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와 동성애 혐오를 넘어 ‘코미디판’을 뒤집다[책과 삶]

이영경 기자 2023. 3. 31.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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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에서 배워라
해나 개즈비 지음·노지양 옮김|창비 |568쪽|2만3000원
우리는 물속에 산다
요코미치 마코토 지음·전화윤 옮김|글항아리|340쪽|1만8000원
해나 개즈비의 코미디쇼 <해나 개즈비: 나의 이야기>의 한 장면.
부서진 자신을 재건한 여성보다 더 강한 것은 없습니다.

호주 태즈메이니아 출신의 스탠드업 코미디언 해나 개즈비의 쇼 <나네트>(Nanette, 한국 제목 ‘해나 개즈비: 나의 이야기’)에 나오는 말이다. 그는 쇼에서 서구의 백인 중심주의·남성 중심적 사회와 문화, 예술과 문화, 동성애 혐오를 비판한다. 특히 백인 이성애자 남성을 향해 그는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가볍고 유쾌하기만 한 쇼는 아니다. 보고 나면 얼이 빠질 정도로 묵직한 ‘한 방’이 있다. 이런 쇼가 대중에게 먹혔을까? 먹히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개즈비는 <나네트>로 에미상과 피바디상을 받으며 세계적 스타로 떠올랐다. 2017년 할리우드에서 시작해 세계로 확산된 ‘#미투 운동’의 시대적 흐름 속에 <나네트>는 코미디의 판도를 뒤집었다.

해즈비는 <나네트>에 자기 자신을 ‘갈아넣었다’. 젠더퀴어·동성애자·자폐스펙트럼장애(AS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백인인 것을 빼면 소수자성을 두루 갖추다시피 한 개즈비는 자신을 감추거나 자기비하적 유머로 소비하지 않고 당당히 드러내며,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사회를 향해 거침없는 분노를 쏟아낸다. “이 작품에 나는 내 모든 것을 남김없이 쏟아부었다”고 말한다. <나네트>에서 “코미디를 그만둬야겠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이전까지 자신이 생존해왔던 방법, 자신을 숨기거나 상처를 농담거리로 삼은 자학적(자기혐오적) 코미디를 중단하겠다는 선언이다. ‘부서진’ 것은 개즈비 자신이며, 부서진 자아의 조각들을 그러모아 재건한 자기선언이 <나네트>였다.

<나네트>를 본 사람이라면, 개즈비가 자폐와 ADHD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에 조금 의아할지도 모른다. 그는 1시간 분량의 긴 쇼를 능수능란하게 끌어간다. 자신의 삶을 쪼개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농담을 뒤집고 또 뒤집으며 강렬한 스토리텔링을 들려준다. 개즈비의 자서전 <차이에서 배워라>을 보면 어떻게 이런 무대가 가능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주변과 원활한 소통이 어려웠던 그의 주특기는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관찰하는 것이었고, 그가 유일하게 대화에 끼어들 수 있는 방법은 농담뿐이었다. 철저하게 준비한 시나리오로 무대를 혼자서 통제하는 1인 스탠드업 코미디는 어쩌면 개즈비에게 가장 알맞은 장르였을 것이다.

4월2일 UN이 정한 ‘세계 자폐증 인식의 날’
자폐·ADHD·젠더퀴어 코미디언
해나 개즈비의 자서전 ‘차이에서 배워라’
교토부립대학 교수이자 자폐·ADHD
요코미치 마코토의 ‘우리는 물속에 산다’

4월2일은 유엔(UN)이 정한 ‘세계 자폐증 인식의 날’이다. 이를 앞두고 자폐스펙트럼 당사자가 쓴 책 두 권이 나란히 출간됐다. 개즈비의 <차이에서 배워라>와 요코미치 마코토 일본 교토부립대학 준교수가 쓴 <우리는 물속에 산다>이다. 두 저자는 자폐와 ADHD를 갖고 있다. 먼저 용어를 정리하는 편이 좋다. 요코미치는 ‘발달장애인’이란 말을 거부한다. 정상인이 ‘정형발달인’이라면, 장애인은 ‘뇌의 다양성’을 살아가는 존재라고 한다. 개즈비 역시 자신을 신경다양인이라고 부른다. 스펙트럼의 폭이 다양하듯 두 저자의 경험과 삶, 책의 결도 다르다. 하지만 그들이 자폐와 ADHD라는 진단을 인생의 중반을 넘어서야 받았고, 그 이전엔 남과 다른 자신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없어 큰 고통을 받았다는 점에선 유사하다.

개즈비가 동성애 혐오로 가득한 시골에서 가난한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나 성장하는 과정을 피와 땀 냄새를 물씬 풍기며 들려준다면, 요코미치는 때론 문학적으로, 때론 학술적으로 자신이 경험하는 세계를 설명한다. 개즈비의 책이 삶 자체를 들려준다면, 요코미치의 책은 신경다양인이 경험하고 감각하는 세계를 이해 가능하게 설명하려는 데 방점을 둔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수중세계’라고 부른다. <우리는 물속에 산다>를 읽는 경험 자체가 대기와 중력에서 벗어나 다른 감각으로 가득 찬 세계로 여행을 떠난 느낌을 준다. 달리 말하면 신경다양인은 평생을 다른 감각을 기준으로 설계된 세계 속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해나 개즈비의 코미디쇼 <해나 개즈비: 나의 이야기>의 한 장면.
동성애 혐오가 심했던 호주 태즈메이니아
가난한 집 막내딸이자 신경다양인·퀴어로서
그루밍 성범죄와 젠더폭력에 시달려
‘미술사’가 구원이 돼···남성중심적 서양미술사 비판도

<차이에서 배운다>는 늘 뒤처지고 어디에 속하지도 못했던 아이가 어떻게 <나네트> 같은 이야기를 써낼 수 있게 됐는지를 들려준다. 개즈비가 나고 자란 태즈메이니아는 호주 최남단의 큰 섬으로 빼어난 천혜의 자연풍광을 지녔다. 그만큼 고립되고 보수적인 섬으로도 유명했다. 1997년까지 태즈메이니아에선 동성애가 불법으로 처벌 대상이었다. 개즈비는 이곳에서 이중의 고통을 겪었다. 자폐와 ADHD라는 걸 모른 채 성장기를 보내면서 겪은 어려움에 더해, 동성애 혐오가 숨 쉬듯 이뤄지는 시골에서 자신의 젠더정체성·성적지향을 깨달으며 자기혐오와 타인의 혐오에 시달려야 했다.

개즈비는 남들과 원활한 상호작용이 어려웠고, 청각과 후각 등 감각이 예민해 학교에서의 단체생활이 어려웠다. 감각의 과부하가 문제였다. 사춘기는 그에게 최대 위기였다. 신체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존재 자체에 경련”이 일어나고 성별불쾌감을 느꼈다. 자폐인으로 순응적이고 취약했던 꼬마 개즈비는 열 살 무렵 이웃 남자로부터 그루밍을 당하며 지속적 성추행을 당했다. 그는 성추행을 두고 “가상의 대필작가라면 가장 우선 순위에 놓을 항목”이라며 “드문드문 성추행을 당하고 있었다”며 거리를 두듯 설명한다. 이는 트라우마에 대한 일반적 반응에 가깝다. 사람들은 트라우마를 공식적인 자기 자신과 통합하기를 회피하려 한다. “한순간도 잊어버릴 수는 없지만 거기에 언어를 갖다붙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거다.” 그는 수치심을 깊은 곳으로 묻어버렸다.

고등학교는 그에게 재앙이었다. 십대가 뿜어내는 온갖 냄새와 시끄러운 소리 속에서 정신은 너무 쉽게 지쳐버리고, 수업 시간이 절반도 지나지 않아 뇌의 스위치는 꺼져버린다. 개즈비는 <나네트>에서 자신의 젠더정체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나는 피곤하다”고 말하는데, 성별이분법으로 구획된 사회에서 자신을 규정하려는 시선이 피곤하다는 뜻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저 신경다양인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너무 지쳤던 것도 같다.

개즈비에게 유일한 구원은 예술사였다. 소음에서 해방되기 위해 찾아간 도서관에서 미술사책을 발견한 후 빠져든다. 그에게 그림과 문자의 관계를 알아맞추는 일은 너무나 흥미로웠다. 그는 대학에서 예술사를 전공하며 친구도 생기고 안정되는 듯 보였다. 처음 ‘커밍아웃’에 대해 생각해본 날 밤, 그는 동성애 혐오자에게 폭행을 당한다. <나네트>에도 등장하는 사건이다. 쇼에서 이 사건을 처음엔 희극(농담)으로, 두 번째는 비극(실제 벌어진 처참한 폭행)으로 들려준다.

성인 여성이 자폐 진단을 받기는 어려웠다. 자폐로 인한 다른 정신적 문제-우울·불안·중독 등-이 먼저 치료 대상이 됐다. 개즈비는 “여자아이, 그리고 남자아이가 아닌 아이들이 적절한 시기에 ADHD 진단을 받는 일이 드물었다”며 “ADHD 여자아이들은 과잉행동보다는 주의력결핍 증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뒤늦게 자폐와 ADHD 진단을 받은 개즈비는 “나 자신을 이해하는 길을 찾았고 난생 처음 나는 나 자신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신경다양인으로서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술사는 그에게 남성중심적 시선을 극복하고 트라우마를 엮어내 인생을 재가공할 훌륭한 실과 바늘이 되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한 장면. 자폐스펙트럼이 있는 주인공은 청각이 예민해 지하철에서 소음차단 헤드폰을 착용한다. 지폐인들은 ‘감각 과잉’ 상태에서 살아간다.
대학에서 문학 강의하던 마흔살···
해리형 자폐스펙트럼장애 진단
기체처럼 흩어지는, 수중세계에 사는 자아
감각의 홍수 상태로 살아온 삶을
시·논문·소설 세 가지 형식으로
문학·예술작품 인용해 설명

<우리는 물속에 산다>는 조금 더 문학적이고 학술적인 버전이다. 저자는 해리형 자폐스펙트럼장애로 “기체처럼 또는 입자처럼 주위가 흩어지는” 상태를 경험한다. 그는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다 마흔 살이 되던 해 자폐스펙트럼장애와 ADHD 진단을 받는다. 요코미치는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물속’에 비유한다. 시각 및 청각의 과민으로 인한 피로가 현실을 물속 세계처럼 감각하게 만들며, ADHD에서 비롯된 과잉행동과 그에 따른 피로가 몽롱한 감각을 일으킨다고 설명한다. 자신과 신체가 분리되는 듯한 해리는 환상적 시공간을 형성한다. 요코미치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속에서 ‘수중세계’를 본다. “문학과 예술은 혼돈스러운 우주에 명료함을 선사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폐로 살아간다는 것을 시·논문·소설이라는 세 가지 형식으로 서술한다. 그가 감각하는 세계를 온전히 설명하기 위해서 세 형식이 모두 필요했다.

요코미치의 글은 자연스레 개즈비와 연결된다. 개즈비는 자신을 “시각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라며 “내 두뇌는 선형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위키피디아, 상형문자식 필름으로 가득한 위키피디아”라고 말한다. 개즈비가 미술사에 빠져든 것도 그때문이었을 것이다. 요코미치도 고통이라면 충분히 겪었다. 종교집단에 빠진 어머니로부터 학대와 체벌을 당했으며, 9년 동안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9년 동안 자살하지 않은 것이 나의 큰 자부심”이라고 그는 말한다. “내 내부에서는 낙담, 증오, 치욕, 고뇌, 혼란이 치솟아 전신을 뒤흔든다. 악몽이 범람하는 강을 헤엄쳐 건너는 모습, 이것이 내가 기본적으로 삶에 대해 품고 있는 이미지다.” 요코미치는 교토에서 발달장애인 자조모임을 만들고 여기서 자신과 비슷한 장애를 지닌 이들을 만나며 이 책을 쓰게 됐다. 그는 신경다양인에 대한 다양한 연구와 문학·예술작품을 통해 이 고통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었다.

개즈비와 요코미치 모두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고통받았으며,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치유가 시작됐다. 신경다양인이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이며 그들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됐다. 요코미치는 장애는 환경의 문제이며, 신경다양인은 환경과 불일치를 일으켜 ‘장애인’이 된 것뿐이라고 말한다. 정형발달인과 신경다양인의 차이는 ‘윈도우(Windows)’와 ‘맥(Mac)’의 차이일 뿐 “전자에게 가능하고 후자에게 불가능한 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결여나 장애를 뜻하진 않는다”고 말한다. 요코미치는 자신이 감각하는 ‘수중세계’를 사랑한다.

신경다양인으로 살아가는 고단함과 고통을 다뤘다고 해서 무거운 책들은 아니다. 개즈비는 코미디언이다. 책엔 고통과 눈물과 있지만, 유머와 ‘펀치라인’이 살아있다. 요코미치는 물속 세계를 감각한다. 스노클링이나 다이빙에서 느낄 수 있을 법한 경이로운 감각의 세계가 여기에도 있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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