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대륙’ 없었다면 ‘만유인력 발견’도 없었다?[북리뷰]

나윤석 기자 2023. 3. 31.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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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의 반쪽사
제임스 포스켓 지음│김아림 옮김│블랙피쉬
‘근대과학 유럽서 탄생’에 반기
“여러 지역문화 교류 산물” 주장
‘뉴턴, 사과서 영감’ 일화와 달리
신대륙 탐험 덕, 중력법칙 발견
천동설 모순을 먼저 지적한 건
코페르니쿠스 아닌 이슬람학자
아인슈타인, 인도학자 영향받아
18세기 중국·일본·네덜란드 학자들의 과학적 교류를 묘사한 그림. 블랙피쉬 제공

전통적 과학사가들은 근대과학이 유럽에서 ‘발명’됐다는 관점을 고수해왔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과학 혁명을 촉발했고, 19세기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거쳐 20세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이르러 근대과학사가 완성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국 워릭대 과학기술사 교수인 제임스 포스켓의 ‘과학의 반쪽사’는 이런 관점이 완전히 틀렸다고 주장한다. 15세기 아즈텍 제국의 식물원부터 오늘날 인공지능(AI) 연구까지 500여 년의 역사를 가로지르며 근대과학은 여러 지역 문화가 섞이고 스며든 교류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코페르니쿠스보다 먼저 ‘천동설’의 모순을 발견한 건 이슬람 천문학자였고, 아인슈타인은 인도 물리학자로부터 양자역학의 영감을 얻었으며, 아이작 뉴턴이 발견한 만유인력의 바탕엔 아프리카 대륙이 있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한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인류의 눈부신 과학적 성취를 단순히 ‘세계화의 승리’로 포장하는 대신 그 안에 숨은 착취와 불평등의 그늘까지 짚으며 반쪽짜리가 아닌 ‘완전한 과학사’를 재구성한다.

책의 새로운 시각은 과학 통사의 출발점을 유럽이 아닌 15세기 라틴아메리카 대륙에 자리한 아즈텍 제국으로 삼은 것에서부터 드러난다. 당시 아즈텍 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의료 체계를 갖추고 있었고, 자연계에 대한 정교한 이해를 바탕으로 용도에 따라 장식용과 약용(藥用)으로 분류한 식물원을 유럽보다 한 세기나 앞서 세웠다. 아즈텍 제국의 지식과 문명은 뒤이어 이곳을 정복한 스페인 왕실에 의해 유럽에 전파됐다. 세계인들이 오늘날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토마토’와 ‘초콜릿’이라는 단어는 아즈텍인들의 나우아틀어(語)에서 유래했다.

16세기 후반 이스탄불 천문대의 모습. 블랙피쉬 제공

근대 천문학의 토대를 닦은 건 이슬람 문명이었다. 이슬람 통치자들은 매일 다섯 번 행하는 기도 등 종교의식에 대한 정확한 시간 측정을 위해 천문학에 막대한 후원을 했다. 덕분에 9세기 아바스 왕조에선 대수학과 광학 법칙의 발견이 이뤄졌고, 우즈베키스탄 지역에 위치한 사마르칸트에서 제작된 ‘술탄의 천문학 표’는 이후 150년간 가장 정확한 천문학 자료로 위상을 누렸다. 9∼14세기가 이슬람의 ‘황금시대’로 불리는 이유지만, 저자는 이 개념 역시 시급히 수정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황금시대라는 개념은 역설적으로 중세 직후 이슬람 과학이 쇠퇴기에 접어들었다는 해석을 담고 있으나 실제로는 15세기 이후 실크로드와 함께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가 무역 네트워크로 연결되며 르네상스와 과학 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코페르니쿠스는 사마르칸트에서 수입한 아랍어 저작으로부터 지동설의 아이디어를 얻었고, 유럽 선교사들은 이슬람 천문학을 중국 베이징(北京)의 근대 과학기관인 ‘흠천감’에 이식했다.

유럽의 제국주의 경쟁이 시작된 18세기는 과학사에 빛과 그림자를 함께 남겼다. 저자는 뉴턴이 머리에 떨어진 사과에서 영감을 얻어 만유인력 이론을 정립했다는 일화가 사실과 다르다고 꼬집는다. 만유인력 이론이 담긴 뉴턴의 고전 ‘프린키피아’에는 프랑스 천문학자 장 리셰르의 실험이 나온다. 제국의 후원을 받은 리셰르는 남아메리카 카이엔과 서아프리카로 탐험을 나서 추 길이가 같다면 진자시계가 프랑스와 남미, 아프리카에서 각기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뉴턴은 이 실험을 바탕으로 ‘북쪽 지방에선 적도에 비해 중력이 커진다’는 만유인력 법칙을 입증했다. “제국주의의 탐험이 없었다면 근대과학의 계몽주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엔 노예무역이 절정에 달했는데, 놀랍게도 근대과학사의 숨은 주역 중에는 농장에서 온종일 착취당한 아프리카 노예도 있었다. 가나 땅에 거주하다 네덜란드 식민지 수리남으로 끌려온 한 노예는 식물성 약재로 말라리아 열병 치료제를 만들어 자유의 신분을 얻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과학자 중 한 명이었던 칼 폰 린네는 이 노예가 발견한 관목 표본을 자연사 분류에 관한 명저 ‘자연의 체계’ 개정판에 반영했다. 이와 함께 영국 왕실 주치의 한스 슬롯을 비롯해 수많은 과학자와 의학자 역시 식민지 노예의 경험적 지식에 의존해 연구를 발전시켰다. “18∼19세기 과학은 필연적으로 제국주의, 노예제, 전쟁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저자는 다윈이 창시한 것으로 알려진 진화론 역시 제국주의 시대부터 이어진 역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프랑스 박물학자 에티엔 생틸레르는 프랑스가 침공한 이집트의 고대 무덤에서 발견한 각종 동물의 미라를 통해 진화론 아이디어를 제시했고, 중국 명나라의 ‘본초강목’에도 진화 사상이 녹아 있다는 것이다.

책은 미국·아시아·라틴아메리카가 냉전 시기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유전학 분야에서 협업한 역사를 보여준 뒤 각국이 AI 등 첨단산업을 둘러싸고 각축전을 벌이는 오늘에 이른다. 저자는 현대 과학계가 ‘세계화와 민족주의의 기묘한 결합’에 의해 작동한다고 진단한다. 예컨대 최강국 패권을 놓고 미국과 경쟁하는 중국은 AI 개발을 위해 아프리카 짐바브웨 등에 안면 인식 소프트웨어를 공급하고 있는데, 인권 의식이 부족한 후진국 특성을 이용해 광범위한 데이터 수집에 나설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근대 과학사가 ‘교류와 착취’라는 모순적 바탕 위에서 구축된 것을 고려하면, 현대 과학이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선 세계화와 민족주의의 긴장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앞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완전한 과학사’를 넘어선 ‘공정한 과학사’라는 통찰이 담긴 메시지다. 536쪽, 2만1000원.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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