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를 위한 고전, 문학 읽기의 새 길을 열다
편집자주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꺼내 보는 '다시 본다, 고전'이 두 번째 시즌을 엽니다. 20년 이상 출판 편집 기획자 생활을 거쳐온 강창래 작가와 한국상담대학원 대학교 교수이기도 한 진은영 시인이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마다 글을 씁니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여성 문학에 대한 기념비적인 저서이다. 주로 여성 고딕 작품을 다룬다. 여성 고딕이라는 용어는 1976년에 처음 등장했다. 엘런 무어가 18세기 여성 작가들의 고딕 소설들을 분석하고 평가하면서 만든 것이다. 굳이 ‘여성’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남성 작가에게서 시작된 고딕 소설과 구별하기 위해서다.
고딕 소설은 대개 중세 수도원이나 오래된 성을 배경으로 한 괴기 공포물이다. 그 시작은 1764년에 출간된 호레이스 월폴의 '오트란토의 성'이다. 그러나 고딕 소설을 부흥시킨 진짜 스타는 여성 작가인 클라라 리브와 앤 래드클리프였다. 우리가 이들에 대해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제인 오스틴의 어법으로 말하면 ‘매우 불평등하게도 교육과 펜이 남자들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소설에서 고딕적인 요소는 그다지 새로운 것도 아니고 그 이후에 사라진 것도 아니다. 고대 그리스의 신화나 서사시, 비극을 떠올려 보라. 거의 어디에나 으스스한 배경에서 공포를 조장하는 캐릭터가 등장해 사건을 일으키고 전개되며 마무리된다.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요소는 현대 작가인 마거릿 애트우드의 작품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신탁 받은 여자'에는 여성 고딕 소설을 쓰는 작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거기에는 몽환상태에서 거울의 반대편으로 들어가 '제인 에어'의 마지막 부분을 고쳐 쓰는 장면이 나온다. 여성 문학의 특성이 끝없이 이어지리라는 의미일 것이다.
근대 이전의 작품으로 고딕 소설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을 꼽는다면 셰익스피어의 '햄릿' '맥베스' '리어왕' '로미오와 줄리엣' '리처드 3세' 정도일 것이다. 이 작품들 역시 매우 고딕적이다. 중세 성을 배경으로 유령과 마녀가 등장하고 마법이 사용된다. 오래된 거대 건축물이 배경으로 설정되는 이유는 공상과학소설이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그 건물로 들어서는 과정이 현실과 분리되는 것이고, 거기에서 전개되는 사건의 결말은 비밀스러운 과거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 인과성은 현재와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장치들은 소원성취 모델을 구성해 내는 데 적절한 도구가 된다.
그런 식의 배경 설정과 이야기 전개 방식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나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에서 거의 그대로 사용된다. 이런 소설을 읽을 때는 먼저 배경이나 주요 캐릭터의 이름에 담긴 은유적인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폭풍의 언덕'은 독자의 분신인 록우드가 워더링 하이츠라는 그로테스크한 공간으로 들어가서 보고 들은 이야기이다.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 집안의 오랜 하녀로 주인의 입장을 대변한다. 그 이야기를 외부 인물인 록우드를 통해 전달하는 것이다. 주관성의 편협함을 완충시키는 객관성을 통해 설득력을 높이고 싶을 때 자주 사용하는 장치이다.
록우드는 ‘새로운’ 세입자이다. 그가 빌린 저택의 이름은 스러시크로스인데 ‘티티새가 지나다니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그는 임대받은 저택의 주인이 살고 있는 워더링 하이츠를 방문하면서 사건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워더링은 그 지방 사투리로 폭풍우가 불면 어지럽게 요동치는 난기류에 휩싸이는 언덕의 모습을 표현한 말이다. 록우드는 거기에서 악마처럼 괴팍한 성격의 히스클리프를 만난다. 두 번째 방문한 날 그는 심한 눈보라 때문에 워더링 하이츠에 갇히고, 누구도 출입하지 않던 방에서 하룻밤 묵게 된다. 거기에서 ‘비밀스러운 기록’을 접하고 악몽에 시달리면서 유령을 본다. 자기도 모르게 끔찍한 짓을 저지르다가 결국 미친 사람처럼 비명을 내지른다. 이후에 전개될 괴기스러운 사건 전개에 대한 예고편 같다.
다음 날 그는 스러시크로스로 돌아와 그 집안의 오랜 하녀로부터 과거 이야기를 듣는다. 거기에는 남녀 주인공이 등장하지만 남자 주인공은 실존 인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암시가 포함되어 있다. 여주인공인 캐서린 언쇼는 당시에 실제로 사용되던 성과 이름이다. 그러나 그녀가 사랑했던 히스클리프에게는 성(family name)이 없다. 이름도 이상하다. 황야(히스)의 절벽(클리프)이라니! 그는 길거리 어디에선가 주워 온 아이였다.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빼앗고야 마는 악마 같은 존재로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되지만 결국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히스클리프는 죽음에 임박했다는 것을 알고 캐서린의 무덤을 파고 관을 열어 둔 다음 묻는다. 그리고 자기가 죽으면 같은 방식으로 그 옆에 묻어 달라고 부탁한다. 소설의 앞부분에서 캐서린은 히스클리프가 자기보다 더 자기 같다고 말한 적이 있고, 히스클리프 역시 죽기 전에 비슷한 말을 한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의 분신이 아닌가? 히스클리프에게 빼앗겼던 모든 유산은 그의 죽음과 함께 다시 정당한 상속자인 언쇼와 린튼에게 돌아간다. 그들의 이름은 부활한 듯한 캐서린과 상속자(heir)라는 단어와 발음이 비슷한 헤어턴이다. 이렇게 해석하며 읽으니 마지막 책장을 덮는데 소름이 돋았다.
에밀리 브론테는 당대의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새로운 신화를 쓰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버지가 죽기 전에, 진작 이렇게 착한 아이가 될 수 없었냐고 물었을 때 캐서린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웃으며 대답한다. 아버지는 진작 좋은 어른이 될 수 없었나요? 아버지가 화를 내자 캐서린은 노래를 불렀고 그 노래를 들으며 아버지는 죽는다.
이 작품의 문학적 성과도 놀랍다. 당대의 가정 폭력을 포함한 정신적·육체적 잔인함에 대한 고발과 함께 도덕성과 종교적·사회적 가치에 대한 저항을 정교하고 세련된 시적 언어에 담아냈다. 배경과 등장인물에 대한 은유적이고 시적인 네이밍에서부터 자연과 사건에 대한 표현이 경이로울 정도다.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뛰어난 여성 고딕에 대한 평가처럼 당대에는 찬사와 비판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뒤섞였지만 현대로 오면서 찬사 일색으로 변한다. 2015년 BBC 컬처에 보고된 기사를 보면 영국 외부의 출판평론가들이 뽑은 위대한 영국소설 100권 가운데 7위였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1979년 초판이 출간되었을 때 이 책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최초라는 ‘역사적 위치’의 행운을 누렸던 것 같다. 당시에는 페미니즘 비평이 존재하지 않았고 학계에는 페미니스트 선구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재판은 2000년에 출간되었고 20년이 지난 2020년에 예일대학출판부에서 다시 출간되었다. 재판이 출간된 2000년까지도 이 책에 대한 평가는 그저 ‘페미니즘 비평의 기념비적 연구서’였다. 2020년 이후에는 완전히 달라진다. 페미니스트를 위한 ‘고전’으로 올라섰을 뿐 아니라 걸작이라는 찬사와 함께 세상을 보는 눈을 달라지게 만드는 위대한 필독서로 꼽힌다.
예민한 독자들은 이 글이 마무리되기 위해서 해명해야 할 문제가 하나 남아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왜 '폭풍의 언덕'만 길게 소개한 것일까?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여성 작가들은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 메리 셸리, 조지 엘리엇, 해리엇 비처 스토, 에밀리 디킨슨까지 적어도 일곱 이상이다. 그 외에도 최초의 여성 전업 작가에서부터 현대 여성 작가들까지 많은 작품이 언급된다. 필자는 그들의 작품을 거의 모두 읽었고 저자가 보여주는 새로운 관점을 이해하면서 여성 문학을 읽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다. 재미없던 작품들이 무척 감동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그 가운데 최고의 작품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폭풍의 언덕'이다. 이 글을 통해 보인 필자의 해석 방식은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전형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물론 거칠게 단순화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암시하고 은유하면서 생략한 부분과 미처 챙기지 못해 빠뜨린 내용은 독자들의 몫이다. 그 과정을 거치면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애증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와 이미 그런 관계를 맺고 있다. 아마 수십 번은 더 읽을 것이다.
강창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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