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자리 뺏길까 걱정…딸기를 떠올려보세요 [Book]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부키 펴냄
27일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가장 자신있는 요리로 ‘가지 파스타 베이크’를 꼽으며 “15년 전부터 쓰려고 한 책이다. 경제학이 관심이 없는 사람도 음식 이야기에 혹하게 만들고 싶었다. 한마디로 독자에게 미끼를 던지는 책”이라면서 “대중을 위한 경제서를 쓰면서 느낀 게 경제문맹 퇴치가 중요하다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맛깔나는 경제학을 가져온 그에게는 심상치 않은 경제 상황에 관한 질문이 쏟아졌다. 장 교수는 “지금의 위기는 2008년 금융위기의 후속편이고 당시 돈을 풀어서 막았을 뿐 제대로 종료되지 않아 벌어진 문제”라면서 “어디서 언제 터질지 지뢰밭 같은 상황이지만 2008년보다는 더 안전하다고 보는 견해”라고 말했다.
이번 책에는 자신의 일상과 식탁, 과거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도 소스처럼 뿌렸다. 첫 식재료는 마늘. 1986년 22살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그를 가장 힘들게 한 건 햄버거조차 맛없을 만큼 ‘보수적’인 영국 음식. 심지어 영국은 마늘을 혐오했다. 1993년 결혼 후 클로디아 로든의 ‘푸드 오브 이탈리아’를 레시피로 요리를 시작하며 음식의 고통에서 해방됐다. 부단한 수련으로 지금은 프랑스, 중국, 일본, 중동식 요리까지 즐겨한다.
다국적 음식을 즐기게 된 그에게 슬픈 일은 경제학계가 점점 폐쇄적으로 변해 영국 음식처럼 문호를 닫아버린 것이다. 신고전학파와 케인스학파 등은 더 이상 서로를 받아들이지 않고 반목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경제학에 절대적인 정답은 없으며 관용과 포용이 더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마늘을 듬뿍 쓴 김치도 올려진 다채로운 식탁이 차려질 때, 경제학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시야도 넓어질 수 있는 것이다.
도토리는 흔하고 값싼 식재료지만, 돼지가 먹으면 달라진다. 도토리를 먹인 이베리코 돼지로 만든 하몬은 스페인의 상징이다. 이 햄은 이슬람과 기독교도가 전쟁을 벌인 스페인에서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음식이 됐다. 이 음식을 통해 장 교수는 속세와는 먼 종교라는 이슬람 문화에 대한 편견을 걷어낸다. 기독교 땅에서 쫓겨난 당시 유대인을 받아들인 문화가 이슬람이었다. 중세까지 이슬람은 법학과 수학, 과학에서 유럽보다 앞서 있었다. 힌두교, 유교와 달리 카스트 제도가 없는 것도 유리했다.
유교 문화가 동아시아의 경제 기적을 맞았다는 주장도 논파한다. 근면, 절약, 교육을 중시하는 문화가 아니라 2차 세계대전 후 토지 개혁을 통해 계층이동이 가능해졌고 교육이 계층상승의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한국은 1970년대까지 실용 학문에 편견을 가진 유교의 영향으로 과학·공학 직종을 꺼리기도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건 정부의 이공계에 병역 혜택과 재정 지원을 강화한 정책이었다.
피자부터 칵테일까지 마법처럼 모든 식탁에 오르는 식재료로 멸치가 당당하게 등장한다. 멸치는 19세기 페루의 경제적 번영의 비결이었다. 훔볼트 해류의 멸치를 먹은 가마우지의 구아노(마른새똥)가 최대 수출품. 하지만 이 호황은 인공비료의 등장으로 끝났다. 19세기 이후 인공 염료·고무 등 숱한 기술 혁신은 자원 부국들의 돈을 빼앗아 갔다. 이 책은 “역사 속에서 높은 생활 수준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방법은 오직 산업화밖에 없으며 혁신과 기술력을 확보할 수 있는 제조업 발달 뿐”이라고 역설한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국수의 나라’ 이탈리아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차가 1975년 현대의 첫 차 포니였다. 반세기 만에 현대차는 세계 최고의 차를 만드는 기적을 썼다. 기적의 비밀은 정주영과 정세영이라는 기업가였다. 그리고 현대그룹의 다른 부문에서 번 돈을 차에 쏟아붓는 ‘기업 내 교차 보조’가 성장의 동력이라고 분석한다. 동시에 유치산업을 보호한 한국 정부도 큰 도움이 됐다. 성공적 기업은 이처럼 집단적 기업가 정신과 노력의 산물임을 파스타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 이 책은 알려준다.
미래를 위한 레시피도 실렸다. 딸기는 노동집약적 작물의 대표다. 문제의 첫번째 해결법은 값싼 이민 노동자였고 곧 자동화로 대체됐다. 기술의 발전으로 일자리가 사라진 건 자본주의 체제에서 지난 2세기 동안 늘 일어난 일이었다. 인공지능(AI)의 발달로 전문직까지 위협받는 시대지만, 이 책은 패닉에 빠지지 말라고 위로한다. 기존의 일자리가 사라지면 언제나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로봇이 딸기를 수확하며 로봇 엔지니어가 필요해진 것처럼 말이다. 고등 교육, 오락, 패션 등도 자동화가 선물해준 일자리다. 과학기술 공포증을 극복하게 해주는 건 이처럼 달콤한 작은 과일에 얽힌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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