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가사도우미가 ‘현대판 노예’?

표태준 싱가포르 특파원 2023. 4. 1. 00: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외국인 가사도우미가 ‘현대판 노예’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23일 오후 싱가포르 ‘부킷티마 쇼핑센터’에 있는 한 가사도우미 소개소에서 동남아 출신 여성들이 가사도우미로 구직하기 위해 서류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표태준 특파원

지난달 29일 싱가포르에서 일하는 외국인 가사도우미들을 인터뷰하러 가기 전 이러한 내용을 포함한 질문지를 준비했다. 합계출산율이 0.78명으로 곤두박질치자 한국에서도 싱가포르나 홍콩처럼 저임금 외국인 가사도우미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논의가 시작됐다. 그러자 정의당 등 야권과 노동계는 이를 ‘인종차별’ ‘현대판 노예제도’ 등이라 칭하며 거세게 반발했다. 실제 외국인 가사도우미들의 생각이 궁금했고, 별다른 고민 없이 ‘현대판 노예’라는 단어도 질문지에 넣은 것이다.

23일 오후 싱가포르 부킷티마에 있는 한 가사도우미 에이전시에서 미얀마 출신의 아웅쑤저(32)씨가 서류 작업을 하고 있다. 남편과 6년 전 싱가포르로 넘어온 그는 "쿠데타 등으로 고향 상황이 좋지 않은데, 싱가포르에 머물며 돈을 모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표태준 기자

이날 찾은 싱가포르 한 가사도우미 소개소 앞에는 필리핀 출신 A씨가 지인들과 의자에 앉아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인터뷰를 흔쾌히 허락한 그는 싱가포르인 부부 집에서 4년간 일했다고 했다. 고용주 자녀들 등교를 도우려 오전 5시에 일어나는 게 힘들지만 일은 어렵지 않다고 했다. 다른 가사도우미들처럼 돈을 모아 본국에 돌아가 집도 사고 차도 사고 가족도 챙기는 게 목표라고 했다.

그렇게 인터뷰를 이어가다 질문지에서 ‘현대판 노예’라는 단어를 보고 기자는 새삼 당황했다. 좀 더 잘사는 나라 사람의 오만과 위선, 편견이 이 단어에 집약됐다는 사실이 그제야 피부에 와 닿은 것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타국에서 분투하는 이에게 이는 질문보다 언어폭력에 가깝다 생각했다. 낯이 뜨거워 말문이 막혔고, A씨의 인적 사항도 묻지 못한 채 황급히 자리를 떴다.

싱가포르에서는 만 23~50세의 8년 이상 교육(중학교 2학년)을 받은 외국인 여성이 가사도우미로 일할 수 있다. 이곳 가사도우미 상당수가 가난으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여성들이다. 이날 만난 한 미얀마 출신 가사도우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6년 전 싱가포르에 온 그는 이제 월 800싱가포르달러(약 78만원)를 받으며 일한다고 했다. 미얀마 월평균 1인당 국민총소득(약 12만원)의 6배가 넘는다.

이처럼 이들은 본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던 월급을 이곳에서 받는다. 억지로 끌려와 임금 차별을 당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인생을 바꿀 기회를 찾아온 것이다. 동시에 싱가포르 맞벌이 부부들은 가구 수입의 10분의 1 정도로 부담 없이 가사도우미를 고용해 고충을 던다. 서로 ‘윈윈’인 계약 관계다. 한국처럼 맞벌이 부부 한 사람 월급 대부분을 가사도우미 비용으로 내야 했다면, 싱가포르에 26만명의 가사도우미가 고용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한국에 외국인 가사도우미 제도가 도입되면 노동 착취, 불법체류자 양산 등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 공감한다. 많은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외국인 가사도우미에게 임금을 차등 적용하자는 주장을 단편적으로 해석해 ‘노예제도’ ‘인종차별’ 따위의 막말을 쏟아내는 일은 멈추길 바란다. 그 말이야말로 가장 차별적인 말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