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고기 싫어하면 진보?
넷플릭스 인기 시리즈 <더 글로리> 열여섯 편을 하루 반 만에 ‘정주행’했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면서 김은숙 작가가 마지막까지 복잡하게 꼬아놓은 단서를 놓치지 않으려고 온 신경을 집중하다 보니 머릿속을 ‘리셋’한 듯 자잘한 일상사는 홀랑 지워졌다. 명불허전, 이름이 널리 알려진 데는 이유가 있다. 폭력이 인간의 영혼을 파괴한다는 보편적 주제와 함께 돈이 최고라는 물질적 세계관,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잔인한 태도, 첨단 디지털 문화와 무당굿이 공존하는 압축 근대에 이르기까지 익숙하면서도 낯선 한국의 모습이 펼쳐졌다. 지나치게 단순한 선악 구도를 현실이 아닌 우화로 이해한다면, 흡인력이 큰 작품이다.
그런데 며칠 지나자 주인공 문동은(송혜교 분)의 온몸에 화상 자국을 남긴 잔인한 학교폭력이 아니라 그가 김밥을 먹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첫 장면부터 복수의 대상인 연진(임지연 분)의 집을 바라보면서 김밥을 먹더니 복수를 준비하는 힘든 시간을 김밥으로 버텨내는 장면들이 계속 나왔다. 마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에서 소금이 안 들어간 음식(맛이 없어서 자신의 고난을 잊지 않도록 해주는 음식)을 먹어야 복수에 성공할 수 있는 것처럼 김밥을 먹었다. 언제 먹어도 맛있는 김밥은 최고로 효율적인 음식이기도 하다. 바쁜 업무에 쫓기는 직장인들은 ‘김밥천국’에서 끼니를 때우고, 학생들에게는 편의점 삼각김밥이 주식이니 한국인의 ‘솔푸드’라 할 만하다.
“당신이 먹는 것이 당신”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 몸의 세포는 음식을 재료로 삼아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진다. 피부는 35일마다 바뀌고 간의 교체주기는 한 달이다. 사는 곳마다 풍토와 식재료가 다르기에 다른 음식을 먹으면서 다른 문화를 일구어왔다. 예컨대 인구가 많은 인도에서 소를 못 먹게 한 이유는 채식에 비해 많은 자원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몸이 가벼운 만큼 영성이 강한 문화가 형성되었을 터이다. 냉장고와 수입식품 덕분에 제철음식과 향토음식의 개념이 사라진 지금, 음식에서 중요한 건 재료보다는 시간이다. 인스턴트, 레토르트, 밀키트, 배달음식, 집밥 등등.
봄이 되자 주변의 지인들이 텃밭 농사를 시작했다. 미래의 귀농을 착실히 준비하는 지인은 텃밭을 하면서 비료와 농약을 쓰지 않는 유기농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제대로 배워두려고 농부학교에 등록했다고 한다. 다른 지인은 아이가 태어나면서 기후와 환경 문제에 관심이 생겼고, 가족과 텃밭을 가꾸며 퍼머컬처(자연에 해를 끼치지 않는 영농방식)를 공부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불안의 시대, 자기 손으로 뭔가 키워서 먹는다는 건 위안을 준다. 무엇보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연과 더불어 살아왔기 때문에 본원적인 끌림, 생명애(biophilia)가 있다는 게 생물학자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의 통찰이다.
이들의 사연에 솔깃해져 얼마 전 나도 텃밭을 보러 갔다. 서울시나 구청이 운영하는 텃밭은 경쟁률이 너무 높아서 일찌감치 포기하고 북한산 자락에 사설로 운영되는 텃밭이 있기에 탐색차 나섰다. 텃밭 사무실이 비어있어 지나가는 주민에게 물어보자 저 앞 고깃집으로 가보라고 했다. 게르 모양의 텐트가 여럿 모여있는 고깃집(실제로는 고기를 파는 캠핑장)의 주인이 텃밭 주인이었다. 텃밭에서 키운 채소를 가져다 고기를 구워 먹는 편의시설이었다. 채소가 자랄수록 고기도 많이 소비될 터이다.
그러던 중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생태전환교육의 일환으로 채식급식(기후급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교사 모임에서였다. 진보 쪽 노옥희 울산시 교육감이 갑자기 타계한 이후 보궐선거가 진행되는데 보수 쪽 후보가 ‘고기급식’을 내세워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좀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라 유튜브를 찾아보니 정말이었다. “후보님 뭐 하세요?” “치킨 먹고 있습니다.” “후보님 고기 좋아하세요?” “아, 물론이죠.” “그럼 우리 아이들에게 일률적인 채식을 강요하는 비건급식 어떻게 생각하세요?” “맛있는 고기급식 마음껏 먹이겠습니다!”
아, 이제는 고기를 먹는 일도 정치적 대립구도가 되었구나. 고기를 좋아하면 보수, 고기를 싫어하면 진보. 도시농업과 채식급식을 약속했던 시장과 교육감의 시대가 지나가니 고기가 돌아오는 건가? 비건급식이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 자신의 몸과 동물의 권리, 기후위기를 생각하면서 채식 위주의 식단을 짜는 채식선택제가 맞다. 이것이 채식 가운데서도 가장 엄격한 단계인 비건급식이라는 말로 둔갑했다. 자라는 아이들에게 고기는 필요하지만 조금 덜 먹어도 좋겠다. 어른들도 텃밭 채소 그대로 먹으면 어떨까. 고기 싸 먹는 상추쌈 말고.
한윤정 전환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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