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황’ 남인수, 친일 논란 속 60년째 표류 중인 이름 [선데이서울로 본 50년전 오늘]
편집자註 : 50년 전인 1973년 3월, ‘선데이서울’의 지면을 장식한 연예계 화제와 이런저런 세상 풍속도를 돌아본다.
[스포츠서울] 연예계, 스포츠계에서는 늘 스타가 탄생한다.
마치 뒷물이 앞물을 밀어내듯 신예가 등장하고 한 때의 스타는 무대에서 내려오는 세대교체가 이뤄져 왔다. 요즘 들어 교체 주기가 점점 빨라지고 있는 것 같다. 이는 대중이 늘 새로운 스타의 출현을 갈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연예계, 특히 가요계에서 ‘가왕’ ‘가황’ 등 최고의 찬사가 붙고 사랑받는 영원한 스타가 몇 명 있다. ‘가황’이라는 말은 아무에게나 붙일 수 있는 명칭이 아니다. 남인수(1918~1962)가 그런 인물 중 한 사람이다.
흔히 그를 100년에 한 사람 나올까 말까 한 불세출의 가요계의 황제, 가황이라고 말한다. 한국 대중 가요사 100년을 통해 첫손가락에 꼽히는 그가 떠난 지 올해로 61년, 반세기를 훌쩍 넘겼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 가요사에서 큰 바위 얼굴로 남아 꺼지지 않는, 큰 별로 빛나고 있다.
1973년, ‘선데이서울’은 ‘그 시절 그 노래 - 사연 따라 연예 반세기’를 연재하고 있었다. 가수, 작곡자 등 우리 대중 가요사의 스타를 소개하는 기획으로 3월25일 발행된 232호는 12번째 인물로 남인수의 생애와 가요사를 실었다.
요즘 세대에게는 잊혀지고 낯선 인물이 되어버린 남인수, 그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미성의 소유자였고, 가히 국보급 발성이라 했던 전설적 가수였다. 그가 부르기만 하면 히트하는 한 시대 대중문화의 우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대에서처럼 인생도 화려하기만 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고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그만큼 짙다는 말처럼 그의 인생사도 굴곡과 명암이 교차했다.
‘최창수’에서 ‘강문수’로 성(姓)과 이름을 바꾸어 살아야 했던 어린 시절의 어두운 사연 (남인수라는 이름은 그의 예명이다), 첫 취입곡 ‘애수의 소야곡’이 히트하기까지 우여곡절, 누구보다 화려했던 가요 인생, 결핵과의 처절한 사투, 당대의 최고 여가수 이난영과의 로맨스, 그외 수많은 여성과의 염문까지 한마디로 그의 45년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그는 광복 전 800여 곡, 광복 후 200여 곡 등 총 1000여 곡을 노래했다. 애수의 소야곡(1938), 감격시대(1939), 낙화유수(1942), 가거라 38선(1948), 이별의 부산정거장(1953), 청춘 고백(1954) 추억의 소야곡(1954) 등은 지금도 노래자랑이나 트로트 공연에서는 빠지지 않는 불후의 명곡이다.
가슴을 후벼파는 남인수표 노래들은 그 자체가 브랜드였고, 그의 창법을 본받으려는 후배 가수가 줄을 이었다. 하지만 결핵을 앓았던 남인수는 1962년 6월 26일, 마흔 다섯의 젊디 젊은 나이에 눈을 감았다.
결핵으로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 남인수는 그의 옆을 지키던 가수 이난영에게 자신의 노래는 아니었지만, 평소 즐겨 불렀던 ‘황성옛터’를 들려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의 마지막 떠나는 운구 길에는 그를 세상에 알린 ‘애수의 소야곡’이 연주되었다. ‘애수의 소야곡’은 가수 인생 첫 곡이자 히트곡이었고, 마지막 곡이 된 셈이었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요만은’이라는 구성진 도입부로 시작하는 ‘애수의 소야곡’은 그가 떠난 지 61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국민 애창곡이다. 근 3년 사이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의 인기에 힘입어 숱한 후배들이 그의 곡들을 다시 부르고 있다.
‘선데이서울’이 남인수를 소개하던 때로부터 50년, ‘가황’ 남인수를 둘러싼 후대의 평가는 엇갈렸고 이런저런 많은 변화가 있었다.
먼저 노래비가 세워졌다. 사망 25주기였던 1987년 4월, 그를 흠모하던 후배 가수들이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 밤나무골 유원지에 데뷔곡이자 히트곡 ‘애수의 소야곡’ 노래비를 세웠다.
전해진 이야기로는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하다가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특별한 연고나 인연이 없는 그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이 노래비는 1998년 ‘제8회 남인수 가요제’ 때 드림랜드, 지금의 서울 강북구 번동의 도시근린공원 ‘북서울 꿈의숲’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노래비는 얼굴상과 데뷔곡인 ‘애수의 소야곡’ 가사 3절까지를 음각하고 그 아래 기단석에는 ‘민족의 가수 고 남인수 선생 노래비’라고 새겼다. 한때 가황으로까지 불렸던 남인수가 노래비를 세울 땅조차 찾지 못했다는 사연에 가슴이 아린다.
더구나 지금 ‘북서울 꿈의숲’ 외진 자리에 쓸쓸히 서 있는 노래비는 안내 간판이나 공원 팸플릿,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다. 공원 안내 자원봉사자도 노래비의 존재를 희미하게 알고 있을 정도였다.
필자가 이곳을 찾았던 3월 하순, 봄꽃은 화려했지만 노래비는 쓸쓸했다. 한때 사랑받았던 가황의 노래비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길로 무심히 지나치는 산책객 모습만 이따금 보였다.
그의 고향에도 동상이 세워졌다.
세상을 떠난 지 39년 되던 2001년 6월 26일, 고향인 경남 진주의 명소 진양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동상이 세워졌다. 진주가 불세출의 가황이 태어난 곳임을 이 동상이 말해주고 있다.
동상은 전신상 아래 기단석에 ‘가요황제 남인수’라고 새겼다. 동상 옆에 세운 비석에는 그의 데뷔곡이자 대표곡인 ‘애수의 소야곡’ 가사와 악보를 새기고 뒷면에는 짧지만 파란만장했던 그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한동안 서울과 진주에서 ‘남인수 가요제’가 열리기도 했다. 1991년 서울에서 ‘남인수 가요제’가 열렸고, 1996년 그의 고향인 진주에서 ‘제1회 남인수 가요제’가 열렸다.
방송에서도 2005년 KBS1‘광복 60주년 특집 가요무대 - 한국인의 노래, 국민의 가수’ 5번째 인물로 ‘남인수 편’을 진주 현지에서 방송하는 등 TV와 라디오의 가요프로그램, 다큐멘터리 등으로 많은 특집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특히 ‘가요무대’는 매주 그의 노래가 빠지지 않을 정도였으니 남인수를 빼고는 한국 대중가요를 이야기할 수 없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다.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 인명사전에 남인수의 이름 석 자가 오르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세상은 남인수 지우기에 돌입했다. 1996년부터 진주에서 열리던 ‘남인수 가요제’는 2008년 ‘진주가요제’로 이름이 바뀌며 모습을 감췄다.
일제 강점기 ‘강남의 나팔수’, ‘혈서 지원’ 등 친일 성향의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남인수의 친일 행적에 대한 사후 평가는 여전히 찬반 양론으로 나뉘어 그의 탄생 100주년이던 지난 2018년부터 점점 더 거세지고 있다.
한 편에서는 일제시대에 활동하던 가수로서 외부의 압박을 피할 수도,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라는 옹호론이 존재한다. 다른 한 편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대첩을 비롯해 일제강점기 항일 운동의 중심지인 진주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비판이 나온다.
양측은 여전히 접점을 찾지 못한 채 대립각을 세우고 있고 ‘남인수 가요제’는 표류를 거듭하고 있다. 그는 가고 없지만, 생전의 그의 행적을 두고 지역사회의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그가 불렀던 주옥같은 노래는 여전히 우리 가슴을 울리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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