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고무신 비극 부른 ‘저작권 분배’, 웹툰 계약도 ‘판박이’

2023. 3. 31.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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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7일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검정고무신 고 이우영 작가 사건 대책위원회 기자회견’에서 공동제작자인 이 작가의 동생 이우진 작가가 발언 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 문재원 기자



‘하루평균 9.9시간, 마감 전날 평균 11.8시간, 주 5.7일 근무. 노동 자율성이 없다고 느끼는 비율 63.78%.’

한국이 세계시장에 내놓은 최고의 상품, ‘웹툰’ 작가들의 노동실태를 조사한 결과다. 강도 높은 노동시간과 자율성 없는 계약관계에 묶인 현실은 이들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든다. 동일 조사에서 웹툰 작가들의 우울증 기준 초과 비율은 28.74%, 불면증 기준 초과 비율은 28.23%로 나타났다. 이는 ‘자살을 생각해 봤다’(17.35%), ‘자살 계획을 해봤다’(8.5%), ‘실제 자살 시도를 해봤다’(4.08%)라는 응답 수치와도 연결된다. 세 항목 모두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2021년 정신건강실태 조사결과보다 높았다.

해당 연구를 수행한 것은 민지희 한양대 직업환경의학과 전임의 연구팀이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지원으로 수행한 연구는 2022년 6월부터 7월까지 총 320명의 현직 웹툰 작가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와 15명을 대상으로 한 심층면접으로 구성돼 있다. 민 전임의는 “일단 노동시간이 매우 많다는 점과 일을 하면서 매주 이른바 ‘크런치 모드’(업무 마감 시한을 앞두고 개인 생활을 희생하며 연장근무 하는 행태)에 있다는 점 등이 이들을 힘들게 한다”며 “복잡하고 불투명한 계약관계에서 오는 불안 역시 이들을 괴롭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사실 얼핏 보면 이들의 노동 행태는 개인의 선택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만화를 그리는 작가 대부분은 회사에 소속된 것이 아닌 계약관계에 의해 일을 한다. 이론적으로는 스스로 일의 강도를 조절해가며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문제는 현실이다. 기자와 만난 웹툰 작가들은 예외없이 불안감을 호소했다. “대화를 하고 있는 지금도 머릿속 한켠에는 ‘내가 뭐하고 있는 거지, 당장 책상 앞으로 가서 그림을 그려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마감 시간이 정해져 있는 일, 작품 수준을 유지하고 싶은 욕구, 나를 대체할 사람이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는 환경, 이 모든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계약서까지. 이들이 잠시 멈춰 휴식을 취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다.

민지희 한양대 직업환경의학과 전임의 연구팀이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지원으로 수행한 연구 /민지희,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그런데 마치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진 듯한 일상보다 이들을 괴롭히는 것은 정작 따로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을 언제든 ‘툭’ 하고 끊어버릴 수 있는 바로 문제의 계약관행 이었다. 언제든 ‘수명을 갈아 넣어’ 만든 내 작품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회사 홍보에 이용되고, 상품으로 판매된다는 소식을 접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냐”고 계약한 회사를 찾아가도 소용이 없다. 기억 저편에 밀어놓고 잊고 있었던 계약서 한 장이 떡 하니 눈앞에 내밀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저작물 및 그에 파생된 모든 이차적 사업권을 포함하고… 원작출판권에 의한 이차적 권리를 가지며’ 같은 말들이 어지럽게 적혀 있는 그 계약서다. ‘다들 그렇게 하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서명한 결과,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계약서는 관행처럼 굳어졌고 오늘에 이르렀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여전히 자신이 서명한 계약서가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조차 모르는 작가들이 많다는 것이다.

지난 3월 11일 한 창작자가 펜을 꺾었다. 동시에 그의 삶도 멈췄다. 생전 그는 “자식과 같은 캐릭터를 잘 키우고 싶다는 마음으로 사람을 믿고 신뢰한 것이 잘못입니까”라고 심정을 토로했다. 그는 30여년 동안 그려온 자신의 만화를 둘러싼 저작권 분쟁에 휩싸여 있었다. 각종 송사를 치르며 “차라리 만화 말고 다른 일을 했었다면, 이렇게 법정을 드나들 일이 없었을 텐데 하는 후회의 마음이, 자책하는 마음이 크다”고도 했다. 그의 이름은 이우영이다. 평생을 바쳐 그렸다는 만화는 한국 기성세대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검정고무신>이다.

<검정고무신>을 둘러싼 논란 : 매절계약, 저작권 쪼개기

창작자의 죽음 이후에 남겨진 상황은 여전히 총체적 난국이다. <검정고무신>을 둘러싼 이해 당사자들 간 대립이 법적 다툼으로까지 이어져 있다. 양측의 주장 중 엇갈리는 부분이 있는 만큼 사실과 주장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번 사건에서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은 분쟁의 한 가운데 ‘저작권’이 있다는 것과 이로 인해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는 점이다.

인기만화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를 바탕으로 <검정고무신> 사태를 보면 독특한 지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이른바 ‘매절계약’이라고 불리는 형태의 계약이 이번 사태의 원인이라는 지적을 짚어봐야 한다. 일부 언론 보도와 정치권의 지적으로 부각됐다. 매절계약은 <구름빵> 사태로 알려진 출판계의 오랜 계약 관행이다. 출판사가 저자에게 일정 금액을 지급하면, 그 이후 저작물을 이용해 얻은 추가 수익을 모두 독점하는 계약 형태를 지칭한다. 주로 신인 작가들 계약에서 나타난다. 그런데 <검정고무신>은 이 형태와 완벽히 부합하는 사례가 아니다.

<검정고무신>은 1992년 시작됐다. 그런데 <검정고무신>을 둘러싼 논란의 계약은 2007~2008년에 체결된 사업권설정계약이다. 이미 계약 당시 단행본, 애니메이션 등으로 이름이 알려진 상태였다. 무엇보다 문제의 계약이 체결될 ‘시점’에 저작권이나 향후 사업권을 대가로 돈이 오가지 않았다. 이 작가는 지난 2월 법정에 제출한 진술서에서 “사업하는 기간에만 <검정고무신> 45권의 전체 콘텐츠가 아닌 캐릭터 9종에 대한 권리를 사용하는 조건으로 계약금 등의 모든 비용도 받지 않고 권리를 인정해줬다”고 했다. 즉 이 작가 스스로 저작권이나 향후 발생할 수 있는 수익의 독점적 권리를 완전히 양도했다고 인식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검정고무신> 캐릭터를 이용한 2차 사업을 주도한 형설앤 역시 “3% 수준의 원작료를 지급하는 계약이었다”고 했다. 즉 <검정고무신>이 저작권 양도계약이나 사업 수익을 독점하게 허락한 형태의 매절계약이라고 하는 것은 사안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다. 특히 <구름빵> 백희나 작가가 매절계약에 대한 소송을 벌였지만 패소한 사례에 비춰볼 때 법정 다툼이 걸려 있는 <검정고무신>을 매절계약으로 단정하는 것은 우려스러운 부분이다.

<검정고무신> 사태와 관련해 이보다 더욱 독특한 지점은, 그 시작점에 이른바 ‘지분 쪼개기’ 형태로 4인 간 계약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문제의 바로 그 2008년 사업권설정계약이다. 등장하는 인물은 이우영·이우진 그림 작가와 이영일 글 작가 그리고 형설출판사 장 모 대표다. 이들은 <검정고무신>의 9개 캐릭터를 활용한 사업에 대해 각각 27%, 10%, 27%, 36%씩 지분을 나눠가졌다. 이들 사이의 사업권 계약을 액면 그대로 보면, 우선 <검정고무신> 원저작물 및 그에 파생된 모든 2차적 사업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장 대표가 지정한 업체에서 모든 사업을 진행하고, 수익은 협의해 분배하는 방식이다.

고작 3장 남짓한 계약서에 이른바 2차적 권리라고 할 수 있는 연극, 뮤지컬, 연재, 개작, 번역, 영화, 캐릭터, 방송, 녹음, 온라인, DVD, 모바일, 인터넷 등이 모두 포함됐다. 문제의 시작이자 끝인 ‘<검정고무신> 애니메이션’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지분에 따른 수익배분 관련 내용이다. <검정고무신> 4기 애니메이션 제작은 형설출판사 산하 형설앤의 주도로 진행됐다. 투자자들이 참여했고, 시청자들의 호응도 이끌어냈다. 제작, 투자, 운영 등에서 형설앤이 성과를 만들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문제는 애니메이션이 성공을 거두고, 캐릭터를 활용한 다양한 상품화의 길이 열리며 갈등이 심화됐다는 점이다. 각종 상품화를 추진하는 과정마다 원저작자의 동의가 있어야 하느냐는 대립이다.

활용방안을 담은 2007, 2008년 사업권설정계약서/독자 제공



이 작가는 “원저작자인 나도 모르게 장 대표가 2차 캐릭터 사업을 하는 바람에 저작권 및 창작권 침해를 당했다”고 했다. 이 작가 사망 이후 이우영사건대응대책위원회(대책위)가 꾸려지며 싸움을 이어가는 중이다. 반면 형설 측은 “2차 저작물인 애니메이션으로 파생된 제품을 계약하는 권리는 애니메이션 투자사의 권리”라는 입장이다. 설사 형설앤이 주도한 애니메이션 사업이 끝나도 이미 쪼개진 지분 관계는 정리되지는 않는다. 장 대표에게 사업 권한이 있는 만큼 불씨는 언제든 다시 타오를 수 있다. 사업권설정계약에 서명한 당사자가 이우영 작가임을 부정할 수 없는 한 그렇다.

<검정고무신> 계약과 웹툰업계의 계약 : 저작권 쪼개기

<검정고무신>을 둘러싼 복잡한 대립을 살펴본 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해보자는 취지가 아니다. 그보다는 계약관계가 독특하기 때문이다. <검정고무신>은 1990년대 시작돼 출판회사와 2차 저작물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다. 그런데 분쟁의 중심에 있는 계약 형태가 2023년,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웹툰업계의 계약행태와도 닮았다. 즉 15여년 전 체결된 <검정고무신> 계약 문제를 어떻게 푸느냐에 따라 현재 웹툰업계의 불공정 계약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 모색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현행 웹툰업계 계약의 기본 형태는 MG(Minimum Guarantee)제다. 우선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작가에게 MG라는 명목으로 최소수입을 보장하는 돈을 지급한다. 작가는 향후 작품의 성공, 수익발생 여부에 따라 RS(Revenue Share)라고 하는 수익배분을 추가로 받을 수 있다. 그러니까 MG는 RS를 선지급한 것에 가깝다. 현재 업계에 만연한 계약의 주류는 작품을 통해 수익이 창출되면 회사와 작가가 계약 비율대로 나누고 작가는 MG로 지급받은 돈부터 출판사에 갚는 방식이다. 그 초과분부터는 순수익으로 작가가 가져간다. 후차감 MG라고 한다. 이는 변형된 매절계약과 비슷한 형태로도 보인다. 특히 저작권 문제가 엮이기 시작하면 더욱 그렇다.

고 이우영 작가가 교수로 재직한 용인예술과학대 연구실에 학생들이 이 작가를 추모하는 문구를 적은 포스트잇을 붙였다. / 용인예술과학대 웹툰만화



저작권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심화하며 업계는 전면 귀속보다는 공동저작물 조항을 삽입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형태의 독특함이 기상천외하다. 예를 들어 글 작가·그림 작가·제작사가 저작권을 공동 소유하는데, 그 비율은 각자의 RS 비율만큼 갖는다. 비율이 ‘왜 그렇게 나뉘는지’. ‘조정할 수는 있는지’, ‘애시당초 쪼개는 것이 가능하긴 한 건지’ 등은 고려대상조차 아니다. 이 방식이 여의치 않으면 저작권은 작가가 갖되, 회사가 저작물을 사업에 이용할 수 있는 배타적 권한을 특정 계약기간 혹은 영구적으로 갖는 조항을 넣는 방식도 있다. 결국, 목표는 원저작물을 활용해 제작사가 다음 사업을 하는데 걸림돌을 치우는 것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작가는 웹툰을 연재하며 MG라는 돈을 받고, 향후 RS 수익으로 갚는다. 이때 책정된 RS 비율만큼 저작권은 제작사와 작가의 공동소유가 된다. 저작권이 쪼개진 만큼 비율에 따라 향후 발생할 사업권 협상 및 활용, 파생수익 분배도 영향을 받는다. 한 업계 관계자는 “요즘은 마치 주식처럼 저작권 지분 비율이 조금 더 높은 쪽이 주인처럼 활용을 주도한다”고 말했다. 저작권 지분이 쪼개지며 문제가 연쇄적으로 터진 <검정고무신> 사건과 닮았다.

작가들은 창작에 개입하지 않은 제작사 혹은 사람이 저작권의 공동소유자로 이름을 올리는 것부터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특히 문화체육관광부가 추진 중인 ‘표준계약서’ 개정 작업이 제작사가 공동제작자가 되는 길을 더 용이하게 해주는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박광철 한국만화가협회 이사는 “만약 표준계약서가 제작사가 쉽게 공동제작자가 되는 길을 제시한다면 이우영 작가가 겪은 고통을 업계 표준으로 확장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즉,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앞으로 제2, 제3의 검정고무신 사건이 계속해서 나올 수 있다는 의미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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