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와 쓰기는 ‘노예의 일’이었다[책과 삶]

김종목 기자 2023. 4. 1.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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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 신분의 흑인들이 읽기를 배우는 모습을 묘사한 당시 그림(1860).

갈대 속의 영원

이레네 바예호 지음·이경민 옮김|반비|560쪽|2만6000원

1865년 남부연합이 패배할 때까지 미국의 많은 남부 지역에선 노예가 읽고 쓰는 법을 배우는 게 불법이었다. 대농장 소유주들은 철자를 아는 노예를 교수형에 처했다. “노예의 주인들(독재자, 폭군, 절대 군주, 기타 불법적인 권력의 소유자)은 문자의 힘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들은 읽기가 몇 개의 단어만으로 압도적인 힘을 발휘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 중)

읽기와 쓰기는 노예의 일이었다

고대 그리스·로마 노예들의 처지는 대조적이다. 이들은 복사, 문서화 작업을 했다. 주인들은 읽기와 쓰기를 노예의 전문적 일로 여겼다. ‘노예 우대’나 ‘노예 복지’ 같은 형용모순의 대우가 아니었다. 당시 읽기는 주인을 섬기고 복종하는 일이었다. 작가 이레네 바예호는 “고대의 독서는 오늘날 같은 침묵의 독서가 아니었다…그리스인과 로마인은 글로 된 텍스트가 온전히 완성되려면 살아 있는 목소리를 사용해야 한다고 믿었다”며 이렇게 말한다. “그 (독서) 노예들은 책을 읽는 순간 자신이기를 멈췄다. 그들은 자신이 아닌 다른 ‘나’를 말해야 했다. 그들은 타인의 음악을 위한 악기에 불과했다.” 특히 로마에서 노예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엄청난 수의 그리스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로마에 노예로 팔려 왔기 때문이다.

저자는 “로마 귀족들은 특권적이고 희귀하고 독점적인 책에 열광했다”고 말한다. 이들은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한 중요한 문화적 중심지에 하인을 보내 사본을 구했다. “곧 그들은 그리스와의 전쟁을 통해 도서관 전체를 탈취하는 게 실용적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하여 문학은 전쟁의 전리품이 되었다.” 마케도니아의 왕실 도서관을 로마로 옮긴 게 한 사례다.

고고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재현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그림(19세기 중반). 출처 위키피디아.
창조된 이후로 나은 게 등장하지 않았다

<갈대 속의 영원>은 바퀴, 의자, 숟가락, 가위, 잔, 망치처럼 “한번 창조된 이후로 그보다 나은 게 등장하지 않은” 책에 관한 역사책이자 에세이다. 저자는 “책 사냥꾼의 모험을 이어가려는 노력”이라고 했다. 그리스·로마 시대 고전 문헌학을 전공한 저자답게 이 시대를 중심으로 책과 도서관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낸다. 요즘이야 매해 수백만권의 책이 폐기돼 펄프로 만들어진 뒤 신발 상자, 화장지, 냅킨으로 재활용되지만, 당시에는 “보물 조각” 같은 존재였다. 권력자와 부자들은 그 보물을 얻으려 힘으로 빼앗고, 사기도 쳤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아테네에 보관된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정본을 욕심냈다. 사본을 만들겠다고 빌리고는 돌려주지 않았다. 지금 수백만달러에 해당하는 15달란트의 은 보증금은 포기했지만 말이다.

역사 인물들의 이야기도 이어진다. 알렉산드로스가 늘 <일리아스>를 품에 안은 채 잠들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가 전리품인 다리우스의 값비싸고 독특한 보물 상자에 넣으라고 한 것도 이 책이다. 티레와 가자 침공 이후 가자의 통치자를 <일리아스>의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에게 했던 것처럼 수레에 묶어 죽을 때까지 나뒹굴게 했다. “그는 분명 자신이 서사시를 살고 있다고 믿으며 흡족해했을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처럼 전설적인 잔인함과 상징과 몸짓을 모방했다.” 저자는 여러 인물에 관한 단상을 적었다. 알렉산드로스의 강박을 묘사하는 그리스어로 파토스를 꼽으며 “그것은 부재한 것 혹은 닿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이며 결코 진정되지 않기에 상처를 주는 욕망”이라고 말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세계화 사회의 전초기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금이나 보석이나 향연에는 눈 깜짝하지 않을 클레오파트라에게 선물한 것 중 하나가 도서관에 비치할 20만권의 책이었다. 이 무대가 “책에 대한 열정적인 광기”를 드러낸 알렉산드리아다. 저자가 가장 비중 있게 다루는 것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얽힌 특별한 모험”이다. 세관원들은 글로 쓰인 것이라면 무엇이든 파피루스에 복사했다. 사본을 돌려주고 원본을 취한 뒤 도서관 책장에 비치했다. 도서관의 파수꾼들은 사본의 변화 과정에서 원래 메시지가 슬그머니 바뀌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곤, 원본을 재구성할 모든 판본의 책을 사러 다녔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엄청난 투자를 한 도서관을 문학적 영감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개방했다. 저자는 “그들은 그 일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이 세계의 토대를 세우고 있었다” “그곳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세계화 사회의 전초기지였다”고 말한다.

카이사르가 로마 최초의 공공도서관을 건설할 계획을 세운 사실도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이야기 시간대를 현대까지 연장하고, 주제와 대상을 정보기술(IT)과 예술까지 확대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영국의 컴퓨터 과학자 팀 버너스리가 공공도서관의 질서정연하고 접근성이 뛰어난 공간에서 웹의 영감을 얻은 사실과 연관해 분석한다. “도서관이 광대하게 증강되어 방사된 것이 바로 인터넷이다.” “부유한 로마인들의 (책) 전유에 대한 열망”을 1940년대 유럽 최상 회화를 미국으로 사들여온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에 빗댄다. “예술에 대한 새로운 지리학을 그려내려던 열정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 사회에선 예술이 개인이나 삶이 아니라 사물에 관련된 것으로 변해 있습니다. 왜 사람은 자신의 삶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들 수 없는 거죠? 왜 전등이나 집은 예술작품이 될 수 있고 내 삶은 안 되는 겁니까?”라는 고대 사유에 관한 인터뷰 때 미셸 푸코가 한 말도 전한다.

“뛰어난 솜씨를 자랑하는 무용가”에서 고대그리스 연회를 상상하다

저자는 책에 얽힌 모든 역사 속에서 종횡무진으로 움직인다. 재산 목록을 점토에 기록하던 글쓰기는 기원전 8세기 “연회에 참여하여 춤추고 마시고 축하하는 사람들의 특별한 삶”을 기록하면서 그 순간을 영원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또한 알파벳 덕이었다. “뛰어난 솜씨를 자랑하는 무용가는…”이라 는 단순한 문장을 새긴 기원전 750년에서 650년의 항아리에서 “우리는 그리스인의 저택에서 열린 연회를 상상”할 수 있다.

양피지로 150쪽 책을 만들려면 열 마리에서 열두 마리의 양이 필요했다. 한 서기는 13세기 성경에 재료의 결핍을 한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 하늘이 양피지고 바다가 잉크라면 좋았을 것을.”

책의 수난사도 썼다. 진시황,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기 관리, 스페인 종교재판관, 나치 등의 ‘분서’를 두곤 하이네가 1821년 했던, “책을 태우는 곳, 그곳에서 사람을 태우게 될 것이라”라는 말을 연결한다.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 대신 ‘끝이 좋으면 다 좋다’, 보들레르는 <악의 꽃>을 ‘레즈비언’이란 제목을 달려고 했던 이야기까지 이어진다.

저자는 정치적 올바름과 현대의 잣대를 적용하며 서술한다. 알렉산드로스의 과대망상, 잔인함, 희생자들에 대한 냉담함을 두고 분석하는 작가들, 그를 아돌프 히틀러와 비교하는 작가들 견해도 소개한다. 남성의 지배권 옹호 같은 고대 책에 포함된 억압적 이데올로기도 다룬다.

‘강요된 침묵’을 뚫고 나온 ‘이야기의 직조자’들, 여성

저자는 여성에 대한 ‘강요된 침묵’ 역사에도 주목한다. 데모크리토스는 민주주의와 자유의 수호자이자 전복적 사고를 지녔음에도 “여자가 말을 하면 안 된다. 그건 끔찍한 일”이라고 말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자연적 능력은 남녀 모두에게 유사하게 분배되기에 여성은 본질적으로 남성과 동일하게 모든 일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해놓고도, 다른 저작에선 부정한 남자들이 벌을 받아 여성으로 환생한다고 적었다. 침묵을 뚫고 나와 ‘여성의 목소리’를 낸 이가 사포다. “이 검은 땅 위에 기마부대나 보병부대나 선단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내 생각에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라는 기원전 6세기 사포의 표현에서 ‘정신적 혁명’을 찾아낸다. 대다수가 찬미하는 행진과 군대와 권력의 과시를 문제 삼으며 기성의 가치와 마찰하기 때문이다.

여성 철학자 히파르키아가 ‘정신은 말을 엮는 베틀’이라고 생각한 점을 두고 “말의 씨실과 날실의 조합이 텍스트(text의 어원이 직물이란 뜻의 textus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되묻는다. 여성은 “고대부터 화톳불 곁에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민요를 부르고 시를” 엮고, “밤에 이야기의 기억을 풀어내는 일을” 맡은 ‘이야기의 직조자’였다.

<갈대 속의 영원> 저자 이레네 바예호. 위키미디어 공용
책 덕에 인류의 최고 아이디어가 살아남았다

저자는 민주주의를 강조하며 책을 마무리한다. 책은 해로운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수단이란 점도 분명하다. 여성 억압, 노예제 유지, 장애인 차별의 이데올로기가 책으로 이어졌다. 끔찍한 사건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문화에 대한 기록은 동시에 모두 야만에 대한 기록”이라는 발터 베냐민의 말도 인용한다. 저자는 책이 과거에 인류가 건설한 최고의 이야기, 상징, 지식, 발명을 뒷받침한다는 점에 방점을 둔다. 저자는 “인류가 창안한 최고의 아이디어가 생존할 수 있었던 건 책 덕분”이라며 “책이 없었다면 우리는 시민에게 권력을 넘겨주기로 결정한 소수의 무모한 그리스인을 잊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외국인에게도 전폭적인 도움을 주라’며 가난한 자와 노예를 동등하게 치료할 것을 약속한 히포크라테스적 의사들도 잊었을 것”이라고 했다. 사포의 시에서 욕망이 저항의 한 형태임을 발견하고, 타키투스의 책을 통해 독재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며, 세네카의 목소리에서 최초의 평화주의자의 외침을 듣는다. 저자는 인간의 평등, 병자와 약자와 노인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지원 등 ‘우리 세계’의 가장 좋은 것들의 발명이 책으로 전해지지 않았다면, 모두 망각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책은 40여개국에서 출간됐다. 여러 작가와 매체가 극찬했다. 스페인에서 국립에세이상과 함께 받은 상 이름 하나가 책 주제나 취지와 이어지는 듯하다. 상 이름은 ‘인문학 수호를 위한 시민참여상’이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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