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 다잉 5년… 164만명이 ‘연명치료 거부’ 의향서 썼다

김경은 기자 2023. 4. 1.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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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하는 죽음서 받아들이는 죽음으로

3년 전 손녀를 사고로 잃은 70대 최모씨는 인근 복지관을 찾아 사전 연명 치료 거부 의향서를 등록했다. 삶의 마지막 순간, 무의미한 치료를 중단하고 떠나겠다고 가족들에게 미리 밝히는 것이다. 최씨는 뇌사에 빠진 손녀가 마지막 한 달 반을 중환자실에서 고통스럽게 지내는 모습을 보고 의향서 작성을 결심했다. 그는 “심폐소생술을 반복하느라 갈비뼈가 부러지는데 숨이 잠시 돌아온 손녀는 ‘아프다’ 말 한마디 못 했다”며 “결국 가족들이 심폐소생술 거부를 서명하는 순간이 오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마지막 순간 그런 고통을 받고 싶지 않다”고 했다.

생전에 스스로 연명 치료 중단을 결정할 수 있는‘연명의료 결정법’이 최근 5주년을 맞았다. 31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 2월까지 연명 치료 중단 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이 164만4507명으로 집계됐다. 매년 30만명 이상이 연명 치료로 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내지는 않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오종찬 기자

◇ “무의미한 연명 치료 중단 ‘웰 다잉’ 첫 단추”

연명 의료 결정은 임종 단계 환자가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인공호흡기 착용 등을 중단·거부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지난 2008년 ‘김 할머니 사건’을 계기로 도입이 결정됐다. 당시 뇌사 상태인 76세 할머니의 인공호흡기를 뗄 수 있게 해 달라는 가족들의 소송에 대법원은 “현 상태만을 유지하기 위해 이뤄지는 연명 치료는 무의미한 신체 침해 행위”라며 “오히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해친다”며 가족 손을 들어줬다. 이후 관련 논의가 이뤄졌고 2018년 2월 연명 의료 결정 제도가 도입됐다.

누구든 건강할 때 사전 연명 치료 중단 의향서를 등록할 수 있고, 임종 단계 환자라면 담당 의사에게 연명 치료를 받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 환자가 의사 표현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환자 가족의 합의와 의료진 판단으로 연명 치료 중단이 결정된다.

전문가들은 “초고령화 시대를 맞아 ‘잘 죽는 법(웰 다잉 Well-dying)’을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사전 연명 치료 중단 의향서부터 검토해보라”고 조언한다. 건강하고 의식이 또렷할 때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멈추고 호스피스나 완화 치료를 결정하는 것이 ‘당하는 죽음에서 받아들이는 죽음’으로 가는 첫걸음이라는 의미다.

연명 치료 중단 의향서의 상담과 작성, 등록은 건강보험공단 일부 지사와 노인복지관 등에서 이뤄진다. 전국에 600곳이 넘는다. 국민연명의료관리기관 홈페이지(www.lst.go.kr)에서 지역별 등록 기관을 확인할 수 있다. 작년 말 기준 국내 65세 이상 고령층 8명 중 1명이 사전 연명 치료 중단 의향서를 썼다. 올해엔 누적 등록자 수가 200만명을 넘어설 전망이다.

◇”당하는 죽음에서 받아들이는 죽음으로”

삶의 마지막 순간을 존엄하게 보내는 ‘웰 다잉’을 위해선 몇 가지 준비할 것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정현채(68)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는 “엔딩 노트를 직접 작성해 보라”고 했다.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며 작은 자서전을 써보라는 것이다. 지난 세월 잊을 수 없는 사람을 떠올리고,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을 적으며 남은 시간의 계획표를 짠다.

재산을 어떻게 처리할지 미리 정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한다. 남은 가족들에게 불화의 씨앗을 남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사전 장례 의향서를 통해 자신의 장례 절차를 직접 정할 필요도 있다. 매장이든, 화장이든 결정 주체는 자신이라는 것이다. 보건복지부는 사전 장례 의향서도 연명 치료 중단 의향서처럼 공식 문서로 관리하겠다는 방침이다.

정현채 교수가 준비한 마지막 순간은 이렇다. 연명 치료 중단 의향서는 이미 써뒀다. 화학섬유 없는 무명옷을 입고, 종이 관에 누워 화장해달라고 했다. 장례식에 사용할 음악도 정해놨다. 유골은 인천 앞바다에 뿌려달라고 했다.

윤영호 서울대 가정의학과 교수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생의 마지막 단계인 노년기엔 거리낌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며 “‘웰 라이프(Well life)’의 종착지가 ‘웰 다잉’ 아니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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