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도대체 어떤 짐승인가 [독서일기]

장정일 2023. 4. 1.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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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의 길〉
낸시 프레이저 지음 장석준 옮김
서해문집 펴냄
ⓒ이지영 그림

낸시 프레이저의 〈좌파의 길〉(서해문집, 2023)은 초석적인 질문으로 시작한다. “자본주의는 정확하게 무엇인가?” 오랫동안 수없이 되풀이되어온 이 질문에는 이미 답이 나와 있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임금노동. 마르크스가 〈자본〉을 통해 이 정답을 찾기까지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은 ‘감춰진 장소’였다. 프레이저는 마르크스의 업적에 경의를 바치면서도 그것만으로는 자본주의가 무언인지 다 밝혀졌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한다. “감춰진 장소 이면에 감춰진 또 다른 장소”가 있다.

자본주의는 마르크스가 밝힌 것과 같은 ‘경제적 시스템’도 아니고,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열변했던 ‘윤리적 삶의 사물화된 형태’도 아니다. 봉건제를 경제적 시스템과 동일시하지 않듯이 자본주의 역시 경제적 시스템으로 환원될 수 없다. 자본주의는 경제 시스템보다 더 큰 ‘제도화된 사회 질서’이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이득을 획득하는 장소 또한 기업이나 공장 같은 공개된 경제 영역이 아닌 사회적 질서 그 자체로부터다(너무 크기에 ‘감춰진 장소’처럼 보인다). 자본주의는 공개된 장소에서는 고만고만한 이득(임금 착취)을 볼 뿐이며, 막대한 이득(수탈)은 감춰진 장소에서 얻는다.

감춰진 장소의 구체적 이름은 ‘비-경제화된 영역’이다. 이 영역은 더 많을 수도 있지만 프레이저는 이 책에서 네 가지로 압축했다. 먼저 자본이 무급 혹은 저임금으로 사용하거나 자연처럼 취급하는 사회적 재생산 영역, 즉 여성의 가내 노동과 돌봄 노동. 둘째, 한 푼의 돈도 지불하지 않고 수탈하는 자연. 자본가들은 숲·강·바다·공기 등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 자연으로부터 막대한 이익을 얻고, 개발로 인해 생겨난 지구적 기후위기, 생태환경 파괴의 피해를 일반 시민이나 국가에게 전가한다. 셋째, 인종주의와 제국주의를 이용한 제3세계 노동자들에 대한 수탈. 마지막으로 영토에 기반하지 않은 자본주의(자본가)가 정부 또는 정치에 개입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법을 만들 뿐 아니라 공적 권력을 빈껍데기로 만드는 것. 이런 상황에서 국민은 점점 국가와 정치를 믿지 못하게 되며, 이런 불신은 포퓰리즘이나 민족주의라는 부메랑이 되어 다시금 정치와 공동체를 파괴한다.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자본주의는 도대체 어떤 짐승인가? 우리는 자본주의 ‘경제적 시스템’을 가능하게 하는 ‘비-경제적’ 배경 조건을 논해야 한다. 이것들은 자본주의 ‘경제’의 특징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이다. 이 특징들을 자본주의가 무엇인지에 관한 이해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는 자본주의를 ‘경제 그 이상의 것’으로 다시 개념화해야 함을 뜻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재개념화는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 ‘사회주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니 의미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을 낳는다. 확장된 자본주의관은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확장된 인식이 필요함을 말해준다. 독자들의 일독을 바라며 힌트 삼아 한 문장을 옮긴다. “일단 우리가 자본주의를 단지 경제로만 바라보는 관점을 폐기한다면, 사회주의 역시 더는 대안적인 경제 시스템으로만 이해할 수 없다.”

정진희의 〈정체성 정치와 남녀 대립적 페미니즘〉(책갈피, 2023)은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자각하기 시작한 2015년부터 페미니즘에 대한 반동(backlash)이 감지된 2022년, 제20대 대통령선거 국면까지의 페미니즘 운동을 비판적으로 점검한다. 2015년부터 부흥했던 한국의 페미니즘은 정체성 정치와 남녀 대립적 페미니즘(=급진적 페미니즘)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확장적이지도 대중적이지도 못했다.

정체성 정치와 한국의 페미니즘

정체성 정치는 차별받는 사람을 쉽게 단결하게 만들지만, 차별을 직접 겪지 않은 사람들은 배제한다. 급진적 페미니스트만 해도 남성과 제한적·형식적으로 협력할 수 있지만 분리주의자들은 그렇지 않다. 2018년 ‘불편한 용기’가 주도한 불법 촬영 항의 운동, 2019년 비웨이브(워마드 주도)의 임신중단권 운동은 남성 참여를 원천 차단했고, 2020년 초에는 분리주의 페미니스트들이 트랜스젠더 입학생의 여자대학교 입학을 막았다. 이들은 생물학적 성차 때문에 남녀의 차이가 결코 해소될 수 없다고 전제한다. “만약 성별 차이가 생물학적 성차로 결정되는 것이라면 성평등을 위한 투쟁은 ‘해봤자’일 것이다. 이들은 성평등에 거스르는 사상을 바탕으로 성평등 운동을 하는 모순을 품고 있는 것이다.”

프레이저는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가장 큰 (첫 번째로 꼽은) ‘비-경제화된 영역’의 희생자가 여성이라고 말했다. 이 주장으로부터 여성 억압의 근원은 자본이지 남성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정진희가 지난 8년 동안의 한국 페미니즘 운동을 비판하는 요점도 이것이다. 남녀 대립적 페미니즘은 남성 일반을 여성 차별의 원인으로 보았기 때문에 “여성 차별을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나 작동 방식과 분리한다”. 한국의 여성운동은 정체성 정치를 떠나 “투쟁성(반자본주의적 급진성)과 물질성(유물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병철의 〈정보의 지배〉(김영사, 2023)는 〈투명사회〉(문학과지성사, 2014)와 똑같이 정보사회와 정보기술을 주제로 한다. 전작이 철학적 사유를 기반으로 정보사회와 정보기술에 대한 비판을 행했다면, 이번 책은 육성에 가깝다. 지은이는 헤겔도 푸코도 자기 시대를 생각(글) 속에 담았던 그 시대의 ‘저널리스트’였다면서, “철학자는 가차 없이 ‘오늘’을 다뤄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런 격앙은 어디서 왔을까.

〈투명사회〉가 처음 나온 2012년에는 ‘대안 사실’이니 ‘탈진실’이니 하는 괴상한 현상도 용어도 없었다. 이번 책은 거기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탈진실과 대안 사실은 숫자로 조합된 정보의 세계에서 나왔다. 정보는 무한히 축적되지만(빅데이터), 거기에는 이야기가 없다. 탈진실과 대안 사실은 아무런 이야기도 갖지 않은 숫자 위에 이야기를 보충한다. 원래의 이야기는 거짓을 말할 때조차도 항상 진실을 의식하며 만들어지지만, 숫자 위에 덧입혀지는 이야기에는 의식할 진실이 없다. 디지털 연결망이 더욱 촘촘하고 빨라질수록 탈진실, 대안 사실, 음모론, 타자 없는 독백, 공론상의 종족주의, 스마트한 인플루언서들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진다. 진실이 경합하는 상호 소통과 담론은 디지털 연결망 속에서 사라진다. 민주주의와 정치는 공론을 바탕으로 하고, 공론에는 느린 숙성과 객관화할 거리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 책의 부제 ‘디지털화와 민주주의의 위기’가 암시하듯, 빠르고 촘촘한 소셜미디어의 느림과 거리를 파괴함으로써 민주주의와 정치를 종료시킨다.

장정일 (소설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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