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러버’ 北 김정일이 싹쓸이했다는데...그 와인의 정체는 [전형민의 와인프릭]
오늘은 4월1일 만우절(萬愚節) 입니다. 만우절은 주변 사람들에게 가벼운 장난이나 농담으로 웃음을 주는 날이죠. 한자로 된 탓에 아시아권 혹은 우리나라의 풍습으로 알고 있는 분들도 있지만, 알고보면 서양에서 넘어온 풍습입니다. 영어권에서는 에이프릴 풀스 데이(April Fool’s Day)라고 불립니다.
만우절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만, 중세 유럽에서 유래됐다는 게 일반적입니다. 오늘은 만우절을 맞아 그 기원과 만우절에 얽힌 와인 이야기들을 모아봤습니다.
인류는 기원전 45년 고대 로마의 정치인인 율리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을 딴 율리우스력을 1600년 가까이 사용하고, 1582년 교황이던 그레고리오13세의 이름을 따 만든 역법(그레고리력)을 현재까지 500년 가까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만큼 날짜와 시간을 세는 역법은 인류에게 중요하고 함부로 바꾸기 힘든 것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꿨을까요? 복잡한 수학 계산을 제외하고 간단히 얘기하면, 그레고리력이 율리우스력보다 조금 더 실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정 당시에는 완벽했겠지만, 1600년이 지나는 동안 날짜가 조금씩 밀려서 제대로 된 날짜를 표시할 수 없었거든요.
결국 1582년에는 매년 3월21일이어야 할 춘분이 3월11일까지 당겨졌죠. 교황은 심각성을 깨닫고, 10월4일 목요일에 ‘뒤쳐진 열흘을 삭제하라’는 긴급명령을 내립니다. 이에 따라 다음날은 10월5일 금요일이 아닌 10월15일 금요일에 돼버리죠.
당시에는 매년 춘분을 지나 4월 1일을 새해를 기념하는 날로 보냈는데, 그레고리력이 적용되면서 새해를 기념하는 날이 1월 1일로 바뀌게 됐기 때문인데요. 일부 사람들은 평생을, 아니 조상들로부터 1600년 간 전해져 내려온 새해 기념일을 하루아침에 추운 겨울 한가운데(1월1일)로 당긴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았죠. 그래서 그레고리력이 적용된 후에도 그대로 4월 1일을 새해 기념일로 여기고 챙겼습니다.
바로 여기서 만우절이 탄생합니다. 앞에서 말했듯 그레고리력이 좀 더 실용적인 역법인데요. 유럽인들은 실용이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죠. 하나 둘 그레고리력을 따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대부분 그레고리력을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끝까지 꿋꿋이 고집스럽게 4월 1일을 새해 기념일로 지내는 이들이 있었고, 이들을 놀리는 날에서 비롯된 게 바로 만우절입니다.
디캔터는 2010년 4월 1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프랑스 보르도 지역의 샤또 라뚜르에서 나오는 세컨드 와인인 ‘레 포르 드 라뚜르(Chateau Latour Les Forts de Latour)’를 전부를 구매했다”고 보도합니다. 연례 보르도 와인 선물 거래 행사인 ‘엉프리메르 보르도 2009(En Primeurs Bourdeaux 2009)’에 북한 당국자를 직접 파견해 와인 맛을 본 뒤 전량을 주문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참고로 샤또 라뚜르는 보르도 5대 샤또 중 한 곳으로 병당 가격이 100만원을 호가합니다. 프랑스 와인 중의 왕이라고 할 정도로 강건하고 파워풀한 뉘앙스를 뿜어내는 와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지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찬장에 내놓은 와인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기사에서 거론된 건 이 녀석의 세컨드 와인인데, 이조차도 30만원 이상되는 고급 와인입니다.
디캔터의 기사가 송출되자마자 전세계의 와인러버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꽤 까다로운 입맛을 자랑하는 미식가이자 와인러버로 알려진 김정일 위원장이 안그래도 좋아하는데, 전량을 사들였다니… 누구라도 궁금할 법하죠.
결국 문의가 빗발치자 디캔터는 하루 뒤 새로운 기사를 내놓습니다. 제목은 ‘라투르와 북한: 만우절’, 해당 내용이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정정하는 기사였죠. 전세계 와인러버를 상대로 한 만우절 장난이었던 셈입니다.
홍보한 와인은 로제 샴페인으로 이름은 ‘챔프 챔프(Champ Champ)’였습니다. 영상에는 맥그리거가 직접 등장해서 제법 멋있게 와인잔에 담긴 와인을 스월링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어서 포도를 쥐어짜는 모습, 롤스로이스에 앉아서 로제 와인이 담긴 병을 들이미는 모습 등 누가봐도 전형적인 와인 광고를 보여줬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기사까지 인터넷에 떴는데요. 기사에서 맥그리거는 “저는 더운 여름날은 로제 와인 한 잔을 즐긴다”며 “로버트 파커(현존하는 가장 유명한 와인 평론가)가 내 와인을 100점으로 평가할 것을 믿는다”는 인터뷰도 담았습니다. *관련기사
앞에서 말했듯, 코너 맥그리거는 종합격투기 역사상 최고의 인기를 가진 선수라, 이 장난이 세계적인 히트를 칩니다. 전세계에서 챔프챔프(영상 속에서 맥그리거는 오글거리는 발음으로 ‘숌숌’이라고 합니다)를 사겠다는 문의가 쇄도한 겁니다. 영상 마지막에 맥그리거가 “아이리쉬 위스키나 사먹으라”고 외치지는데도요.
인근 주민인 해리엇 라후드(Harriet LaHood)라는 가상의 인물을 동원해 “이웃인 오사마의 죽음으로 훌륭한 빈야드가 사라지는 것이 애통하다. 오사마는 3살 때부터 포도를 다루는 법을 배워왔으며, 그의 아버지는 언젠가 그 아이가 전설적인 포도 양조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고 전했죠. 물론 이것도 만우절 장난입니다. *관련기사
노르웨이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와인 등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상황에서 최대 신문사인 Aftenposten지(紙)가 ‘정부가 운영하는 와인 상점에서 75% 할인된 가격으로 집에서 가져온 양동이에 와인을 나눠주고 있다’는 만우절 장난 기사를 게재했다가 실제로 이를 믿은 국민들이 집에서 양동이를 가지고 상점 앞에 줄을 서는 웃지 못할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나름대로 불문율이 있습니다. 원래 담겨있던 와인도 다른 용기에 담아 가져간다는 겁니다. 한 방울이 아까운 와인러버들이 고작 장난을 위해 와인을 낭비할 수는 없으니까요. 장난이 끝난 뒤에는 다같이 맛있게 나눠 마셔야죠.
해마다 만우절이면 도가 지나친 장난이 문제가 돼 뉴스에 등장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장난이라면 분위기를 환기하고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겠지만, 상대방이 불쾌하거나 불편해한다면 더 이상 장난이라고 부를 수 없겠죠.
특히 와인을 뿌리거나 깨뜨리는 행위는 조심하셔야 합니다. 예기치 못한 부상이나,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길 수 있으니까요. 부디 오늘 하루 여러분이 마주칠 장난이 불쾌하기보다는 함께 웃고 즐길 수 있는 것이길 기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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