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열의 산썰(山說)] 3. 자연계와 인간계

최동열 2023. 4. 1.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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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악산 수렴동 계곡 입구 백담사-만해(萬海·1879∼1944년) 선사가 머물며 ‘님의 침묵’, ‘조선불교유신론’ 등을 집필한 설악산의 명찰(名刹)이다.

■ 산사(山寺)를 경계로 나뉘는 자연계와 인간계

-무위의 자연계로 들다.

등산을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절은 대부분 그곳에 있을까?” 무슨 말인가 하면 절, 즉 우리나라의 사찰이 대부분 산 밑이나 계곡이 시작되는 접점 같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전북 남원의 실상사처럼 지리산 자락 평지에 세워진 가람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대부분 사찰은 산에 있고, 또 수행과 참선의 공간으로 산속에 자리 잡는 것이 적당하다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강원도와 동해안은 특히 산이 많은 곳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오대산 월정사와 설악산 신흥사 등 규모가 큰 사찰에서부터 작은 말사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절이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는 입구, 즉 접점에 터를 잡고 있다. 혹자들은 조선시대에 행해졌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인해 대부분의 절이 억압을 피해 깊은 산으로 들어가게 됐다는 이론을 편다.

언젠가 설악산 울산바위 코스를 등산하다가 내원암 지점에서 ‘절이 산으로 들어간 까닭은’이라고 쓰인 안내판을 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도 조선시대 불교를 억압하는 나라의 정책으로 인해 대부분의 절이 산으로 들어가게 됐다는 것을 한 가지 이유로 들고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지금은 그 터와 흔적만 남아있는 경주의 황룡사나 감은사, 익산의 미륵사, 부여의 정림사 등 고대 신라와 백제의 대찰은 물론이고, 고려시대 사찰 가운데도 생활권인 평지에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많았으니, 조선시대에 많은 절이 산에 터를 잡게 됐다는 것도 일견 타당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 백담사 앞의 평화로운 풍경-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돌탑군이 산사의 감흥을 더한다.

설악산에서 본 안내판에는 절이 산으로 간 까닭으로 세 가지를 들고 있었는데, 첫째는 우리나라 민간의 뿌리 깊은 산악숭배 사상과 불교가 합해지면서 절이 산에 터를 잡게 된 것이고, 두 번째는 기운이 부족한 산천에 절을 지어 부족한 기운을 채우려는 풍수지리설의 영향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마지막 세 번째 이유로 든 것이 숭유억불 정책이다. 일설에는 신라 말에 참선을 중시하는 선종이 유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절이 산속을 택하게 됐다고 하기도 하고, 왕실이나 귀족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나라의 믿음’으로 성장한 불교가 숭유억불 정책의 반작용으로 민중, 즉 서민들의 종교로 자리잡게 되면서 산 속에 둥지를 틀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등산하다 보면 대부분 절의 위치가 참으로 절묘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산에 들었으되, 주로 깊은 계곡의 초입이나 깊고 높은 산 입구에 자리를 잡아 어찌 보면 완전히 산속도 아니고, 속인들이 사는 마을은 더더욱 아닌 절묘한 위치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구분을 하지면 그곳은 자연계와 인간계의 경계 지점이다. 사찰을 기준으로 이 편은 인간들의 생활공간이고, 저 편은 인간의 때가 끼지 않은 무위의 영역이다. 문명의 이기(利器)인 자동차가 네 바퀴를 움직여 도달할 수 있는 산속 공간도 딱 절 집 주차장까지이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오로지 두발로 발 품을 파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으니, 이동수단에 의해서도 사찰을 기준으로 한 인간계와 자연계의 경계 구분은 뚜렷하다. 물론 깊은 산속,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암자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곳은 대부분 정진 수행을 위한 암자인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논외로 해야겠다.

■ 산행(山行)은 공평한 수고와 땀의 가치

-산(山) 스토리를 이해하며 즐겨야

 

▲ 두타산 무릉계곡 입구 삼화사

자연계와 인간계가 갈린다는 점에서 등산로 문턱의 사찰은 한편으로 자연과 인간의 중재자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해관계가 얽힌 치열한 삶을 사는 인간 세상의 구성원들이 자연계를 만나 지치고 다친 마음을 다스리고 정화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면 좋겠다는 뜻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숭유억불 정책 등은 역사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옛이야기로 돌려질 뿐이고, 오늘날의 시각에서 절은 꼭 있어야 할 자리에 둥지를 틀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사찰은 또한 그 산의 스토리를 가장 많이 알고 있는 해설 공간이기도 하다. 규모가 크든 작든, 사찰은 거의 예외 없이 옛이야기를 품고 있으니 도량 내 요사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보면, 절의 창건사에서부터 이 산에서 예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전설, 설화 등의 흥미로운 이야기보따리가 술술 풀어헤쳐진다. 오대산 상원사가 품고 있는 세조 대왕과 문수보살 이야기, 계룡산 동학사의 남매탑 전설, 경북 청량산 청량사에 깃들어 있는 원효대사와 뿔 셋 달린 소(삼각우)의 창건설화 등등. 사찰마다 귀가 솔깃해지는 스토리 서너 개 쯤은 반드시 간직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 삼척 쉰움산 정상에서 만난 운해(雲海) 장관-등산을 하다보면 뜻하지 않게 이런 장관을 만나는 때가 더러 있다.

스토리를 익히는 것은 산의 풍광을 즐기는 것 못지않게 등산의 감흥을 더해주는 감미료이다. 따라서 산 입구의 절에서 누천년 곰삭은 스토리를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요깃거리를 배낭에 챙기는 것만큼 중요하게 산행의 에너지를 더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절집을 지나면서 만나게 되는 울퉁불퉁 계곡 길과 비탈진 산길에는 푹신한 안락의자도 없고, 몸을 치장하는 금붙이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절집 너머 자연이 요구하는 것은 오직 공평한 수고와 땀 뿐이다. 더 좋은 경치를 보여준다고 돈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하산 길에 다시 세속의 욕망을 챙겨 나오는 일이 매번 반복된다고 해도 적어도 한 달에 한두 번 절집 너머 자연으로 들어가면서 잠시 두 손을 모으고 공평한 수고와 땀의 가치를 생각하는 것은 분명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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