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시대 나눔문화의 집단 퍼포먼스 유적 [배기동의 고고학 기행]

2023. 4. 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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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29> 고창 세계유산고인돌군
전북 고창 죽림리 고인돌공원에 자리한 고인돌. 바둑판 모양의 남방식 고인돌이다.

지석묘, 우리말로는 고인돌무덤, 한국 고대문명의 대표적 아이콘이다. 엄청나게 큰 돌을 작은 돌로 받쳐서 땅바닥 위 공중에 높게 만든 인류사 최초의 석조무덤 건축 구조물이다. 자연의 중력법칙에 반하여 인간의 의지를 표현하려 한 최초의 상징적 건조물이 아닐까?

우리나라에는 아직 곳곳에 남아 있지만, 그동안 그 숫자는 형편없이 줄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청동기시대 요녕식 동검과 함께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고인돌 문화권을 볼 수 있다. 오늘날 세 곳이 세계유산으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나라 최대의 고인돌 밀집 지역인 전북 고창의 죽림리와 도산리 일대의 고인돌공원이다. 450기 정도의 많은 숫자가 집중돼 있기도 하지만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이 한곳에 모여 있고 가장 무거운 돌을 고인 것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가장 대표적인 야외 고인돌박물관이다. 낮은 산자락에 이리저리 펼쳐져 있는 크고 작은 고인돌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욕망, 그리고 오늘날 복잡한 문명사회의 원형을 떠올리게 된다.


고창 고인돌 최대 밀집지, 풍요의 상징

위 사진은 고창 고인돌공원 일대 문화 유적지와 교통로. 아래 사진은 죽림리 쪽 산사면에 분포된 고인돌들의 모습. 뒤쪽에 세계자연유산 운곡습지로 넘어가는 고개가 보인다.

지난 겨울 폭설 후 잔설이 가시지 않은 산야를 보며 달린 서해안고속도로에서 ’고인돌휴게소‘ 간판이 눈에 띄자 운전 피로가 가시는 듯했다. 선사 유적을 지역 브랜드로 내세운 것이 고고학 전공자로서 반가웠기 때문이리라. 읍내의 큰길을 자동차로 지나면서 소나무 푸른 잎으로 수놓은 하늘을 쳐다보는 맛이 신선하다. 고인돌공원으로 들어가는 길의 남쪽으로 보이는 낮은 구릉이 바로 최근 보물로 지정된 화려한 금동신발이 발굴된 봉덕리 마한 고분 자리다. 백제 때의 ’모량부리(毛良夫里)‘ 지명에도 ‘부리’라는 큰 마을의 의미가 들어 있어 고대에 상당한 정치 세력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물론 이 지역의 고인돌은 기원전 5세기 전후로 추정하고 있어, 이곳의 마한 고분보다도 약 1,000년 가까이 앞서는 청동기시대 유적인데, 엄청나게 밀집된 고인돌 공동묘지가 이 지역이 오래전부터 상당히 풍요로운 동리였음을 짐작케 한다.

고창 고인돌박물관 입구에 서 있는 남방식 고인돌. 무게가 60톤에 이른다.

박물관 입구에는 광화문 해태를 상상하게 하는 엄청나게 큰 고인돌이 조그만 나막신 같은 굄돌을 디디고 방문객을 맞이한다. 박물관 건물도 그 모습을 닮은 것 같으니 고창 고인돌의 상징인가 보다. 멀리 낮은 구릉지들이 있지만 넓은 벌판의 중앙에 서 있는 박물관 건물이 겨울 풍경 속에 휑하게 보인다. 아마도 10월 열리는 고인돌 축제 때는 시장 풍경을 방불케 하리라.


최대의 남방식 고인돌 군집지

공원 내의 남방식 고인돌들. 상판이 두껍고 다리가 짧은 바둑판 모양으로 관은 땅에 묻힌 형태다. 배기동·군산대박물관 제공

도산리와 죽림리 사이 골짜기의 중심에는 고창천이 흐르고 넓은 들이 비단처럼 펼쳐져 있다. 죽림리 뒷산 고성봉의 동향 사면에는 엄청나게 많은, 크고 작은 그리고 다종다양한 고인돌이 집중 분포되어 있다. 납작한 돌을 고인 것도 있지만 사람 키 높이만 한 네모진 돌을 짧은 다리 달린 바둑판처럼 고인 것들도 있다. 매장부가 지하에 있는 남방식 고인돌이 압도적이다.

고인돌공원으로 정비되기 전의 죽림리 마을 모습(위)과 고창 박물관에 전시된 정비 이전의 도산리 군장고인돌 풍경. 군산대박물관·배기동 제공

지금은 잔디나 낮은 풀을 심어서 고인돌들이 다도해의 섬들처럼 듬성듬성 서 있는 것같이 보인다. 그렇지만 공원으로 정비하기 전엔 사이사이에 집들이 있었다. 이제는 박물관 앞쪽에 새 집을 지어 이주하여 공원 내에는 당시 이장 집 한 채만 남아 있지만 옛모습을 상상한다면 고인돌 밀집지, 즉 고대의 공동묘지 속에 사람이 살았던 셈이다. 박물관에 전시된 사진 ’장독대 속의 고인돌’에서 보듯 마을 뒷산의 소나무들 사이나 산자락 아래 올망졸망 초가지붕 사이로 시커먼 고인돌들이 터줏대감처럼 서 있던 그 풍경이었지 싶다. 요즈음 우리 도시와는 달리 생과 사가 같은 공간에 조화롭게 존재했던 것이다.


고인돌공원의 블랙스완? 북방식 고인돌

고창 고인돌의 대표 격으로 흔히 내세우는 것이 전설에 따라 ‘군장(君長·부족장)고인돌’이라는 애칭이 붙은 도산의 북방식 고인돌이다. 박물관에서 동쪽으로 보이는 작은 구릉이 도산이다. 구릉의 정상부 대나무 숲이 둘러싼 중심에 석관의 매장부가 지상에 위치한 탁자 모양의 북방식 고인돌이 우뚝 서 있다. 아이 키 정도 크기의 큰 두 개 판석 위에 넓적한 판석이 올려져 있는데, ’거인의 식탁‘ 같은 느낌이다. 이렇게 세 개의 판석으로 만든 단순한 건축 구조물이 ’어떻게 수천 년 동안이나 무너지지 않았을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물론 그게 숨겨진 기술일 것이다. 무너질까 봐 바로 앞에 동작 감지기를 설치해 모니터링하고 있는 현대인들이 조금은 극성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고창 고인돌의 대표 격인 도산리의 고인돌. 상판이 얇고 다리가 긴 탁자 모양의 북방식 고인돌이다. '군장고인돌'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앞에 진동을 감지하는 기계가 설치돼 있다.

북방식 분포의 남방한계선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 지역으로부터 거의 천 리 가까이나 남쪽으로 떨어진 이곳에, 즉 남방식이 압도적인 고창의 우뚝 선 구릉 꼭대기에서 북방식 고인돌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고대사의 또 다른 수수께끼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청동기시대 사회에서의 종족 구성의 복합상을 말하는 것이리라.


고인돌을 어떻게 건설하였을까?

고창 고인돌박물관에 전시된 남방식 고인돌의 축조 방법(위)과 축조 과정을 실제 크기로 복원한 디오라마(아래).

고창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인돌이 있는데 그 무게가 60톤이 넘는다고 한다. 고대에 무슨 기술로 이 돌을 움직이고 또 굄돌 위에 올려놓았던 것일까? 흔한 질문이지만 아직도 명쾌하게 답하긴 어렵다. 고고학은 오늘날 사람들 눈에는 ’쓸데없는 짓거리‘로도 보이는 고대인의 행위에서 이유와 과정을 찾는 학문이다. 고인돌을 만드는 데는 채석기술, 운반기술 그리고 거중(擧重·무거운 것을 들어 올림) 기술 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먹거리 장만도 힘겨웠을 고대에 왜 이런 거대한 공사를 했을까? 역사가 토인비가 말했듯 문명은 자연에 대한 도전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고인돌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그 고생을?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는 고인돌 또는 거석문화는 고고학자들의 아주 흥미로운 주제 중 하나다.

죽림리의 북방식 고인돌. 굄돌의 위쪽 접촉면을 얹힌 개석 표면에 맞게 조정한 것으로 보인다.

큼직한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암반 노두에서 채취할 경우 다이너마이트나 다른 중장비가 없던 시절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운반기술 역시 무게나 거리에 따라 난이도가 급증했을 것이다. 다행히 이곳 고창의 고인돌공원에는 바로 옆에 채석장이 붙어 있어서 고대인의 고생이 덜했을 것 같다. 건조기술에서는 가장 심각한 질문이 ’어떻게 수십 톤씩 하는 돌을 굄돌 위에, 즉 공중으로 들어 올려놓을 수 있었을까?‘이다. 공원의 북쪽 구릉에 남아 있는 북방식 고인돌은 덮개돌과 넙적굄돌과의 요철이 딱 맞아서 살짝 내려앉은 듯하다. 다만 어려운 건조 과정에 비해 부장품은 별로 남아 있지 않아 장례 과정은 아직도 풀어내야 할 고고학적 수수께끼이다.


고인돌 사회의 모습은?

공원 내에서도 고인돌마다 구조 만큼이나 크기도 다양하다. 뚜껑돌의 크기가 작은 방(房)만 한 것부터 쌀뒤주만 한 것들까지 있다. 크기와 관계없이 고인돌의 주인은 분명 사회의 엘리트 집단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누가 더 큰 고인돌을 만들었을까?’ 하는 질문을 떠올리면 ’평화스러운 불평등 사회‘의 원초적인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고인돌 역시 구성원이 다양해지고 규모가 커지는 사회를 안정화하기 위한 인간 지혜의 산물일 것이다.

고창 고인돌박물관에 전시된 고인돌시대의 유물들. 요녕식 동검 복제품(윗줄 왼쪽)과 마제석검 복원품(윗줄 오른쪽) 및 토기 복원품(아랫줄).

한반도에서는 벼농사가 도입돼 부의 축적이 시작되는 시기가 바로 고인돌시대이다. 흔히 고고학자들은 고인돌의 크기가 죽은 자가 가졌던 부·세력과 비례한다고 말한다. 크고 작은 수많은 고인돌을 건설하면서 한국 고대사회의 정치력이 성장했고 삼한 사회로 발전하는 기틀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고인돌은 한국형 청동기와 더불어 한국 고대문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공중에 뜬 거석이 던지는 나눔의 지혜

고인돌을 보며 우리가 감동하는 것은 뚜껑돌이 땅 위가 아닌 공중에 떠 있는 구조다. 뚜껑돌이 공중으로 부양한 것은 죽은 자, 즉 지도자의 힘과 공동체의 가치를 보여주기 위한 고대인의 퍼포먼스가 아닐까? 어려운 건조 과정 중에 부유한 지도층이 참여한 구성원들에게 재물을 나눠주는 의례적 행위가 있었을 거란 생각은 엉뚱한 것일까. 인류학에서 말하는 뉴기니 섬의 ’돼지 축제‘ 같은 기능 말이다. 전통사회에서는 축제와 장례가 공동체 나눔의 기회라는 점이 흔히 발견된다. 나눔의 문화가 아니었으면 연약한 인간은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인돌의 육중한 모습, 그리고 그 건조 과정에서 사회를 움직이고 지탱하는 감추어진 지혜를 본다.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인간사회 진화의 원초적인 원리다. 고인돌공원에서 또 한 차례 깨우치는 인간사회의 오묘함이다.

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한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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