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베이징 올림픽보다 중요했던 두 사건
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71회>
역사 기술에선 특정 연도가 때론 역사의 분기점으로 기록되곤 한다. 1976년은 27년의 마오쩌둥 시대가 끝나고 개혁개방의 새로운 시대가 펼쳐지는 중국 현대사의 변곡점이었다. 톈안먼 민주화 운동이 대학살로 종결된 1989년도 역사의 기로였음을 부인할 자 많지 않다. 흔히 간과하지만, 2008년 역시 중국 헌정사의 전환점으로 기억될 수 있을 듯하다. 물론 그 해의 의미는 그 자체가 아니라 미래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 역사 서술은 사건의 기계적 나열이 아니라 전후 사건의 유의미한 연관성을 밝히는 인과론적 설명이기 때문이다.
2008년의 주요 사건 일지
14억 인구의 방대한 대륙인데 어찌 어느 해인들 무사, 무난, 무탈하랴만, 2008년은 특히 더 많은 사건, 사고가 터졌던 격동의 한 해였다. 많은 이는 2008년 중국이라 하면 베이징 올림픽을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꼽을 테지만, 그해 중국에선 베이징 올림픽보다 더 의미 깊은 역사의 중대사가 발생했었다. 그해 중대사만 잠시 짚어보자.
2008년 1~2월 중국에서는 133명이 눈보라에 휩싸여 목숨을 잃었다. 3월 10일 티베트 자치구 라싸에서 시작된 티베트족의 시위는 곧 중국 내 범 티베트 지역으로 퍼져서 4월까지 2300여 명이 구속되었다. 5월 쓰촨성 원촨(汶川)에선 대략 6만 9천 명이 사망하고, 37만 이상이 부상당하는 대지진이 발생했다. 7월 17일엔 한 회사의 분유가 아기 몸에서 신장결석을 일으켰다는 보도가 터지면서 30만명의 영유아가 조사받아서 그중 5만4000명이 집단 입원하는 사태도 터졌다.
7월 21일엔 중국 남부에서 통근 버스를 노리는 테러가 발생했다. 8월 4일엔 신장 서부 카슈가르에서 위구르족 두 명이 트럭을 몰고 경찰을 습격하여 16명이 사망했다. 나흘 뒤 개최된 베이징 하계 올림픽은 비교적 성공적으로 잘 치러졌지만, 불의의 사건·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10월 20일 상하이 외국어대학에선 일본인 유학생들과 중국인 학생들이 캠퍼스에서 격돌했다. 그 밖에도 광둥성 선전(深圳)과 동관(東莞), 구이저우성의 웡안(瓮安), 간쑤성의 롱난(龍南)에서도 대규모 소요가 계속 발생했다.
그리고 마침내 12월 10일 중국 민주화 세력은 “08 헌장”을 반포했다. 형식 및 서술 양식 면에서 “08헌장”은 1977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반(反)소련 운동가들이 발표한 “77 헌장”을 원형으로 삼았지만, “08 헌장”의 집필자들은 2008년이 청(淸) 제국 말기의 <<헌법대강(憲法大綱)>> 반포 100주년이며, 유엔의 보편적 인권 선언 60주년이자 민주장 운동 30주년임을 강조했다. 지난 100년 중국의 헌정사는 물론, 보편적 인권의 역사에서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와 정치적 억압은 일탈이자 퇴보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물론 중국공산당은 “08 헌장”의 의의를 축소하고, 부정하고, 무시한다. 암묵적으로 “08 헌장”은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가 100년 중국 헌정사의 반민주적, 반자유적, 반인권적 일탈이라 비판하는 까닭이다. 반면 중국의 정치적 자유화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08 헌장”은 중국 헌정사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인식된다. “08 헌장”은 인류사 보편가치에 따라 입헌 민주주의의 원칙을 새로운 중국의 헌법적 기초라고 천명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요 사건을 열거하고 보면, 베이징 올림픽은 슬그머니 뒷전으로 밀려난다. 대신 티베트족 시위와 “08 헌장”의 반포가 2008년의 최대 중대사로 부상한다.
2008년, 티베트족의 저항
2008년 3월 10일은 1959년 티베트 기의(起義) 49주년 기념일이었다. 해마다 3월 10일이면, 인도 다람살라에서 달라이 라마는 빼놓지 않고 티베트 독립 투쟁의 현황에 관한 연설을 한다. 이날 달라이 라마는 갈수록 심해지는 티베트족에 대한 중국 정부의 야만적 억압을 규탄하면서 전 세계 티베트족의 자율과 단결을 촉구했다.
그날 저녁 티베트 승려들이 무리 지어 라싸 중앙으로 몰려갔다. 중도에서 경찰이 막아서자 바로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시위를 시작했다.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티베트 독립을 외치고 금지된 티베트기를 꺼내서 흔들기도 했다. 그 현장에서 15명이 체포되었다. 라싸에서 시위가 진행될 때, 놀랍게도 동시다발적으로 티베트고원 동부의 암도(칭하이성과 간쑤성)과 캄(쓰촨성)에서도 시위가 이어졌다.
티베트 고원 지대에서 다수 티베트족은 1959년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를 일으켰다. 티베트 망명 정부에 따르면, 그해 3월 220명의 티베트인이 학살당하고, 5600명이 구속되거나 수감당했으며, 1294명이 부상을 입었고, 290명이 형벌을 선고받았으며, 1000명이 실종되었다.[Tsering Topgyal, “Insecurity Dilemma and the Tibetan Uprising in 2008,” Journal of Contemporary China (2011), 20(69): 183.]
당시 국제사회는 베이징 하계 올림픽 개최를 다섯 달 앞두고 발생한 격렬한 티베트족의 시위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티베트족 시위에 대한 중국 정부의 폭력 진압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중국 밖의 세계 여러 나라 대도시에서도 중국 내 티베트족의 시위를 지지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올림픽을 앞둔 민감한 상황에서 애국심 강한 해외 중국인들은 서방 미디어의 반중국적 편향을 규탄하는 맞불 집회를 연출하기도 했다.
그해 티베트족의 시위는 과연 왜 일어났을까? 중공 중앙은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달라이 라마 집단이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기 위해 티베트족을 세뇌하고, 선동하고, 교사한 결과라고 선전했다. 반면 티베트족은 수십 년 지속된 중국의 억압적 정책을 근본적 원인으로 꼽았다. 실제로 중국 정부는 티베트 지역에 대규모 한족 인구를 이주시키는 공격적인 사민(徙民) 정책을 펼쳤고, 강력한 동화 정책으로 티베트족의 문화적, 종족적, 종교적 정체성에 큰 생채기를 냈다.
티베트족의 저항과 “08 헌장”의 관계
얼핏 2008년 티베트족의 저항과 같은 해 12월 “08 헌장”의 반포는 별개의 독립적 사건처럼 보일 수도 있다. 전자는 중공 중앙의 동화 정책과 문화적 제국주의에 대한 티베트족의 저항이었던 반면, 후자는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 인권탄압, 정치적 억압 및 사회적 통제를 종식하려는 자유파 입헌 민주주의자들의 반발이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을 더 깊이 보면, 두 사건의 긴밀한 연관성이 확연히 보인다.
첫째, “08헌장”은 인류적 보편가치를 선양하며, 헌법의 전면 개정, 권력분립, 입법의 민주화, 사법 독립, 인권 보장, 자유 선거, 호구제 폐지와 거주이전의 자유, 결사·집회의 자유,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자유 시장경제와 사유재산의 보호, 환경 보호, 연방 공화국의 건설, 과거사에 관한 진실·화해의 해법 등을 요구한다. 그중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연방 공화국 건설 및 과거사에 대한 진실·화해의 해법은 중국공산당의 통치에 저항하는 티베트족의 일반적 요구와 부합한다.
둘째, 티베트족 시위가 들불처럼 번지던 2008년 3월 22일 중국에서 민주화 운동을 이어가던 민주 운동가 및 인권 활동가 29명은 중앙정부를 향해 티베트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12개 조항”을 발표했다는 사실이다. 놀랍게도 이들 29명 중에서 24인은 12월 10일 “08헌장”이 발표될 때 연명(聯名)으로 지지를 선언한 303인에 속해 있었다. 나머지 5인 중 4명은 차후 08 헌장에 서명했다. 29명 중에서 오직 한 사람만 “08 헌장”에 서명하지 않았는데, 그의 이름은 왕리슝(王力雄·1953)이었다.
왕리슝은 류샤오보(劉曉波·1955~2017)와 함께 “12개 조항”을 직접 작성하고 서명을 주도했다. 그는 티베트와 신장 문제를 심층 취재해서 중국 정부를 압박해 온 저명한 작가이자 민주 활동가이다. 또한 그의 부인은 가장 치열하게 티베트족의 울분과 염원을 대변해 온 티베트족 작가 체링 우어세르(Tsering Woeser·1965~)이다.
체링 우어세르는 류샤오보와 함께 “08 헌장”의 작성에 참여하고 서명한 최초의 9인 중 한 명이다. 아내가 “08 헌장”에 서명한 최초 9인 중 한 명이기 때문일까. 어떤 이유에선지 왕리슝의 이름은 서명자의 명단에 올라 있지 않지만, 그가 직접 티베트 문제 관련해서 “08 헌장”의 주요 인물들과 함께 “12개 조항”을 작성했다는 사실은 이미 그가 “08 헌장”에 깊숙이 관여했음을 시사한다.
셋째, 12개 조항의 내용을 보면 더더욱 2008년 티베트족의 저항과 “08 헌장” 사이의 관련성을 확인할 수 있다. 12개 조항을 통해서 중국 지식인 29명은 달라이 라마의 비폭력 원칙에 분명한 지지를 표명하면서 평화적 문제 해결을 위해서 중국 정부가 근본적으로 소수민족 정책을 바꿔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중국 정부를 향해 소수민족의 원한을 부추기는 관방 매체의 일방적 선전 활동을 전면 중단하고, 폭력적 시위 진압을 멈추라 요구했다. 아울러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기 위해선 티베트 지역에 유엔 조사단을 파견하여 철저히 진상을 조사하고, 국내외 유수 언론의 심층 취재를 허용하고, 구속자 모두가 공정하고 투명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몇몇 조항을 살펴보자.
제4항. “우리는 티베트 지역에서 중공 지도자들이 사용하는 ‘달라이는 가사를 두른 표랑(豹狼)이며 인면수심의 악마”와 같은 문혁의 언어는 사태의 진정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중국 정부의 이미지도 나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국제사회에 융화되려 노력하는 중국 정부는 반드시 현대 문명에 부합하는 집정의 풍모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9항. “우리는 중국 민중과 해외 화교가 냉정과 관용을 지키면서 심사숙고할 것을 요구한다. 격렬한 민족주의의 자태는 국제사회의 반감을 살 수 있어 중국의 국제적 이미지를 훼손할 수 있다.”
제10항. “1980년대 티베트의 소요는 라싸에 국한됐지만, 이번에는 범 티베트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의 악화는 티베트 정책의 엄중한 실패를 반영한다. 관련 부서는 통렬하게 반성하고 실패한 민족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제11항. “유사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 정부는 반드시 중국 헌법에 명시된 종교와 신앙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고, 티베트족 민중이 충분히 그들의 불만과 희망을 표현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아울러 각 민족과 국민이 자유롭게 정부의 민족 정책에 대해서 비평하고 건의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제12항. “우리는 민족의 분노와 원한을 해소해야만 민족의 화해를 해결할 수 있으며, 민족 간의 분열이 계속 커가는 것을 막을 수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국가의 영도자가 직접 달라이 라마와 대화할 것을 호소한다······.”
“08 헌장”의 정신, 티베트족의 권리를 보장
2008년 3월 티베트족의 대규모 시위가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갈 때, “08 헌장”을 입안하던 중국의 자유파 활동가들은 “12개 조항”으로 발표해서 “종교·신앙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외치면서 중국 정부를 압박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티베트족의 편에 서서 중국공산당의 종교 탄압과 무력 진압을 규탄했다. 인류의 보편가치를 외치면서 그들은 중국 정부에 맞서는 티베트족과 연대했다. 중국공산당에 맞서 종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외쳤다는 점에서 티베트족의 시위와 “08 헌장”은 일맥상통한다.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근대 입헌주의 전통에서 헌법이란 국가의 폭력에 대항하여 인종적, 민족적, 문화적, 성적 차이를 넘어 보편적 인권과 개인의 자유를 지켜주는 합법의 울타리이기 때문이다.
다시 묻는 2008년의 역사적 의의
2035년쯤 역사가들은 좌우 막론하고 2008년을 중국 현대사의 중대한 한 해로 기록할 듯하다. 그때도 중국공산당 일당독재가 현 상태(status quo) 그대로 유지될 수 있다면, 애국심 강한 중국의 역사가들은 2008년을 중국공산당이 그해 8월 베이징 올림픽을 통해서 중화 문명의 위력을 전 세계에 과시했던 “민족 부흥”의 원년(元年)으로 기록할 것이다. 반면 그때쯤 중국에서 민주화의 돌풍이 일어나 공산당 일당독재가 흔들리게 된다면, 2008년의 역사적 의의는 중국 “헌정 민주”의 분기점으로 정의될 수도 있다.
이미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53회>에서 소개했지만, 재미 중국 전문가 민신 페이(Minxin Pei) 교수는 2035년 중국이 정치적 급변을 거쳐 민주주의 체제로 진화할 수 있다는 전망을 제시한다. 그는 일인 지배의 정치적 위험, 권력 승계의 갈등, 인구 고령화 및 서방과의 탈동조화(decoupling)에 따른 경제성장률 저하 등을 중국이 민주주의 체제로 변화할 수 있는 주요 이유로 꼽고 있다.
페이 교수와는 달리 중국 안팎의 다수 전문가는 권위주의의 회복력(authoritarian resilience)을 강조하며, 앞으로도 장기간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가 유지된다는 전망을 쏟아내고 있다. 물론 학자들의 예측은 다반사로 빗나간다. 1989년 이래 중국의 민주화 가능성에 관해선 비관론이 낙관론보다 현실에 부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글에서는 페이 교수의 예측이 적중한다는 가정 위에서 2008년 세계인의 관심을 끌었던 티베트족의 시위와 “08 헌장”의 관계를 되짚어 보았다. 2035년이 되어도 중국이 지금 이대로 공산당 일당독재의 전체주의 국가로 유지되는 상황을 국제사회가 속수무책 방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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