽었다. 이후 연방정부는 건물을 봉쇄하고 다윗파의 항복을 유도하는데, 대치 상태가 너무 길어지자 51일 만에 강제진압에 나선다. 장갑차와 최루탄이 동원된 작전 중에 그만 불이 났고, 교주와 26명의 어린이를 포함해 70여 명의 신도 전원이 건물 안에서 목숨을 잃는 비극이 벌어졌다.
워낙 큰 사건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미국인들은 '웨이코, 텍사스'라는 지명만 들어도 그때 건물을 활활 태우던 불길을 떠올린다. 텍사스는 그렇잖아도 독립하겠다는 말이 종종 나올 정도로 반연방정서가 강한 곳인데, 이 사건 이후 웨이코는 반연방주의자들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 되었다. 트럼프는 이런 곳을, 그것도 마침 참극발생 30년이 되는 시점에, 자신의 2024 대선 출정식 장소로 선택한 것이다. 왜?
트럼프의 핵심 강성 지지층은 상당히 반체제적이고 반연방적인 속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들은 민주당이 장악한 연방정부가 자신들에게서 자유와 총기를 빼앗아가려는 '딥 스테이트'의 하수인이라고 여긴다.
이들은 공화당의 기존 엘리트 정치인들 또한 자기들 편이 아니며, 트럼프만이 자신들의 속마음을 대변해 준다고 생각한다. 오직 트럼프만이 저 사기꾼 같은 모리배들을 쓸어버리고 자신들의 자유와 권리를 되찾아줄 거라고 믿는다. 그러니 이들에게 트럼프의 거친 언행은 눈살 찌푸려지는 약점이 아니라, 썩은 세상을 뒤집을 수 있는 투사의 자질이며 좌파 리버럴들이 타락시킨 미국의 문화를 옛날로 되돌릴 무기가 된다.
트럼프는 3월 25일 유세에서, 현 연방정부 수사당국을 '방화범들'이라 지칭해 1993년 참극을 연상시키면서 지지자들을 자극했고, '지금은 저들의 공격 대상이 나지만 다음 차례는 당신들이니 맞서 싸우라' 는 기존의 메시지를 반복했다.
민주주의가 폭민정으로 타락해 가는 정치에서는 극단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실제 숫자에 비해 크게 반영된다. 공화당 지지성향의 미국 유권자 중에는 합리적이고 중도지향적인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그들은 공화당 내 파워게임에서 트럼프 강성지지자들의 악다구니를 견뎌내지 못한다. 각종 당내경선에서 트럼프 강성 지지자들은 판판이 승리했고, 지난해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트럼프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자질 미달의 인사들을 대거 후보로 내보내야 했다. 그 결과는 당연히 압승했어야 할 중간선거에서의 사실상 패배였다.
공화당은 트럼프를 2024 대선 후보로 선택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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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식 D콘텐츠 제작위원hyunsik@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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