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언론 톺아보기] 익명보도 딜레마, 프랑스 언론의 노력

진민정 한국언론진흥재단 책임연구위원(파리2대학 언론학 박사) 입력 2023. 4. 1. 05:05 수정 2023. 4. 3.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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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언론 톺아보기]

[미디어오늘 진민정 한국언론진흥재단 책임연구위원(파리2대학 언론학 박사)]

우리사회에서는 진실을 보도한 언론이 명예훼손이나 인격권 침해로 민형사상 책임을 져야 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이로 인해 익명보도의 원칙이 법적으로 강요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다른 사회에서는 이 문제를 언론 윤리의 영역으로 맡겨놓고 있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마련한 프랑스 역시 마찬가지다.

법 조항이 부재한 것은 아니다. 1881년 언론자유법은 미성년 피해자의 신상 공개를 금지하고 있다. 미성년자가 법정에 서게 될 수 있는 심각한 사건이나 논쟁의 여지가 있는 사안을 보도할 때, 또는 취재원을 보호하고 싶을 때, 언론은 실명을 밝히지 않은 채 보도한다.

반면, 사법 사건에 연루된 사람의 초상권에 관한 엄격한 법적 조항은 없다. 수갑을 차고 있거나 경찰에 구금된 사람의 이미지를 게시하는 것을 금지할 뿐이다. 유죄 판결을 받은 이후에는 이들의 신상 공개가 가능하다. 다만 가해자의 신상 공개로 인해 미성년 피해자가 인지될 위험이 있는 경우에는 익명 보도가 원칙이다. 아울러 무죄추정의 원칙에 의해 대다수의 언론사가 기소 이전까지는 피의자나 피고인 이미지를 흐릿하게 처리해서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익명성은 일부 대중에게 용의자의 신상을 알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때때로 신상 파악에 성공한 네티즌들이 용의자의 SNS 계정에 몰려들어 비난을 가하는 사례도 있고, 이들의 신상을 공개하지 않는 언론에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인권만 중시한다며 항의하기도 한다.

물론 익명 보도 원칙이 늘 지켜지는 건 아니다. 1984년 벌어진 미제 납치 살인사건을 다룬 넷플릭스 다큐 <누가 어린 그레고리를 죽였나?>에서 보듯, 네 살 그레고리 빌맹의 실명은 프랑스 전역에 알려져 있다. 당시 언론은 무죄추정의 원칙도 미성년 피해자 보호 규정도 무시한 채 온갖 추측이 난무한 자극적인 보도로 '장사'를 하기에 급급했다.

이러한 '범죄 관련 인물의 익명성'이라는 까다로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부 언론, 특히 주요 지역 일간지를 중심으로 범죄 보도의 원칙을 업데이트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익명 보도로 인해 전혀 엉뚱한 사람이 범인으로 오해를 받는다거나, 혹은 특정 인종이나 국가, 공동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발생할 가능성에 대비해 다양한 방안을 고민하는 것이다. 프랑스 최대일간지 '우에스트 프랑스'와 프랑스 북부지역 일간지인 '라부와 뒤 노르'가 일례다.

▲ 취재기자. 사진=ⓒ gettyimagesbank

개별 언론이 관련 보도의 윤리 헌장을 마련한다 해도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얻은 사건을 보도할 때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할지 판단이 안 설 때가 있다. 이럴 때 합의를 끌어내는 단체도 있다. 파리의 법조 기자 200여 명이 합류한 '사법 전문 언론 협회'(APJ, 1887년 설립)가 그런 사례다.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언론인 단체 중 하나인 '사법 전문 언론 협회'는 언론의 관심끌기용 실명 보도에 강하게 반발하며 강력한 피해자 보호를 주장하는 단체다. APJ는 2005년, 45명의 아동이 성적 학대를 당한 '앙제 소아성애자 네트워크' 사건에서 미성년자의 신원을 보호하기 위해 피해자들의 이름 대신 이들의 출생일에 해당하는 성인의 이름을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반면, 소셜 네트워크에서 떠도는 근거 없는 소문을 종식시키기 위해 범죄자 신원을 공개하기도 한다. 2022년 12월 파리에서 발생한 총격 사건으로 쿠르드족 3명이 살해됐는데, 이 사건은 쿠르드족 이민자들의 엄청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용의자는 69세 백인 남성이었는데, 튀르키예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범인의 이름이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그래서 APJ는 그의 실명을 공개했다.

익명보도의 딜레마에서 자유롭기란 어느 사회에서나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익명성이 법적으로 강제되기보다는 언론 윤리의 영역일 때 관련 논의는 더 풍성해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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