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포커스]'만우절 거짓말'처럼 떠나간 장국영 20주기…"시대를 앞선 배우"

김민수 기자 입력 2023. 4. 1. 07:02 수정 2023. 4. 4.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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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로 데뷔, 영화에서도 배우 이상의 역할
의상과 외모 등으로 독특한 의상·외모 선보여
2004년 4월1일 홍콩에서 팬들이 배우이자 가수였던 장국영의 사망 1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촛불을 들고 있다. 2004.04.01ⓒ AFP=뉴스1

(서울=뉴스1) 김민수 기자 = 2003년 4월1일, 가수이자 영화배우였던 장궈룽(장국영)이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났다. 그날은 만우절이었다.

사람들은 처음에 믿지 않았다. 만우절날의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내 장국영의 사망이 사실로 확인되면서 홍콩과 아시아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리고 다시 1일, 그가 떠나간 후 20년이 흘렀다.

홍콩 매체인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31일 보도에서 "20년이 지났지만 장국영의 유산은 전 세계의 팬과 창의적인 사람들, 퀴어 커뮤니티에 지속적으로 영감을 주고 있다"며 "스타의 독특한 재능과 카리스마 그리고 문화적 아이콘으로서의 그의 지속적인 영향력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며 고인에 대한 추모 기사를 게재했다.

장국영은 1956년 9월12일 홍콩에서 10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영국 북부 리즈 대학교에서 섬유직물관리학을 전공하다 졸업하지 않고 홍콩으로 귀국했다.

1976년 귀국 후 우연히 나간 홍콩 ATV 아시아 뮤직 콘테스트에서 아메리칸 파이(AMERICAN PIE)를 불러 2위로 입상했으며 이를 계기로 데뷔하게 됐다.

그는 생전 음악 앨범 40장을 발표했고 56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SCMP는 '가수' 장국영에 대해 "1980~90년대 광둥어 팝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고 연속으로 곡을 히트시켰다"며 "당시 유행이었던 일본 팝 음악을 중국식으로 해석했으며, 일부는 독창적인 작곡도 있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장국영은 일본의 전설적인 가희 야마구치 모모에를 동경했던 걸로도 유명하다. 야마구치 모모에가 은퇴 공연 당시 마이크를 바닥에 내려놓는 퍼포먼스를 장국영 또한 오마주 하기도했다.

가수 겸 배우였던 장국영은 저우룬파(주윤발), 청룽(성룡) 등과 함께 1980~1990년대 홍콩 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배우로 기억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아비정전' '동사서독' '백발마녀전' '금지옥엽' '패왕별희' '춘광사설' '해피투게더' 등의 작품이 있다.

장국영은 1986년 오위썬(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을 통해 영화 배우로 인지도를 높였다. 1987년 '천녀유혼'에서 왕쭈센(왕조현)과 훌륭한 '케미'를 보여준 후 아시아권 인기 스타로 부상했다.

홍콩의 가수이자 배우였던 故 장국영 ⓒ AFP=News1

◇암묵적인 커밍아웃…성소수자 인권에 영향 장국영은 1990년대 영화 속에서 여성적이거나 퀴어 캐릭터들을 훌륭히 연기하며 찬사를 받았다.

당시 비이성애적 성향(non-heteronormative)에 보수적이었던 홍콩의 상황을 감안했을 때, 장국영의 캐릭터 연기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현재는 그가 퀴어 패션의 아이콘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지만 당시 무대에서 그의 의상과 외모가 항상 대중에게 널리 인정받지는 못했다.

장국영과 함께 작업한 바 있는 영화감독 관진펑(관금붕)은 "콘서트에서 장국영을 본 기억이 생생하다"며 "그는 관객들에게 모자를 던졌지만, 잠시 후 모자가 다시 무대 위로 던져졌다"고 했다.

이어 "장국영은 나중에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며 꽤 슬퍼했다"며 "하지만 동시에 연예계에서 존경 받기 위해서 더 열심히 해야 겠다는 동기가 됐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장국영은 대중의 사랑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는 경력 전반에 걸쳐 어린이아 노인, 1999년 대만 지진 피해자를 지원했다.

그는 1989년 앨범 '살루트(Salute)'의 모든 수익금을 홍콩연예학원에 기부하기도 했다. 그가 사망한 후 유족들은 재능이 뛰어난 학생과 저소득층을 지원하기 위해 장학회를 설립했다.

장국영은 1989년부터 1995년까지 가수 활동은 중단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음악과 담을 쌓은 것은 아니다. 1994년 영화 금지옥엽의 주제가 '추'(追)를 불러 대만 금마장과 홍콩 금상장에서 상을 받았다.

음악 프로듀서인 추창헤이는 "영화에 그는 배우 이상으로 관여했다"며 장국영이 감독과 함께 자신의 녹음실에 들어와서 그 장면이 어떻게 찍힐지를 미리 상상해보곤 했다고 추억했다.

왕자웨이(왕가위) 감독의 1997년 영화 해피투게더에서 장국영은 량차오웨이(양조위)와 함께 새로운 출발을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사하는 홍콩 동성 커플로 출연했다.

실제로 장국영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직접 밝히진 않았지만 양성애에 관한 질문에 "만일 어떤 사람이 나를 좋아하고 나도 그 상대방을 좋아한다면,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중요치 않다"거나 타임지에 "나는 양성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어울릴 것"이라고 밝힌 바 있어 암묵적으로 커밍아웃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본인이 명확히 밝힌 바 없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2000년과 2001년, 장국영은 무대에서 프랑스 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의 의상을 입고 나온다. SCMP는 이 의상을 통해 "가수의 양성성에 주목했다"면서 "그의 양성애와 함께 그의 성정체성을 알리는 것은 대담한 시도였다"고 했다.

홍콩의 대표적인 비영리 LGBTQ 단체인 핑크 얼라이언스의 부회장이자 최고 경영자(CEO)인 제롬 유는 "장국영은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라며 "그는 당시 홍콩의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존재감을 보이게 하는 원동력이었다"고 평가했다.

가수이자 배우인 장국영이 사망한 다음날인 2003년 4월2일, 한 팬이 센트럴 비즈니스 지구의 만다린 호텔 밖에 꽃과 메시지를 놓고 있다.ⓒ AFP=뉴스1

◇거짓말 처럼 떠난 아시아의 별…정신질환 대한 사회적 인식 바뀌게 돼

한편 장국영은 2003년 4월1일 자신이 머물던 홍콩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의 24층에서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홍콩은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었고, 또 만우절이기도 했고 장국영의 비보를 처음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매년 4월 1일이면 이 호텔 앞에는 장국영의 오랜 팬들의 헌화가 이어진다.

SCMP는 "장국영이 만약 살아있었다면 67세였을 것"이라며 "그의 죽음은 지난 20년 동안 정신 건강의 중요성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높이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전했다.

홍콩 대학교 자살 연구 및 예방을 위한 홍콩 자키 클럽 센터장인 폴 입 시우파이(Paul Yip Siu-fai) 교수에 따르면 장국영이 사망했던 2003년 지역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18.6명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는 "지난 20년 동안 정신질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각이 개선됐다"면서 "장국영 사망을 다룬 당시 보도는 다소 선정적이었지만, 현재는 나아졌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전처럼 금기 사항은 아니지만 여전히 우울증 환자에 대한 지원은 충분치 않다"며 이에 대한 사회적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으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면 자살예방 핫라인 1577-0199, 자살예방 상담전화 1393,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kxmxs4104@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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