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재혼한 지 얼마 안 된 새 부인과 이별을 결심한 이 남자의 발언 때문이었습니다. 첫 아내와 이혼할 때만 해도 “새로운 사람과 진실한 사랑에 빠졌다”면서 유난을 떨던 그였지요.
조강지처가 울면서 “당신과 이혼할 수 없다”고 외쳤지만, 그는 어느 때보다 단호했었습니다. 공식적인 모임에서도 새 연인을 대동하면서 이렇게 소개했지요. “제가 사랑하는 여인이고, 우리는 곧 결혼할 겁니다.”
영원한 건 없다지만, 그의 사랑은 정말이지 짧디짧았습니다. 새 연인 과도 마찬가지였지요. 활활 타오르던 열정이 촛대의 미약한 촛불마냥 위태로웠습니다. 새 부인의 호탕한 성격도 이제는 우악스럽게만 느껴진다며 경멸의 눈길을 보냅니다. 화사한 미소, 윤이 흐르던 검은 머릿결, 짙은 눈동자의 하얗고 긴 목도 이젠 지겨움과 증오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남자는 결국 새 부인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 사람과 다시 결혼했지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그가 올린 결혼식만 총 6번. 수시로 아내를 갈아치운 문제적 남자의 이름, 잉글랜드의 왕 ‘헨리8세’입니다.
부인을 여섯번이나 갈아치운 그는 유럽을 떠들썩하게 만든 인물이었습니다. ‘색욕’에 미친 인물처럼 보이지만, 보이는 것만큼 단순하진 않았습니다. 그의 속사정을 들어봅니다.
형수와 결혼한 헨리8세
“그대를 사랑합니다. 형의 부인이었다 하더라도요.”
헨리8세와 첫 부인 캐서린과의 러브스토리로 들어가 봅니다. 그는 애초 왕이 될 운명은 아니었습니다. 손위로 왕세자인 형 아서가 있었거든요. 헨리7세의 맏아들 아서는 당대 최강국으로 부상하던 스페인의 공주 캐서린과 결혼합니다. 프랑스와 맞수 관계였던 잉글랜드는 스페인과의 혼례를 통해 유럽에서 입지를 구축하려 했었지요.
문제는 아서의 병약함이었습니다. 1502년 그는 결혼 5개월만에 숨을 거둡니다. 젊은 캐서린은 졸지에 과부가 될 신세였지요. 더불어 잉글랜드는 스페인이라는 강대한 동맹국을 잃을 위기에 처합니다. 아직 입금이 덜 된 거액의 지참금은 또 어쩌고요. 잉글랜드 왕 헨리7세가 캐서린을 놓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였습니다.
영악한 헨리7세는 슬며시 다른 카드를 밀어 넣었지요. “두 사람이 결혼은 했지만 잠자리는 안한 거 같은데... 저희 차남 헨리는 어떤가요.” (원래 헨리7세 본인이 캐서린과 결혼할까도 고민했지만 포기한 뒤였습니다.)
스페인 왕가로서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습니다. 딸을 과부로 남길 바에야 차기 영국 왕비로 만드는 게 여러모로 남는 장사였지요. 1503년 6월 헨리와 캐서린의 약혼식이 거행되고 1509년에는 결혼식까지 올렸지요. 캐서린의 나이 23살, 헨리8세 18살이었습니다.
삐걱댄 시작이었지만, 사랑은 나름 순항합니다. 캐서린은 지성이 있었고, 미인이었지요. 헨리는 그녀를 신뢰했습니다. 군사 작전을 펼치기 위해 외국을 나갈 때면 캐서린에게 섭정을 맡겼을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언제나 살뜰히 나라 살림을 살폈지요. 총명한 딸 매리도 낳았습니다. 꼭 필요한 아들을 보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상관 없는 듯 보였습니다.
요부 앤 블린의 등장, 흔들리는 헨리8세의 마음
결혼한 지 16년 무렵인 1525년이었습니다. 왕비와 접견을 한 헨리8세의 눈에 한 여성이 들어옵니다. “저 여인은 누구인고.” “캐서린 왕비 폐하의 시녀 앤 블린입니다.” 과거 헨리8세가 잠자리를 같이하던 매리 블린의 동생이라고 옆에 신하가 귀띔합니다. “오호, 매리의 동생이 이렇게 매력적인 여성이었다니.”
헨리8세는 앤에게서 특별함을 느꼈습니다. 젊음의 생기와 프랑스 궁정에서 배워온 교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수히 많은 정부에게서 못 느꼈던 매력을 그녀에게서 발견했지요.
앤 블린이 헨리를 유혹하면서도 정작 잠자리까지 허용하지 않은 ‘밀당’과 당당함도 통했습니다. “저는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자가 아닙니다, 전하.” 몸이 달아오른 헨리8세가 결국 앤 블린과의 결혼을 결심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장애물이 있을 때 더욱 불타오르는 법이지요.
왕의 이혼이 잉글랜드 역사를 바꿨다
헨리8세는 캐서린과 이혼(엄밀히 말해서 혼인무효)을 고민합니다. 하지만 캐서린의 집안 배경이 문제였습니다. 그녀는 스페인의 왕족이었지요. 이혼은 곧 스페인을 적으로 만든는 셈이었습니다. 결국 믿을 건 교황의 허락뿐. 헨리8세는 오늘날 재벌가의 이혼소송처럼 혼인 무효를 위한 성경적 이론을 탄탄히 준비해갔지요.
“교황 성하, 저희 혼인을 무효로 해주십시오”
답을 찾기 위해 성경을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적당한 구절을 발견하지요. 구약성서의 레위기의 한 대목이었습니다.
“형제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불결한 짓이다. 이는 형제의 부끄러운 곳을 번 긴 것이니, 그들은 자손을 보지 못하리라.”
그가 딱 필요로 하던 ‘신의 말씀’이었습니다. 캐서린은 20년 동안 헨리8세의 건실한 배우자로 살아왔지만, 또 다른 이와 사랑에 빠진 헨리8세의 눈에는 이제 그녀는 형 아서의 부인일 뿐이었습니다. (형수랑 잠자리 해 온 건 괜찮고?)
하지만 당시 유럽은 가톨릭이 지배했습니다. 교황청은 ‘이혼’을 원칙 상 허용하지 않았지요. 대신 부부가 친척간이라 근친상간에 해당하면 ‘혼인무효’를 선언해준 경우가 왕왕 있었습니다. (힘 있는 왕족들이 자주 이용한 수법이었지요.)
헨리8세는 성경 구절을 내밀며 캐서린이 형 아서의 부인이라 주장하지요. 또 그가 평소 ‘신앙의 수호자’를 자처하면서 종교개혁에 맞서 가톨릭 편을 든 전력도 내세웠습니다. “내가 이렇게 가톨릭을 위해 싸웠으니, 제발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로 해달라”는 것이었지요.
가톨릭은 고민합니다. 영국 편을 들어주자니, 찝찝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최강대국 스페인이 캐서린의 고향이었기 때문이지요. 잉글랜드도 필요한 동맹국이었지만, 아직 국력이 스페인에 따라오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교황청은 헨리8세 이혼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잉글랜드의 종교개혁,500년 전 브렉시트
“이제 가톨릭을 버리고 우리의 길을 간다.”
헨리8세는 대단한 야심가였습니다. 자신의 앞길을 막는 자였다면 그게 교황이라도 용서하지 않았지요. “영국은 이제 우리만의 종교를 믿겠다”고 외칩니다. 유럽 대륙과는 다른 자신들만의 길을 가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500년 전의 브렉시트라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영국 성공회(Anglican Church)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를 극렬히 반대하던 이들은 대규모 사형을 당했다지요. ‘유토피아’로 유명한 당대의 사상가 토머스 모어가 왕의 재혼도, 성공회를 국교화하는 것도 반대하지요. 그는 의연히 죽음을 맞았습니다. 모어는 사형집행장에서도 점잖게 수염을 빼며 말합니다. “내 수염은 반역죄를 짓지 않았네. 그러니 조심해서 자르게.” 가톨릭은 순교한 그를 시성합니다.
사랑에 미친 남자, 그에게도 사정은 있다.
일반인의 시선으로는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 많습니다. 앤 블린을 사랑했다고 하더라도, 국가 전체 종교까지 바꿔 버리는 행동을 감행하다니요. 그것도 최강대국 스페인을 적으로 돌리면서까지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왕권의 ‘약한 기반’이 문제였습니다. 잠시 시계를 과거로 돌려보겠습니다. 아버지 헨리7세는 장미전쟁에서 요크왕조였던 리처드3세와의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그리고 튜더 왕조를 새로 세우죠. 헨리8세 즉위 겨우 24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최종 승리자는 튜더 가문이었지만 반역의 잔불은 쉬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진짜 영국의 왕위 계승자”라고 선언하는 이들이 많았지요. 라이벌 주변국들 역시 튜더 왕조의 허술한 권력 기반을 노렸습니다. 여기에 왕위 계승자인 ‘아들’까지 없다니요. 결코 있어선 안 될 일이었습니다.
잉글랜드 역사에서도 여성이 왕위에 오르고자 했을 때 끔찍한 내전이 벌어졌었지요.(마틸다-스티븐 내전 1138-1153년). 여자가 왕좌에 앉으면 찬탈자가 나타난다는 게 그들의 공통 기억이었습니다. 그가 신실하게 믿던 가톨릭을 버려가면서까지 이혼을 선택한 배경입니다.
앤 블린과의 이별은 더 큰 비극으로 다가옵니다. 앤 블린이 여러차례 사산한 끝에 또 딸 하나만 낳게 되자 헨리8세가 결별을 선택했던 것이지요. (앤 블린이 아들을 사산한 날은 캐서린의 장례식 날이었습니다. 신의 분노였을까요.) 꼬투리 잡을 것이 없었기에 자신의 신하 여러 명과 불륜을 저질렀다는 혐의로 사형에 처합니다.
헨리8세는 의연히 제인 시모어와 결혼하지요. 앤 블린의 시녀였습니다. 그토록 바라는 아들을 낳았지만, 시모어는 금방 사망합니다. 그리고 세 번의 결혼을 더 했지요. 부인들은 이혼당하거나, 사형당하거나, 병사하거나였습니다. 마지막 부인 캐서린 파만 살아남을 수 있었지요. 21살의 나이 차가 났던 탓에 헨리8세가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종교갈등 소용돌이에 빠진 잉글랜드
헨리8세는 잉글랜드의 역사를 송두리째 흔들었습니다. 성공회가 국교로 제정됐지만, 시민들의 삶 구석구석에 스며든 가톨릭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분열은 국가의 분열을, 그리고 시민의 갈등을 의미했지요.
아들 에드워드6세가 즉위합니다. 그러나 그 역시 병약한 왕으로 일찍 승하하지요. 뒤를 이은 건 첫 부인 캐서린의 딸 매리였습니다. 그녀에게 영국 성공회는 자신의 어머니를 폐위로 이끈 더러운 종교나 다름없었습니다.
매리1세는 자신이 즉위하자마자 성공회를 탄압하고, 가톨릭을 앞세웠지요. 이에 저항하는 자들에겐 피를 맛보게 했습니다. 그녀의 별명이 ‘블러디 매리’(Bloody Mary·피의 매리)가 된 배경이지요.
‘권불십년’이라 했던가요. 앤 블린의 딸 엘리자베스1세가 매리1세의 뒤를 잇습니다. 그녀는 성공회가 영국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잉글랜드 여왕들 모두가 ‘엄마사랑’을 몸소 실천한 것이었지요. 나라 전체가 왕의 정체성에 따라 혼란을 겪어야만 했던 셈입니다.
찰스1세가 시민혁명에 의해 목이 잘린 배경에도 그의 아내가 신실한 가톨릭 신자라는 배경이 자리합니다. (물론 또 다른 다양한 정치적 맥락도 있습니다.) 헨리8세의 선택이 나라 전체를 끝없이 흔든 셈이지요.
서울에서 느낄 수 있는 헨리8세의 향기
오늘 날까지 헨리8세는 수많은 이야기꾼의 영감이 됩니다. 군주의 뜨거운 사랑은 어디서나 주목받기 마련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의 헨리8세로 불리는 숙종 역시 인현왕후와 장희빈과 삼각관계가 여전히 미디어에 재생산 되고 있지요.
우리는 재밌게 그들의 이야기를 소비하지만 당시 시민들은 왕족들 욕망이 불러온 나비효과로 거친 풍파를 견뎌내야 했을 겁니다. 가까이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인 것은 인생이나 역사나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따뜻한 봄날입니다. 서울시청을 걷다 보면,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이 눈에 확 들어오지요. 대한민국에서는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건물입니다. 봄 내음으로 가득한 성당 주변으로 온화한 기운이 감돕니다.
한반도에까지 둥지를 튼 저 아름다운 성당을 보며 생각합니다. 이 성당의 시작은 한 사내의 여성을 향한 욕망이었을까요. 왕조를 지키기 위한 왕의 처절한 몸부림이었을까요.
<네줄요약>
ㅇ헨리8세는 첫 부인과 이혼하고자 했으나 교황청이 허락하지 않자 잉글랜드의 국교까지 바꿨다. 성공회의 시작이었다.
ㅇ두 번째 부인 앤 블린과 사랑이 식자 불륜을 명목으로 사형에 처했다. 그의 공식 결혼횟수는 6번이었다.
ㅇ학자들은 헨리8세의 잦은 결혼이 왕세자를 낳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작업이었다고 분석한다.
ㅇ잉글랜드는 성공회 창교 이후 극심한 종교갈등을 겪었다. 호색 혹은 왕권유지를 위한 욕망이 부른 나비효과였다.
<참고문헌>
ㅇG.J.마이어, 튜더스, 말글빛냄, 2011년
ㅇ앨리슨 위어, 헨리8세와 여인들, 루비박스, 2007년
ㅇ박지향, 클래식 영국사, 김영사,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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