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 기로에서 탄생한 양희은의 생명의 노래 ‘하얀 목련’[정충신의 꽃·나무 카페]

정충신 기자 입력 2023. 4. 1. 07:51 수정 2023. 4. 1.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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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신의 꽃·나무 카페
백악기 때 출현, 속씨식물 중 가장 오래된 ‘살아있는 화석’
꽃이 피면 북쪽을 향해 ‘북향화(北向花)’…임금 향한 충절
목련 꽃봉오리 ‘신이(辛夷)’는 붓기에 효험 있는 약재
하얀 목련이 분홍빛 살구꽃을 배경으로 피어있는 모습. 용산 대통령실 후원격인 무궁화동산에서. 2019년 4월4일 촬영

<하얀 목련이 필 때면 다시 생각나는 사람/봄비 내린 거리마다 슬픈 그대 뒷모습/하얀 눈이 내리던 어느 날/ 우리 따스한 기억도/언제까지 내 사랑이어라 내 사랑이어라/거리엔 다정한 연인들/혼자서 걷는 외로운 나/아름다운 사랑 얘기를 잊을 수 있을까/ 그대 떠난 봄처럼 다시 목련은 피어나고/아픈 가슴 빈자리엔 하얀 목련이 진다>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 뜨락에 핀 백목련. 2023년 3월29일 촬영

1983년 김희갑 작곡, 양희은이 부른 이 ‘하얀 목련’을 두고 작사가 정두수 선생은 ‘노래 따라 삼천리’(미래를 소유한 사람들 刊)에서 “가수 자신이 생사의 기로에 섰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탄생한 생명의 노래”라고 했다. 정두수 선생은 ‘나에게 바치는 편지 하얀 목련’ 편에서 “아름답다 못해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이 서정적인 노래”에 얽힌 가슴 시린 사연을 들려준다.

지병인 난소암 수술을 받기 위해 경희대 부속병원에 입원해 있던 양희은은 두려움과 번민으로 머리맡에 성경과 찬송가를 두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매달렸다. 그렇게 기도를 마친 어느날 양희은의 눈길이 병실 창밖을 응시했다.거기엔 하얀 목련이 나른한 봄빛 속에 눈부시게 피어 있었다. 대수술을 앞두고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던 양희은의 눈에 비친 하얀 목련은 눈물나게 아름다웠다. 그 순간 세상에 남기는 유서가 될지도 모를 한 편의 서정시가 탄생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하얀 목련 덕분인지 양희은은 기적적으로 소생하고 이듬해 김희갑의 작곡으로 취입해 세상에 빛을 보게 된다. 하나님을 몸으로 느끼면서 양희은은 깊은 신앙에 빠지고 마침내 찬송가를 부른다.

자목련과 백목련과 함께 핀 풍경. 서울 중구 문화일보 뒤뜰. 2020년 4월3일 촬영

쌍떡잎 식물로 미나라아재목 목련과의 낙엽교목인 목련은 중국에서 들어온 귀화식물롤 한국 일본 등에서 자란다. 목련은 ‘살아 있는 화석’으로 불린다. 백악기 시대에 출현해 지금까지 남아있는 속씨식물 중 가장 오래된 식물이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눈부시게 반짝이는 ‘봄의 전령사’ 목련은 추운 겨울 뒤에 가슴 설레게 하는 뭉클한 감동을 준다.

‘목련(木蓮)’은 ‘나무에 피는 연꽃’ 이란 뜻이다. 꽃봉오리가 붓을 닮았다 해 ‘목필(木筆)’, ‘붇꽃(붓꽃)’이라고도 한다.

목련 꽃봉오리를 ‘신이(辛夷)’라고 하는데 2000년 전부터 약재로 사용해왔다. 꽃봉오리가 터지지 직전의 꽃을 따서 그늘에 말렸다가 차로 마시거나 음용을 하게 되면 비염이나 몸의 붓기를 빼주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방향성 식물로 여름철 습하고 냄새가 날 때 목련나무 가지를 태우면 악취가 없어지고 좋은 향이 난다고 한다.

백목련과 자목련이 함께 핀 풍경. 서울 중구 정동 주한러시아대사관 인근. 2023년 3월29일 촬영

목련꽃이 필 때 꽃은 희안하게도 북쪽을 향한다. 조선시대 중기 구사맹이 한시에 이를 인용해 임금에 대한 충정을 표현했다. 남쪽의 햇빛을 많이 받는 화피(꽃덮개)가 빠른 성장을 하며 북쪽으로 기울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이 때문에 ‘북향화(北向花)’라는 이름도 있다.

<어둠을 밀어내려고, 전 생애로 쓰는 유서처럼/목련은 깨어 있는 별빛 아래서 마음을 털어놓는다/저 목련은 그래서, 떨어지기 쉬운 목을 가까스로 세우고/희디흰 몸짓으로 새벽의 정원, 어둠 속에서/아직 덜 쓴 채 남아 있는 시간의 눈을 바라본다/그 눈으로부터 헤쳐 나오는 꽃잎들이/겨울의 폭설을 견딘 것이라면, 더욱더 잔인한 편지가/될 것이니 개봉도 하기 전 너의 편지는/뚝뚝 혀들로 흥건하리라, 말이 광야를 건너고 /또한 사막의 모래를 헤치며 마음이 우울로부터/용서를 구할 때 너는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말똥거리다 힘이 뚝 떨어지고 나면/맹인견처럼, 이상하고도 빗겨간 너의 그늘 아래에서/복부를 찌르는 자취와 앞으로 씌어질 유서를 펼쳐/네가 마지막으로 뱉어낸 말을 옮겨 적는다>

박주택 시인의 ‘목련’은, 양희은의 ‘하얀 목련’의 비애와는 달리 비장감이 흐른다. ‘잔인한 편지’ ‘유서’라는 단어는,땅에 뚝뚝 떨어져 검게 타는 꽃잎을 떠오르게 한다.

목련은 크게 토종목련과 중국에서 들어온 백목련, 자목련과 일본 개량종인 자주목련이 있다. 토종목련은 꽃잎이 좁고 길며, 활짝 피면 꽃잎이 완전히 젖혀지고, 외래종 목련은 꽃잎이 넓고 대체로 둥글며 완전히 피어도 반쯤 벌어져 있어 구분이 쉽다. 자목련은 꽃의 바깥쪽이 진한 자주빛이고 안쪽이 연한 자주빛을 띤다. 개량 품종으로 바깥은 자주색이고 안쪽은 흰색을 띠는 자주목련과는 구분된다.

자목련의 꽃말은 ‘자연애’이다. 자목련은 백목련이 꽃잎을 떨어뜨릴 때 꽃을 피운다. 자목련은 연꽃을 많이 닮았다 해 사찰 주변에 많이 심는다. 부산 범어사에서는 가장 오래된 자목련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너를 만나서 행복했고/너를 만나서 고통스러웠다//마음이 떠나버린/육신을 끌어안고/뒤척이던 밤이면//머리맡에서 /툭툭 꽃잎이/지는 소리가 들렸다//백목련이 지고 난 뒤/자목련이 피는 뜰에서/다시 자목련이 지는 날을/생각하는 건 고통스러웠다.//꽃과 나무가/서서히 결별하는 /시간을 지켜보며/나무 옆에 서 있는/일은 힘겨웠다.//스스로 참혹해지는/자신을 지켜보는 일은//너를 만나서 행복했고/너를 만나서 오래 고통스러웠다.>

도종환의 시 ‘자목련’은 백목련이 지고 난 뒤 자목련이 피는 자연의 섭리를 들려준다. 목련은 피어난 순간의 가슴 시린 찬란한 아름다움과 대비돼 지고난 뒤 가슴을 후벼파는 잔인한 고통을 동시에 떠올리게 하는 보기드문 꽃이다. ‘살아있는 화석’이라서, 목련 꽃은 삶과 죽음, 행복과 고통의 순간을 봄볕 비친 짧은 순간에 그토록 드라마틱하게 연출하는 걸까.

충남 태안 천리포수목원은 4월5일부터 30일까지 ‘목련 필(Feel) 무렵’을 주제로 제6회 목련축제를 개최한다. 목련을 주제로 하는 봄꽃 축제는 국내에서 천리포수목원이 유일하다고 한다. 수목원은 목련꽃이 만개한 풍경과 향기 속에서 탐방객에게 치유와 휴식을 제공할 예정이다. 축제는 공개지역인 밀러가든과 평상시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는 교육·연구용 지역인 ‘목련원’과 ‘목련산’ ‘에코힐링센터’ 세 곳을 추가 개방해 총 4곳에서 진행한다.

글·사진=정충신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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