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 코리아] ‘딸배’라 불리는 사나이
몰래 신고하는 ‘딸배헌터’도
시민 돕는 정의의 기사처럼
이제는 법 지키며 달립시다
우리나라 국조(國鳥)는 무엇인가. 치킨이다. 우리의 소원은 무엇인가. 빨리빨리. 우리는 어떤 민족인가.
배달의민족을 도로에서 자주 마주치곤 한다. 적색등이 들어왔고, 여느 때처럼 나는 정차 중이었다. 오토바이 한 대가 앞에 끼어들었다. 이윽고 한 대, 또 한 대. 하나같이 뒤에 큼지막한 배달 가방이 달려 있었다. 도합 세 대의 오토바이는 잠시 좌우를 살피더니, 한날한시에 죽기를 맹세한 유비·관우·장비처럼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빨간불 따위가 어찌 장부의 앞길을 막겠는가. 자못 비장하기까지 한 장관이었다. 범칙금 신고 대신, 나는 그들의 안녕을 기원했다.
신호 위반은 애교 수준이고, 엽기에 가까운 곡예 운전도 빈번하게 벌어진다. ‘배달’을 뒤집은 속칭 ‘딸배’가 이들의 별명이 된 이유다. 얼마 전 대전에서는 오토바이 안장 위에 곧추서 서커스하듯 도로를 달린 50대 배달원이 검거됐다. 캄캄한 밤이었다. 21일 시민들이 촬영해 올린 영상을 봤더니, 마상 무예의 한 장면 같았다. 경찰 조사에서 이 남성은 “운전하다 몸이 피곤해 스트레칭하려고 그랬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달리는 말 위에서 먹고 잤다는 기마민족처럼, 과연 차원이 다른 노련함이다. 그러나 사고 안 난 게 다행이다. 다른 사람 인생을 나락으로 직송할 뻔했다.
그러자 ‘딸배 헌터’가 등장했다. 교통법규를 우습게 아는 전국의 불량 ‘딸배’를 참교육하는 유튜버인데, 헬멧도 번호판도 없이 인도 주행과 역주행까지 불사하는 배달 기사들을 신고해 금융 치료를 선사하며 유명해졌다. 영상 제목만 봐도 내용을 대략 유추할 수 있다. 미성년자 딸배의 최후, 경찰 따돌리는 딸배의 최후…. 지난 2월 부산에서는 범칙금 2억원어치인 약 5000건 신고라는 기염을 토했다. “당신이 진정한 애국자” 같은 댓글이 민심을 보여준다. “당장은 밉겠지만 결과적으로 딸배 목숨을 구하는 선행”이라는 반응도 많다. 약간의 정화 효과도 생겼다. 횡단보도에서 내려 오토바이를 끌고 걸어가는 배달 기사들이 속속 목격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폭주에도 사정은 있다. 더 뛰어야 더 버니까. 악천후에도 달려야 한다. 지난해 여름 80년 만의 폭우로 시간당 100㎜ 이상의 물 폭탄이 쏟아질 때에도, 침수된 도로 위를 그들은 달렸다. 월드컵과 올림픽과 온갖 환희 속에서 그들은 대한민국을 부르짖는 대신 길 위에서 콜(주문)을 접수한다. 그들의 직업 윤리에는 결코 ‘딸배’로 비하할 수 없는 숭고함이 있다. 신체적 위험도 위험이거니와, 인성 교육이 덜 된 일부 진상의 하대(下待)도 견뎌야 한다. “나가는 김에 쓰레기 좀 버려주세요” 같은. 2019년에는 국내 첫 배달 기사 노동조합(라이더 유니온)도 생겼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다.
그러나 쉽지가 않다. 경기 침체로 배달량은 현저히 줄었다. 배달비 폭등과 코로나 끝물의 여파로 배달 앱 이용자가 1년 전보다 600만명 넘게 감소했다고 한다. 이들의 안녕을 기원한다. 밤에 배달 나간 아파트 단지에서 시작된 불을 목격하곤 소화기로 진압한 뒤 유유히 사라진 배달 기사, 한강에 뛰어들어 익사 위기의 시민을 구해낸 정의의 기사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은 기사(騎士)로 불려야 마땅하다. 지난 3·1절, 한 만취 운전자가 중앙선을 넘어 화물차를 들이받고는 차에서 내려 달아났다. 당시 주문 대기 중이던 배달 기사 네 명이 합동 추격에 나섰고, 검거에 성공했다. 모두 저마다 달린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그래도 법은 지키며 달리자.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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