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폭우가 ‘낮은 곳’ 덮치기 전에…‘물이 노리는 집’을 구하라

이문영 2023. 4. 1.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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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커버스토리][한겨레S] 커버스토리
‘국내 첫 반지하 현장 조사’ 속으로
서울시 포기 전수조사 성동구 자체 추진
취약거처 파악해 이주·침수방지 지원
물이 삶의 격차를 파고들지 않도록
생명을 두고 벌이는 ‘차별과의 경쟁’

물은 격차를 따라 흐른다.

상류에서 하류로 흐르고,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흐르며, 고층에서 저층으로 흐른다. 그 본능을 내버려두면 도시로 몰려든 물은 저층이 아니라 ‘하층’을 공격한다. 물이 고저가 아니라 상하의 문제가 될 때 물은 기어코 ‘그 집들’을 찾아낸다.

물이 그 작고 좁은 문을 찾아내면

“여기가 제2의 고향잉께로 떠나고 싶진 않지만서도….”

박미옥(가명·69)씨가 지난 3월24일 제방길에서 걷기 운동을 하며 말했다. 제방 너머 동부간선도로를 따라 자동차들이 고속으로 달렸고 도로 옆에선 중랑천이 바짝 붙어 느리게 흘렀다. 지난해 중랑천이 범람했을 때도 물이 둑을 넘어오진 않았으나 둑 안쪽 깊숙한 골목에 있는 그의 집은 제방도 지켜주지 못하는 구조였다.(다행히 침수 피해는 없었다.)

골목과 접한 주택 외벽에 높이 1m의 새시 문이 나 있다. 몸을 잔뜩 웅크려 계단을 내려가야 닿는 캄캄한 방의 세입자는 환기가 되지 않아 늘 문을 열어둔다.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그는 ‘여기’ 서울시 성동구 송정동에서 30여년을 살았다. “먼 남쪽에서 중학생 딸을 데리고 올라온 뒤” 그 딸이 4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 동네를 떠나지 않았다. 제2의 고향집은 몸의 절반 이상을 땅 밑에 두고 있었다. 딸과 둘이서 가정을 이루고 살던 때나, 딸이 자신의 가정을 꾸리고 나가 혼자가 된 지금이나, 그는 동네 반지하 방을 옮겨 다니며 생활했다. “친척들이 모아준 돈으로 보증금 200만원을 걸고 수급비 받아 월세 20만원씩 내는” 지금의 집은 지은 지 50년이 넘는 노후 주택이었다. “하루 종일 불을 켜야 해서 전기세가 솔찮이 나오고 안에 화장실이 없어(세입자용은 마당에 설치) 적잖이 불편”했지만 “돈 없는 노인이 몸뚱이 의지하는” 집이기도 했다. 열심히 쓸고 닦으며 습하고 어두운 방을 깨끗하게 유지했으나 문에 물막이가 없는 집은 ‘작은물’에도 언제든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지난해 11월15일 그 집으로 한 건축사(성동구건축사회 소속)가 찾아왔다. 점검표를 들고 집의 구조를 살폈다. 1972년 건물을 지을 당시 의무 규정(1962년 건축법이 제정돼 지하층 설치 의무화)에 따라 만든 방공호를 시간이 지난 뒤 방으로 개조하고 다시 칸을 쪼개 세입자를 들인 경우였다. 그 반지하는 “예상보다 더 열악”(박병걸 건축사)했다. “세입자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했을” 공간이란 사실을 고려해도 그랬다. 그는 “출입구에 차수설비가 없고 채광과 환기가 부족”해 안전(침수 등)과 건강 환경이 “불량”하다고 조사보고서에 적었다. “너비 80㎝에 높이 1m의 차수판과 제습기·환풍기 설치가 필요”하다는 내용도 써넣었다.

4개월 뒤인 지난 22일 서울 성동구청 공무원들이 다시 그 집을 방문했다. 보고서를 토대로 집을 확인한 뒤 임대주택 이사를 권하며 절차를 돕겠다고 했다. 미옥씨도 “전기세 놓고 집주인과 다투기 숨차다”며 이사를 원했다.

성동구는 현재 서울주택도시공사(SH·에스에이치)와 그의 이주를 협의 중이다. 오는 11월 반지하 계약 만료 시점까지 송정동 내 안전 주택을 알아보되 지역을 넓혀 임대아파트도 물색하고 있다. 이사 전 닥칠 수 있는 침수 피해 등을 대비해선 차수시설과 재난안전설비를 우선 설치하기로 했다.

“왜 그런지 모르겠어.”

미옥씨는 “밖의 아저씨”를 걱정했다. “너무 째깐하고 컴컴해서 안에서 사람이 죽어도 모르는 집”이 같은 건물의 ‘밖’에 있었다.

“조금이라도 나은 방으로 옮기라고 해도 싫대요.”

골목과 접한 외벽에 높이 1m(가로는 1m 미만)의 새시 문이 있었다. “어린아이도 통과하기 힘든 크기”(박병걸)였다. 누군가 사람 사는 집이라고 알려주지 않으면 잡동사니를 보관하는 창고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가에서 그 문을 열고 몸을 말아 계단을 내려가야 빛 하나 없는 방(월세 10만원)이 나왔다. 세숫대야와 휴대용 가스버너, 프라이팬, 소화기 등이 계단 아래에 쌓여 있었다. 환기가 안되는 그 집에서 “밖의 아저씨”(60)는 그 작은 문을 골목 쪽으로 늘 열어두고 지냈다. 집이랄 수 없는 그 집을 보고 공무원들도 놀랐다. 물이 그 작고 좁은 문을 찾아내면 침수는 불가피했다. 고쳐 쓸 수 있는 집이 아니었다. 방으로 내려간 공무원들이 생계·의료·주거급여 수급자인 그에게 장마 전 임대주택 이사를 설득했다. “이 지역 아니어도 어디로든 옮길 수 있다”며 그도 동의했다. 성동구는 그를 에스에이치와 연결한 뒤 이 공간을 더는 주거용으로 임대하지 못하도록 유도할 방침이다.

중랑천의 굴곡을 따라 ‘뒤집은 니은자’ 모양으로 휘어진 송정동엔 아파트 단지가 둘뿐이었다. 1970·80년대에 건축업자들이 땅을 99㎡(30평)~132㎡(40평) 안팎으로 잘게 잘라 지은 다세대·다가구 주택들이 가옥의 다수를 이뤘다. 그 집들 사이에서 “밖의 아저씨” 반지하 방과 똑같은 건축물이 대각선으로 150m 거리에 있었다. 전입신고 되지 않은 중국인 세입자 3명이 살았으나 장기 부재 상태였다. 집주인은 “(세입자들이) 지방에서 일하며 짐만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사람이 살기 힘든 그 구조가 골목 곳곳에서 눈에 들어왔다. 박성식 성동구건축사회장은 “동일한 건축업자가 같은 도면으로 지은 건물들”로 추정(3월15일 현장)했다.

“방범창이 비개폐식이라 위기가 닥쳤을 때 저 작은 출입구가 막히면 탈출이 불가능해요.”

국내 첫 반지하 현장 전수조사

물이 노리는 집을 물보다 먼저 찾아내는 일은 생명을 두고 벌이는 차별과의 경쟁이었다.

그때까지 본 적 없는 물이 ‘그 집들’로 찾아갔다. 지난해 8월8일 저녁 하늘은 물의 차지였다. 서울 한복판 도로에서 사람들이 세찬 물살에 떠내려갔다. 폭탄 같은 폭우(저녁 8시5분~9시5분 시간당 강수량 141.5㎜, 80년 만에 최고)에 놀란 임경지 성동구 청년정책전문관(구정연구기획단 소속)은 퇴근하다 말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컴퓨터를 켜고 두장짜리 긴급 보고서를 썼다. 운영 중인 ‘폭염 안전숙소’를 ‘사계절 안전숙소’로 전환해 침수 피해 주민들에게도 개방하고 반지하·옥탑에 대한 성동구의 독자적 전수조사가 필요하다는 내용 등을 담았다. 절차를 따를 틈이 없어 정원오 구청장에게 밤늦게 구두보고를 했다.

지난해 8월9일 윤석열 대통령과 오세훈 서울시장이 전날 침수 피해로 가족 3명이 숨진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반지하 주택을 내려다보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그 시각 관악구 신림동에선 가족 3명이 물에 잠긴 반지하에서 탈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열리지 않는 방범창과 현관 앞을 가로막은 물의 압력에 막혀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 이튿날 아침 뉴스로 전해졌다. 동작구 상도동에서 반지하 집을 빠져나온 주민이 반려 고양이를 구하러 되돌아갔다가 사망한 사실도 알려졌다. 그날 청년정책전문관은 두번째 보고서를 작성했다. 침수방지시설 설치와 풍수해보험 가입 의무화 등을 보태 구청장에게 재보고했다. 성동구엔 침수 피해가 없었지만 임기제 공무원으로 임용되기 전 청년주거운동(민달팽이유니온 위원장)을 했던 경험이 열악한 주거 현장의 위기 상황에 빠르게 반응하도록 등을 밀었다.

폭우 사흘째 날 서울시가 반지하 대책을 발표(8월10일)했다. 최장 20년간 순차적으로 반지하 주거지를 없애는 일몰제와 20만호 전수조사 등을 뼈대로 했다. 성동구 구정연구기획단은 서울시 계획을 반기며 일몰제 연착륙 방안을 마련했다. ‘비적정주거건축물’이란 개념을 신설해 거주 부적합 건축물의 규제를 강화하되 용도변경을 지원하는 안을 당일 보완했다. 서울시는 10월5일 후속 대책을 냈다. 두달 만에 앞선 대책을 스스로 꺾었다. 전수조사 계획을 중증 장애인 등을 우선 대상으로 한 표본조사로 바꿨다. 10월14일 국정조사에서 오세훈 시장은 “의지가 앞섰다”고 했다.

성동구는 자체 전수조사를 추진했다. 재난에 선제 대응하려면 현장 실태조사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반지하 수를 파악(행정 데이터만으로도 가능)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람이 살 수 없는 반지하를 찾아내는 것이 목적”(임경지 전문관)이었다. 그동안 정부와 자치단체의 반지하 대책은 침수 뒤 피해 가구나 취약계층 위주의 선별 지원이었다. 9월1일 정원오 구청장은 관내 반지하 건물 전체를 대상으로 한 방문 조사를 결정했다. 중앙과 지방 정부 통틀어 처음이었다. 침수 위험뿐 아니라 건강 환경(환기나 채광 등)도 조사 영역에 넣었다. 물이 삶의 격차를 이용하지 않도록 방어벽을 세우는 행정 실험은 ‘물의 도시’에서 이렇게 시작됐다.

그 도시 ‘도성의 동쪽’.

성동은 물로 둘러싸인 들녘이 있던 땅이었다. 종로구와 중구를 관통해 땅의 북쪽에 이른 청계천은 포물선을 그리며 남하해 중랑천과 만났고, 북에서부터 도봉·노원·동대문구를 타고 내려온 중랑천은 청계천을 합친 뒤 남서쪽으로 빠져나가 한강에 닿았다. 두 물줄기를 끌어당겨 세를 불린 한강은 땅의 남단을 경계 지으며 강남과의 사이를 냈다. 강과 하천이 파고들고 에워싸고 가로지르는 그 땅(25개 자치구 중 21번째 크기인 16.9㎢)은 서울에서 가장 긴 수변(총 14.2㎞)을 가진 행정구역이 됐다.

물난리는 그 땅의 숙명이었다. 천변에 집을 짓고 살던 사람들이 홍수만 만나면 세상이 무너지던 때가 있었다. 하천을 낀 동네들(마장·용답·사근·송정)은 동사무소에서 양수기 수십대씩을 준비해두고 집마다 돌며 물을 퍼올리던 시절(<성동아, 마실 가자!>, 성동구 발행)을 살아냈다. 물을 다스리는 기술이 발달하고 범람은 드물어졌지만 시대와 지역에 예외 없이 물의 표적은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반지하 현장 전수조사는 큰물이 다시 덮치기 전에 물로부터 표적을 지켜내기 위한 행정의 첫 단계였다. 성동구가 미옥씨와 “밖의 아저씨”와 중국인 세입자들의 집을 찾아낸 과정은 조사 규모를 추출하는 데서부터 출발했다. 건축과가 임무를 맡았다.

전국의 반지하 32만7320가구 가운데 61.4%인 20만849가구가 서울에 살고 있었다. 성동구에선 그중 4.5%(5510가구)가 지표면 아래에서 생활했다. 2020년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5년 단위 전체 가구의 20% 표본조사)가 알려주는 이 정보는 그 집들의 구체적 상태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건물의 위치·형태나 사용 방식에 따라 상황이 모두 다르므로 현장조사를 거쳐 통계를 검증해야 개별 집마다 정확한 필요를 파악할 수 있”(윤기수 건축기획팀장)었다.

건축과는 행정시스템 등을 활용해 관내에 등록된 반지하 주택을 모두 뽑았다. 1927년부터 2018년까지 사용 승인된 5279채가 확인됐다. 이 집들의 주소와 과거 침수 흔적도, 건축물대장 등을 대조해 조사의 우선순위를 나눴다. 저지대나 침수 이력이 있는 지역의 집들과 3분의 2 이상이 땅에 묻힌 집들을 먼저 확인했다.

서울시 성동구의 반지하 현장 전수조사에 참여한 최중엽 건축사가 한 산동네에 위치한 반지하 방을 살펴보고 있다.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보물 찾듯 찾아야 보이는 집들

“어디서 오셨어요?”

꼭대기까지 올라오느라 차오른 숨을 고르자 주민들이 물었다. 꼭대기 건물의 밑단을 살펴보고 있던 최중엽 건축사가 “반지하 실태조사 하러 구청에서 나왔다”고 설명(3월15일 <한겨레>와 조사 현장 동행)했다.

성동구는 조사 실무를 건축물의 상태를 읽어낼 수 있는 전문가들(성동구건축사회)에게 의뢰했다. 구에서 확보하고 있던 재난기금(2억2천만원)을 재원으로 사용했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14명의 건축사가 한 명당 377채씩 나눠”(박성식 회장) 맡았다. 구청에서 제공한 도면과 대축척지도 등을 들고 17개 행정동으로 흩어졌다. 어떤 집들은 너무 우람해서 외면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지만 어떤 집들은 보물을 찾듯 찾지 않으면 눈에 띄지도 않았다. 도시가 파묻어 숨겨온 집들이 조사를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요? 여기가 얼마나 심각하냐면 말이에요.”

잘 만났다는 듯 주민들이 말을 쏟아냈다. “계단 밑도 파이고, 담장도 허물어지고, 위험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고 했다. “언제 무너질지 몰라 사람들 못 다니도록 띠를 둘러 막아놨으니 빨리 재개발이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며 건축사를 쳐다봤다. 솟아오른 아파트들이 동네 아래에서 즐비했다.

왕십리역에서 한양대학교를 끼고 돌다가 오르막 샛길로 빠지면 닿는 마장동의 한 달동네였다. 같은 산에 의탁한 같은 마을이었지만 달과 가까워질수록 파손됐거나 파손 중인 집들이 늘어났다. 낡은 건물 구석마다 반지하 방들을 품고 있었다. 최중엽 건축사가 좁은 계단을 내려가며 “이 동네에서도 가장 열악했던” 방으로 안내했다.

건물이 절벽과 접한 쪽에 그 집은 있었다. 건축물대장에선 하나인 공간이 여기서도 3개의 반지하로 나뉘어 있었다. 담쟁이가 출입문을 타고 그림을 그린 방에서 뜯긴 싱크대와 버리고 간 옷장이 방치돼 있었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는 빈방들(폐가로 분류)이었다.

침수보다 우려되는 것은 붕괴였다. 집을 받친 바닥에 금이 가 있었다. “건물이 흘러내리면 아래쪽 집들을 덮칠 수도”(최중엽) 있었다. “떠날 사람들은 모두 떠났고 떠날 수 없는 사람들과 싼 방을 찾는 대학생들이 간간이 세를 얻어 사는”(주민) 집들이었다. “건물 안전을 고려해 즉각적인 조치가 요망”된다는 문장이 보고서 ‘종합의견’에 담겼다.

순탄한 조사는 아니었다. 거주자들 대부분이 일하러 나가 집을 비웠다. 집을 둘러보는 낯선 사람들을 향한 의구심 탓에 구청에서 ‘공무수행’ 조끼를 지원받아 입었다. “결과적으로 외형조사 위주로 조사가 진행될 수밖에 없는 한계”(윤기수 팀장)가 있었다.

건축사들은 3개월(지난해 9~12월) 만에 모든 조사를 마쳤다. 성동구가 결과를 집계했을 때 전체 현장을 확인해야만 얻을 수 있는 숫자 하나가 도출됐다.

3823.

조사 대상 5279채 가운데 철거·폐쇄돼 사라진 165채와 비주거 1291채를 걸러낸 결과였다. ‘허수’(1456채)를 불어 날리자 데이터가 ‘의미’를 남겼다.

반지하 방이 가장 많은 지역은 송정동(허수까지 포함했을 때는 용답동)이었다. 3823채 중 502채가 분포했다. 성수2가1동(490채), 용답동(465채), 마장동(338채), 금호2·3가동(334채)이 뒤따랐다. 전체 17개 행정동 반지하의 55.7%(2129채)가 5개 동에 몰려 있었다. 다가구·다세대 주택 밀집지들이었다.

역대 침수피해 다발지역(주로 하수 역류가 원인)과도 겹쳤다. 2010~2022년 성동구의 주택 침수 건수는 용답동(136), 행당1동(73), 성수2가1동(42), 송정동(28) 순이었다. 성동구가 2013년부터 하수관로 개선과 침수방지 공사를 이 지역들에 집중(그 결과 그해부터 침수 피해 급감해 2019년 이후 0건)한 이유였다.

3823채 중에서 1986~1995년 지어진 주택은 2836채(74.2%)였다. 1984년 정부가 건축법을 고쳐 지하층 기준을 완화(층고의 3분의 2 이상이 지하에 위치→2분의 1 이상)하면서 주거용 반지하가 급증했던 현상이 이 데이터에서도 확인됐다.

성동구는 3823을 다시 좁혔다.

평가를 반영해 개별 반지하마다 등급을 매겼다. A+(1852채), A(양호·1491채), B(시설 보완·470채), C(시설 수선·5채), D(거주 부적합·5채)로 나눴다. 조사보고서를 놓고 건축사들과 성동구가 논의해 최종 결정했다. 분류 결과를 토대로 지원(차수판, 하수역류 방지장치, 개폐식 방법창, 환기팬 등)이 필요한 반지하 주택을 1453채로 추렸다. “이 숫자를 갖게 됐다는 사실이 전수조사의 가장 큰 의미”(박미정 주택정책팀장)였다. 물이 노리는 집의 숫자였다.

지난해 8월11일 경기도 군포시 산본1동의 한 반지하 주택에서 사흘 전 집중호우 때 몰려드는 물을 피해 방범창을 부수고 탈출한 흔적이 남아 있다. 연합뉴스

가난한 세입자 지우지 않는 ‘발전’

주택정책팀(도시관리국 주택정책과)은 그 숫자를 줄이기 위해 올해 1월1일 신설된 조직이었다. 오는 6월까지 우기 전 ‘침수방지 응급처치’ 완료가 사업의 1차 목표였다. 대상 가구들한테서 우편과 문자로 신청 접수를 받았다. 거주는 세입자들이 하지만 시설 설치는 집주인들의 동의가 있어야 했다. C·D등급(앞서 언급된 주거 현장은 모두 D등급) 반지하들은 구에서 직접 연락했다. 거주자들에겐 이주를 설득·지원하고 소유자들에겐 폐쇄 때 리모델링 지원 등의 방향을 설명했다. 두 등급의 거주민들(집주인 자녀 포함)은 전원 세입자였다. 소유자 중엔 제주에 주소지를 둔 회사와 용산구 주민도 있었다. 주택의 평균 나이는 각각 35년(C)과 45년(D)이었다.

초기 접수 건수는 예상외로 많지 않았다. 무료 지원이므로 신청이 순조로울 것이란 기대와는 달랐다. 반지하 분포를 고려했을 때 성수2가1동(2위)의 신청률이 특히 떨어졌다.

“너무 뻑뻑해서 말이지.”

에어컨 실외기와 스티로폼 상자들이 햇빛의 출입을 차단한 창문 앞에서 길고양이가 밥그릇에 입을 비볐다. 고양이에게 밥 먹을 자리를 내준 창의 안쪽에선 최대형(가명·76)씨가 5년째 살고 있었다. 사람에게 좋은 햇볕은 식물에게도 좋고 빨래에게도 좋고 상자 더미에게도 좋았다. 한 줌 햇빛을 둘러싼 경쟁에서 그는 자진 철수했다. “열어놨다가 행여 창틀이 건물 무게에 눌리면 다시 닫을 수 없”을까봐 “아예 여는 걸 포기한 창문”이었다. 주인에게 고쳐 달라고 하기엔 그로서도 집의 남은 수명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마용성’의 일원인 성동은 서울에서도 부동산 열기로 가장 뜨거운 도시였다. 지난해 1월1일 기준 개별공시지가 상승률(전년도 대비 14.57%)은 25개 자치구 중 1위였다. 열기의 중심엔 성수동이 있었다. ‘붉은벽돌마을’(준공업지역의 옛 공장들이 카페·문화공간으로 변신)에서 연무장길로 이어지며 거리 곳곳을 리모델링하느라 떠들썩한 소리는 뚝섬로 아래로 내려가면서 잦아들었다. 오래된 다세대·다가구 주택으로 채워진 ‘성수전략정비지구’의 시간은 뚝섬로 위쪽과는 다르게 흘렀다.

최대형씨는 ‘정비지구’의 어느 모퉁이에 살았다. 그는 성수동에서 태어나 평생 성수동을 떠나지 않았다. “한때 단독주택을 지어 살았는데, 장사가 안돼 집을 팔고 연립주택으로 옮겼다가, 흘러흘러 여기 반지하까지 왔”다. “엘에이치(LH·한국토지주택공사)에서 지원받은 돈으로 보증금(7천만원)을 냈지만 그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곳은 지하뿐”이었다. “창문을 열 수 없어 환풍기를 달아야 했는데 환풍할 데가 없어” 그가 “화장실에 직접 달았”다. 그는 아침에 집을 나와 자기 전에 들어가는 방법으로 탁한 공기를 견뎠다.

구청 공무원들이 찾아가 임대주택으로 이사하길 권했을 때 그는 거절했다. “마지막까지 고향에 있고 싶다”고 했다. 그는 경로당에서 총무 일을 보고 있었다. 지역사회 연결망에서 이탈하길 원치 않는 마음을 지켜주면서도 지금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는 방안을 성동구는 고심하고 있다.

서울시 성동구의 한 반지하 주택 창문 앞에서 에어컨 실외기와 스티로폼 상자들이 햇빛을 가로막고 있다. 성동구건축사회 제공

지난해 9월과 12월 두 차례 그의 집을 살펴본 조원준 건축사는 D등급을 부여했다. “개발 기대가 올라갈수록 집주인들이 세입자들의 주거환경을 개선하지 않고 방치하는 현상”을 그는 자주 목격했다. C·D등급 반지하 10채 중 4채가 성수전략정비지구에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 기대는 정치 지형의 변화에 따라 출렁였다. 2009년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의 ‘한강르네상스’ 사업과 물려 추진된 성수전략지구 재개발(53만㎡에 최고 50층)은 박원순 시장 때 35층으로 높이가 제한되면서 속도를 줄였다. 돌아온 오 시장이 지난 1월5일 층수 규제를 없앤 ‘2040 서울도시기본계획’을 발표하자 지역은 다시 달아오르고 있다. 성동구는 시설 개선 신청이 유독 적은 이 지역에서 반지하 주택 소유자들의 표본을 뽑아봤다. “강남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다수였고 ‘재개발이 예정돼 있는데 굳이 신청해야 하냐’는 반응들이 많았”(박미정 팀장)다.

성동구는 신청률을 높이기 위해 재개발조합들에 홍보 협조를 요청했다. 3월7일까지 230건이었던 신청 건수가 3월17일 928건으로 마감됐다. 신청 가구들을 대상으로 성동구는 4월부터 침수예방 시설을 설치(2단계)한다. 5월부턴 취약계층 심층면담조사를 실시(3단계)하고 면담 결과에 따라 냉난방시설과 위생시설 개선(4단계)도 진행한다.

도시 개발과 재개발은 가난한 세입자들의 자리를 지우며 나아가는 ‘발전’이다. 발전해야 할 것은 반지하를 없애는 기술이 아니라 반지하밖에 선택할 수 없는 사람들의 가난을 줄이는 정책이다. 집을 가진 사람들에게 ‘살기 좋은 성동’(구의 슬로건)이 될수록 집 없는 사람들에겐 ‘점점 살기 힘든 성동’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반지하 전수조사를 끌어간 정책 의지였다. 정원오 구청장은 말했다.

“반지하가 없어져도 또 다른 기형적 저렴주택이 가난한 사람들의 주거를 파고들 것이란 걱정이 있습니다. 가난을 없애는 일은 신도 못 하겠지만 기초자치단체로서 최저주거기준선을 높여줄 순 있다고 봤습니다. 주택정책의 권한을 가진 정부나 광역단체는 양질의 임대주택 공급을 늘려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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