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 붙는 행복의 약속들…진부한 술어를 떼어내어 ‘틀에 박힌 문장’을 바꾸다[신새벽의 문체 탐구]
행복의 약속: 불행한 자들을 위한 문화비평
사라 아메드 지음 | 성정혜·이경란 옮김
후마니타스 | 508쪽 | 2만3000원
내가 편집자로 일하면서 저자의 원고에 개입할 때 가장 눈여겨보는 것은 주어다. ‘한국 사회는’으로 시작하는 문장은 거부한다. 거의 모두 남 탓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우리는’도 대부분 수정 제안한다. ‘우리’가 누구인지, 어떻게 하나의 주어일 수 있는지 논변한 뒤에야 의미 있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은 권장한다. 이때는 뒤에 오는 술어가 관건이 된다. 예를 들어 ‘나는 책을 좋아한다’라는 문장은 진부하다. 어차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만 이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철학자라면, 글이 논리적으로 전개되는가만이 관건이라는 반론이 제기될 법하다. 하지만 철학자의 글쓰기는 그의 출신, 경력, 역사에 비추어 비판적으로 분석될 수 있다.
페미니스트부터는 글쓰기와 삶의 관계가 전면에 온다. 퀴어라면, 이주자라면 글쓰기는 삶에 착 붙어버린다. 물론 철학의 고고함과 세속의 정체성은 늘 충돌한다. 그렇다면 퀴어 페미니스트 철학자는 어떤 글을 쓸까? 사라 아메드의 주저 <행복의 약속>(2010)은 철학의 고전적 행복론을 재해석하는 탁월한 문화비평이다.
1969년 영국 샐퍼드에서 태어난 사라 아메드는 어릴 때 가족이 호주로 이주했다. 첫 번째 학위는 호주 애들레이드 대학에서 땄고, 웨일스의 카디프 대학 비판·문화이론 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국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로 일하다 2016년 학내 성추행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는 학교 당국에 항의하며 사임했다.
영국인 어머니와 파키스탄인 아버지의 딸이라는 사실,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인 사라 프랭클린이 파트너라는 사실까지가 중요하다. 그의 글쓰기를 관통하기 때문이다.
사라 아메드는 ‘행복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행복은 무엇을 하는가?’라고 질문한다. 행복은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는 행복학과도, 인생의 목표는 행복이라는 고전 윤리학과도 선을 긋는 것이다. 사라 아메드는 이런 문체를 구사한다. “행복이라는 말은 일을 한다.” 이렇게 행복이라는 단어를 주어로 놓으면, 행복의 실체가 아니라 작동에 주목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식에게 ‘그저 네가 행복하기만을 바랄 뿐이란다’라고 말하는 상황을 보자. 이 말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느끼는 자식이라면 문제가 없다. 이 말의 함의에 가슴이 답답해지는 자식이 문제가 된다. 어릴 때부터 자신이 바로 그런 문제적인 딸이었다고 밝히는 사라 아메드는 부모가 말하는 행복이 자식을 부모 뜻대로 움직인다고 분석한다.
누구든 행복을 원하지 않을 리 없다. 굳이 행복을 문제 삼는 이유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을 편들기 위해서다.
사라 아메드가 드는 대표적 사례가 ‘분위기 깨는 페미니스트’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성차별적인 발언을 하는 사람을 지적하면 ‘페미가 분위기 망친다’고 비난받는다. 성차별 발언이 문제의 원인인데도, 페미니스트가 문제를 일으킨 주체로 지목된다. 행복이 좋은 분위기를 거스르는 사람을 규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행복은 약속을 한다. 무엇무엇을 한다면 행복해질 거라는 조건부 약속이다. 이 조건이 인간을 구속한다. ‘네가 결혼을 한다면, 애를 낳는다면, 애가 행복해야만’ 하는 식으로 인생 끝날 때까지 계속되며, ‘네가 이것이 아니라 저것을 한다면 불행해질 것이고, 그러면 나도 불행해진다’라는 속뜻으로 상대방을 속박한다.
한편 고통, 피해, 상처를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행복 쪽으로 빨리 돌려세우고 싶어지게 마련이다. 불행에 머무는 네가 바로 불행의 원인이라고 다그치면서 말이다. 행복의 강력한 소용돌이에 직면해 사라 아메드는 불행이 가진 가능성을 무척 신중하고 주의 깊은 언어로 펼쳐놓는다. “불행할 자유란 불행한 것에 의해 변용될 자유다.” 즉 불행한 사람은 삶을 바꿀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행복에 붙는 진부한 술어들을 떼어내고, 불행한 자를 변화의 주체로 세우는 문체로 뒷받침된다. “이것은 문장의 주어들에 무엇을 부착할 것인가를 둘러싼 혁명이다.”
<행복의 약속>은 언제나 좋다가도 좋지 않고, 나쁘다가 갑자기 좋아지곤 하는 우리의 양가적인 느낌들을 고정된 말에서 해방시킨다. “우리는 더 이상 가족은 이런 거야, 친구는 이런 거지, 연인이라면 이래야 해, 삶이란 이런 거야 같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신할 수 없게 된다.” 사라 아메드의 주어와 술어 분리법을 판에 박힌 행복 공식들에 적용해보자. ‘집안이 화목해야 만사가 잘된다’라는 진술에서는 ‘집안’ 대신 ‘우정’을 넣을 수도 있다. ‘자식이 있어야 말년이 쓸쓸하지 않다’에서는 조건문 ‘자식이 있어야’를 저마다 교체할 수 있다.
주어와 술어 분리법은 교정지에 적용해도 좋겠다. 틀에 박힌 문장, 무의미한 문장을 분리시킨 뒤 다른 이야기를 써달라고 글쓴이에게 요청하는 것이다. 사라 아메드가 역설하듯, 주어와 술어가 새롭게 부착된 말은 결국 뭔가 새로운 것을 존재하게 할 수 있다. 말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저자와 편집자의 믿음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신새벽 민음사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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