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 희화화 그만! … 성소수자 코미디언의 ‘자전적 농담’[북리뷰]
자기비하·혐오 일삼았던 소녀
약자들 희생양 삼는 코미디서
‘어떤 존재도 모욕 않는 코미디’
자기만의 서사로 ‘새 문법’ 창조
실패·좌절 등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우리 이야기’
“이제 해로운 농담은 끝내야 합니다. 그런 코미디는 이제 안 하겠습니다.”
10년 넘게 코미디 축제의 ‘대세’로 활동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코미디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인물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웃기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웃기는 방식을 바꾸겠다는 의미다. 주인공은 호주 출신 스탠드업 코미디언 해나 개즈비. 그는 2018년 넷플릭스에서 방영한 ‘해나 개즈비: 나의 이야기’(원제 ‘나네트’)로 미국 방송계 최고 권위의 에미상을 수상했다. 책은 자기 비하적 유머를 구사하던 개즈비가 왜, 어떻게 ‘새로운 개그’를 발명하게 됐고, 코미디의 새로운 고전이라 불리는 ‘코미디 같지 않은 코미디’ 쇼 ‘나네트’가 탄생하게 됐는지를 회고한다.
책은 강력하고 흥미로운 스토리 전개와 함께, 예상치 못한 대목에서 분노와 웃음을 유발한다. 한 성공한 코미디언의 자전적 에세이이면서 동시에 신랄한 농담이 가득한 여러 편의 ‘스탠드업 코미디’인 셈이다. 오빠의 상상 속 친구들과 친해지고 싶었던 아동기부터 1990년대 말까지도 동성애가 범죄였던 호주의 시골에서 보낸 청소년기, 스스로 ‘뚱뚱하고 못생긴 레즈비언(a fat, ugly dyke)’이라 위악을 부리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희생양 삼는 코미디를 답습하던 시절 등, ‘나네트를 향한 열 걸음(Ten steps to Nanette)’이라는 원제 그대로, 그의 삶과 일이 오롯이 담겼다.
그가 ‘웃기는’ 방법을 전면적으로 바꾸게 된 건 지독한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강한 열망 때문이었다. 성 정체성과 외모 탓에 어린 시절부터 늘 젠더 폭력에 노출됐던 개즈비는, 스스로 비하와 혐오를 일삼으며 자신을 외면해왔다. 그러나 자폐와 ADHD를 진단받고, 이를 인정한 후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자기만의 서사를 만들기 시작한다. 세상의 수많은 코미디언이 쉽게 타협해 버리는 방식, 그러니까 누군가를 깎아내리고 자신의 약점(타인들의 것이기도 하다)을 희화화하는 것이 결국 자신을, 타인을, 사회를 해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는 손쉬운 농담 대신, 상처와 수치심을 진정성 있게 털어놓기로 하는데, 이때 돌파구가 되어 준 건 미술사였다고 한다. 온갖 미술사 책을 섭렵하며 개즈비는 예술과 유머, 그리고 우리의 몸에 대한 남성 중심적 시선을 벗어나게 되고, 어떤 존재도 소외시키거나 모욕하지 않고, “수년간 가장 많이 회자되고, 언급되고, 공유된 코미디(뉴욕타임스)”를 창조하게 된다. 코미디의 기본은 반전과 펀치라인(핵심이 되는 구절)이 아니던가. 이를 적절히 구사할 줄 아는 개즈비는, 자서전 역시 자신이 지향하는 코미디처럼 썼다. 노련하고 섬세하고, 잘 짜여져 있다.
호주에선 유명인이었으나, 개즈비는 미국에선 넷플릭스 수혜를 입은 ‘깜짝 스타’로 여겨졌다. 에마 톰슨도 개즈비의 광팬으로 알려져 있는데, “개즈비는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힘과 재능을 지녔다”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개즈비를 더 잘 알고, 더 잘 표현하는 건 개즈비 자신이다. 책에 따르면, 그는 이런 사람이다. 조디 포스터가 함께 사진을 찍자 조르고 제니퍼 애니스턴이 ‘알현’을 청하는, 에바 롱고리아의 정원에서 펼쳐진 에미상 행사에서도 자신의 발밑에 깔린 물체에 가장 집중하는, ‘독특하고’ ‘웃기는’ 인물이다. 주의력 과다에 무질서한 정보 처리를 수행하는 ‘비전형적 두뇌’를 가진 그는, “왜 이런 야외 행사에 흰색 카펫이 깔려있지”를 내내 고민한다. 화려한 행사 속 주인공인 그의 머릿속이 온통 카펫뿐이라는 걸 알게 될 때 터지는 웃음과 즐거움. 이것은 그의 단점이었으나, 타인과 ‘다른’ 특징이었고, 이제는 ‘개즈비식 코미디’를 이루는 최고의 장점이 된 것이다.
개즈비의 코미디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유머, 자아와 겸양, 분노의 용법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는 록산 게이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책은 개즈비와 비슷한 병리적 현상을 겪었거나 성소수자, 창작자들에게만 와 닿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과의 불화를 겪어본 누구라도 공감할 ‘우리의 이야기’로 환원된다. 그리고, 책 제목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다. 개즈비가 자신의 쇼에서 전심을 다해 전하는 바로 그 말처럼. “차이를 대면하면 새로운 걸 배우지만, 차이를 외면하면 아무것도 못 배웁니다.” 568쪽, 2만3000원.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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