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기억, 무대에 서다
얼마 전 점심시간, 동료들과 차를 타고 안산시청 근처에 짜장면을 먹으러 가는데 문득 거기서 A를 만나 4월16일의 상황을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한동안 드나들던 온마음센터도 근처다. 그걸 생각하다가 엉뚱한 곳에서 우회전을 해버렸다. 동료들은 와동 방향이니 메뉴를 바꿔 닭갈비집에 가자고 했다. 도착해보니 2015년에 연화의 어머니를 만나러 왔던 병원 앞 식당이었다.
그날 연화 엄마는 연화가 만들어준 팔찌를 차고 있었다. 연화는 가족들에게 생일케이크를 구워주는 솜씨 대장이었다. 네일 아티스트가 꿈이었는데 가장 좋아했던 네일 에나멜은 96번, ‘슈가젤리’ 색깔이다. 병원 근방 편의점에서는 연화의 절친 J를 만난 적이 있다. J는 내게 연화와 친구들이 시화공단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밀착’이라는, 뜨거운 기계를 다루는 업무에 손이 야무진 연화가 뽑혔는데 다들 부러워했다고 한다. ‘밀착’을 할 때는 특수 모자를 쓰기 때문에 바깥의 욕설이 들리지 않는다. 힘들었던 건 공장 업무보다 어른들이 수없이 내뱉는 욕설이었다. “저 사람들도 집에 가면 우리 같은 딸이 있을 거 아니야”라고 말하면서 나중에 저런 어른이 되지 말자고 다짐했다고 했다. 연화는 4·16 참사의 희생자였고 J는 생존자, 나는 ‘4·16단원고약전작가단’의 2학년 1반 소속 작가였다.
약전은 ‘간략하게 줄여 쓴 전기’라는 뜻이다. 4·16 참사 이후 별이 된 이들을 기리기 위해 소설가, 동화작가, 시인 등 138명의 작가가 모여 희생자들의 전기를 썼고 2016년 출간했다. 가족, 어릴 때 친구, 단골 가게를 찾아다니며 취재를 하다 보니 안산 구석구석을 다녔고 김포나 혜화에 갈 때도 있었다. 기억은 공동의 것이었다. 약전 작가들은 자신의 이름을 책에 넣지 않기로 했기에 이 무렵의 일은 함구하고 지냈다. 그러다가 최근 e메일 한 통을 받았다. 세월호 9주기를 앞두고 약전 작가들도 이름을 밝히며 추모 영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조명이 화사한 곳에 가서 울지 않고 내가 듣고 기록한 연화와 수진이에 대해 말했다. 그들은 그렇게 생기 넘치는, 빛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영화 <장기자랑>의 이소현 감독에게서 쪽지가 왔다. 4월5일 극장 개봉 소식이었다. <장기자랑>은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으로 구성된 극단 ‘노란리본’의 활동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주인공은 단원고 2학년 1반 애진 엄마, 3반 예진 엄마·윤민 엄마, 6반의 영만 엄마·순범 엄마, 7반의 동수 엄마·수인 엄마다. 그중 동수 엄마 김도현씨는 공학자가 되겠다던 아들이 남긴 로봇의 먼지를 닦으며 아픔을 달랜다. 그런 그에게 연극은 유족다워야 한다는 압박을 떨치고 일어서도록 도와주는 힘이다. 영화 속의 김순덕씨는 1반 생존 학생 애진의 엄마다. 애진이 담임은 고(故) 유니나 선생님이었다. 당시 27세였던 선생님은 5층 객실에 있다가 아래층으로 뛰어가 학생 19명을 탈출시키고 세상을 떠났다. 애진이는 지금 26세, 그때의 유니나 선생님만큼 성장해 응급구조사가 되었다. 유아교육과를 가려다가 참사를 겪고 진로를 바꿨다. 지금 경기도의 한 병원에 근무하며 다른 생명을 구하고 있다.
이렇게 기억들이 살고 있다. “울지 않기로 하면서” 살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당사자가 기록한 책 <바람이 되어 살아낼게>의 저자인 유가영씨는 2018년 생존자 친구들과 ‘운디드 힐러’라는 비영리단체를 만들었다.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의미다. ‘운디드 힐러’들은 재난재해를 겪은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곳곳에서 행동하고 있다. 오는 4월2일에는 2학년 3반 한은지, 신승희, 황지현 엄마가 ‘2023대구국제마라톤’에 참가해 ‘리멤버 0416’ 팀으로서 거리를 달린다. 이들이 활짝 피어나기를 바란다. 더 많은 이들이 영화 <장기자랑>을 보았으면 좋겠다. 유족다움은 없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고통에 대한 공감과 진실의 의무가 있다.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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