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서 미술 배운 이완석, 공예 통해 한·일 문화 교류 힘 써
━
황인의 예술가의 한끼
미술활동가 이완석(李完錫, 1915~ 1969)은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도쿄의 대성중학교를 졸업한 후 태평양미술학교에 다녔다. 전공이 디자인이라고 했으나 실제로는 서양화를 공부했다. 대성중학교가 위치한 스이도바시는 오차노미즈, 진보쵸, 간다 등과 이웃하는데 메이지대학 등 대학들이 몰려 있고 책방이 많은 학생가였다. 중학생의 신분으로 대중잡지 ‘킹구’의 삽화 아르바이트를 할 정도로 이완석은 그림 실력이 뛰어났다. 태평양미술학교는 니시닛포리에 있었다. 니시닛포리는 동경미술학교와도 멀지 않아 화가들의 아틀리에가 많았다. 전위적이며 도발적인 기운이 흐르는 곳이었다.
문화적 감수성이 뛰어났던 이완석은 스이도바시와 니시닛포리에서 벅찬 청춘의 시간을 보냈다. 이완석과 비슷한 시기에 태평양미술학교를 다닌 화가로 남관(1911~1990), 이인성(1912~1950), 손응성(1916~1976) 등이 있다. 1937년 무렵 서울로 온 이완석은 조고약으로 유명했던 천일제약에 입사해 오랫동안 패키지와 광고 도안 담당을 맡았다. 천일제약은 사옥을 1952년 천일백화점으로 개장했다. 천일제약에서 인정을 받은 이완석은 천일백화점의 지배인을 거쳐 1960년에는 사장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중학생 때 대중잡지의 삽화 알바도
천일화랑은 한국전쟁 이후 서울에 생긴 최초의 상업 화랑이었다. 개관기념전으로 동양화에 고희동, 김은호, 이상범, 이응로, 배렴, 장우성, 김영기, 이유태, 장덕, 정진철, 박생광, 이현옥, 김화경이, 서양화에 도상봉, 이마동, 김인승, 김환기, 이쾌대, 박영선, 박득순, 박고석, 윤중식, 이중섭, 장욱진, 한묵, 주경, 한홍택, 이세득, 권옥연, 이종무, 정규, 조병현, 박수근, 황유엽, 김두환, 최영림, 손응성이, 조각에 윤효중, 김경승이 출품했다.
1960년 12월, 아시아미술가 국제연합결성 예비회담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이완석, 청강 김영기, 김경승, 권영휴, 김순련 등은 타이베이로 향했다. 수화 김환기가 김포공항으로 나와서 배웅했다. 타이베이에 도착한 이완석은 서예가 우우임(于右任, 1879~1964)을 만나 글씨를 받았다. 서울 명동의 화교학교에 ‘한성화교소학’이란 초서체 현판글을 남긴 우우임의 필력은 여전히 힘찼다. 대만, 필리핀, 태국, 베트남, 홍콩, 싱가포르, 캄보디아를 여행한 뒤 마지막 일정으로 도쿄에 도착했다. 해가 바뀌어 1961년 2월 5일, 음력 설날이 되었다. 이십몇 년 만에 도쿄에 다시 온 감개무량의 이완석은 스이도바시에서 멀지 않은, 메이지대학 언덕의 야마노우에 호텔에서 서울 종로구 명륜동의 아내에게 다정한 편지를 썼다. 아내가 부탁한 수달피 목도리를 샀다는 뿌듯한 소식을 살짝 실어보았다.
1946년에 조선공예가협회 창립위원(회장 김재석)으로 참여한 바 있는 이완석은 공예에 관한 애정을 멈춘 적이 없었다. 1964년 2월에 천일백화점 안에 한국민예품연구소를 개설했다. 공예인들은 물론 수많은 미술인의 사랑방이 됐다. 우리의 옛 기물에 관심이 많았던 화가 권옥연, 정규, 미술평론가 석도륜, 이경성 등이 자주 드나들었다. 일본의 명문 일고 출신으로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했던 석도륜은 베품과 인품의 교양인 이완석을 평생 존경했다.
조선공예가협회 창립위원으로 활동
민예는 야나기 무네요시(1889~ 1961)가 창안한 말이다. 이완석은 야나기 무네요시가 도쿄 고마바에 세운 일본민예관에서 발행하는 민예 160호(1966년 4월호) ‘한국의 민예’ 특집에 ‘한국의 민예품에 대하여’를, 민예 189호(1968년 9월호)에 ‘아사다 다쿠미의 묘’라는 글을 썼다. 이완석은 한국과 일본의 교류와 우호를 도모하는 단체인 일한친화회에서 발행하는 친화 145호(1965년 12월호)에 ‘한국민예품전을 앞두고’를, 또 친화 177호(1968년 8월호)에는 다쿠미의 무덤 찾기에 대한 내용의 ‘망우의 사랑’이란 글을 썼다. 이완석은 공예를 통한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교류에 지극했다. 드디어 1966년 3월 15일부터 20일까지 ‘한국민예품전’이 도쿄 니혼바시 미쓰코시 백화점 전시장에서 열리게 되었다. 주최는 일본민예협회, 일한친화회, 한국민예품연구소이고 협찬은 주식회사 타쿠미가 맡았다.
이완석은 자식들에게 자상했다. 주말이면 가족들을 위해 손수 스키야키 요리를 했다. 그는 도쿄에서 유학했지만 소고기와 간장에다 배추, 대파 등 야채를 넣어 자작하게 졸여 먹는 관동식 스키야키가 아닌 간장과 청주에 설탕을 녹인 흥건한 국물에 배추, 파, 두부, 당면, 곤약 등을 푸짐하게 넣은 관서식 스키야키를 좋아했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스키야키였다. 짭짤하게 익은 부드러운 소고기를 날달걀에 찍어 먹는 재미가 좋았다. 이완석은 옷감을 사다가 딸들의 옷, 가방을 디자인하는 걸 좋아했다. 이완석의 장녀 이숙영(1947~2010)은 아버지를 몹시 따랐다. 1969년 8월, 이완석은 일본에서 온 한국사료연구소장 김정주를 시내에서 만나 점심을 먹었다. 소고기 전골에 차가운 맥주를 마시고는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졌다. 집으로 돌아가 그 길로 영면에 들었다.
김태성 이숙영 부부는 1978년 4월, 인사동에서 예화랑을 열었다. 개관전으로 김태성의 가계와 인연이 깊은 서화협회의 화가들이 중심이 된 근대명가서화전을 열었다. 안중식, 조석진, 정학교, 강진희, 김응원, 오세창, 김규진, 김태석, 김용진 등 16인의 작품이 출품되었다. 그해 시월에는 이숙영의 부친인 이완석과 관련이 깊은 서양화가들로 구성된 전시회가 열렸다. 정규, 도상봉, 박수근, 구본웅, 김환기, 손응성, 한묵, 권옥연, 남관, 임직순, 김흥수, 이세득, 이성자. 유영국 등 18명이 작품을 출품했다. 김태성의 가계는 1887년 보빙사 일행으로 미국에 가서 이듬해 볼티모어의 기찻길을 문인화 기법으로 사생한 서화가 강진희(1851~1919)로 이어진다. 이완석의 외손녀 김방은이 온축과 창신으로 강남 신사동에서 예화랑을 이끌고 있다.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