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물감 푹 짜기 작전

2023. 3. 31.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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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홍색 매화를 보면 가슴에
플라밍고 핑크가 흘러나오고
흰 목련은 하얀 밝음 깨운다
봄은 내면의 색깔 튜브 눌러
나의 색을 표현할 길로 인도

이따금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보면 놀란다. 도서관 어린이실 앞이나 미술학원 앞 게시판에는 종종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붙어 있는데, 그 형태와 비율이 자유롭기 그지없다. 자동차만 한 나뭇잎과 그 나뭇잎보다 큰 달팽이와 나비, 솜털구름 옆을 유유히 날아가는 무당벌레, 몸통은 생략하고 둥그런 얼굴에 물방개의 다리처럼 가느다란 팔다리가 붙어 있는 사람. 그런데도 얼굴에 쓴 안경과 고불거리는 머리카락은 자세히 그려 넣어 자기가 아는 누군가의 표정을 정성껏 표현했다. 손가락 다섯 개를 다 그리는 건 불필요한 묘사라는 듯 세 개로 간략하게 압축하고, 거기에 달린 손톱에는 세심하게 매니큐어를 칠해 자기의 취향을 뽐냈다.

오직 자기가 받은 느낌에 집중해 대상의 개성을 돋보이게 하는 아이들의 화풍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상쾌해진다. 특히나 내 눈을 사로잡는 건 색을 쓰는 활달함과 대범함이다. 오렌지 형광 피부를 가진 사람이라든가 초록색으로 내리는 빗줄기, 핑크빛 털을 가진 토끼는 틀에 박힌 내 시선에 명랑한 상상력을 불어넣는다.

요즘 길을 걸으면 아이들의 그림 같은 생기가 느껴진다. 누군가 무채색의 길가에 물감을 쭉쭉 짜놓고 붓질을 해놓은 것 같다. 겨우내 탁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바위틈에서 샛노란 민들레가 돋아나고, 보랏빛 제비꽃과 연분홍색 철쭉이 오밀조밀하게 자기만의 색 보따리를 풀어놓고 있다. 쓰레기더미만 쌓여 있던 담벼락엔 흐드러지게 핀 개나리의 노랑, 밋밋하게 솟아 있던 나무 기둥엔 농도 짙은 흰색의 목련이 드레드레 피어 있다. 봄이라는 화가는 물감을 아끼는 법이 없다. 통통한 튜브에 담긴 선명한 색들을 거리마다 쭉쭉 짜놓고서 새와 개, 고양이, 인간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나 있어, 나 있어, 여기 있었는데, 몰랐지?'

골목마다 식물의 색들이 말을 건다. 깨진 보도블록에 발이 걸려 주춤하듯 자동차 경적에 깜짝 놀라 돌아보듯이 늘 걷던 익숙한 길에 멈춰서서 꽃들의 도드라진 천연색에 놀라 나무를 올려다본다. 연립주택 건물에 핀 풀또기꽃은 벽돌과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흔한 길에 눈부신 진홍색을 채색한다. 모퉁이를 돌면 담홍색 꽃잎을 단 벚나무, 샛길을 따라가면 오종종한 노란 꽃잎의 산수유, 회칠한 벽에 으스스한 방범창이 솟아 있던 오래된 집에는 개나리 덤불이 기세 좋게 벽화를 그리고 있다. 상점들 앞의 빈 화분들에도 알록달록한 물감이 뿌려진다. 새의 깃털처럼 꽃잎이 보드라워 보이는 팬지, 두루미의 정수리처럼 새빨간 이마를 드러낸 맨드라미, 윤기 흐르는 녹색 잎마다 흰 줄무늬가 그려진 비비추까지. 저 빛나는 색들은 어디에 담겨 있던 걸까. 누가 저 식물들을 깨워 물감을 짜내게 했을까.

커다란 호흡과 함께 숨구멍에서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내는 고래처럼 봄은 보이지 않는 심호흡으로 며칠 사이에 아낌없는 물감을 세상에 흩뿌려놓았다. 소리도 없이, 일한다는 기색도 없이, 자연은 제때 맞춰 완벽한 한철을 만들어낸다. 봄이 와서 꽃이 핀다기보다 세상에 펼쳐진 꽃의 색들이 이제 오셔도 좋다는 듯 봄을 부르는 것 같다. 매년 반복되는 개화이기에 이 마법이 경이롭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이라는 물질을 색으로 느끼게 해주는 봄의 프리즘. 우리가 그 빛의 몸을 볼 수 있다는 건 우리 안에도 그런 빛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다홍색 매화를 보면 가슴에 웅크리고 있던 플라밍고의 핑크빛이 흘러나오고, 흰 목련을 보면 잠들어 있던 하얀 밝음이 깨어나는 것처럼. 봄은 우리 안의 색깔 튜브를 꾹꾹 눌러 자신의 색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이제 막 봄의 천진한 물감 작전이 시작했다.

[김멜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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