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첫돌 ~ 노년’ 그린 평생圖… 지방 하급관리 30년 이력 담기도[박정혜의 옛그림으로 본 사대부의 꿈]

2023. 3. 3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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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혜의 옛그림으로 본 사대부의 꿈 <12> 이력도
1860년경 태어난 문창석의 10 ~ 39세 행적 담은 ‘이력도’… 선정 베푼 지방수령 기리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
10폭 병풍에는 고난극복·효도·혼례·과거급제·군수부임·시찰사활동 등 담겨… 일반적인 평생도에 부합
조선 하급 관리를 지낸 문창석이라는 인물의 ‘이력도’. 10세부터 39세까지 이력을 담은 10폭 병풍 중 왼쪽부터 2폭(그림 1), 5폭(그림 2), 8폭(그림 3), 9폭(그림 4), 10폭(그림 5)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대부분 평생도는 첫돌부터 노년까지 양반관료들이 걷고 싶었던 이상적인 인생행로를 내용으로 한다. 처음에는 문관의 일생을 주제로 출발했지만, 이상적이라고 여겨지는 무관의 일생도 그려졌으며, 특정 인물이 실제로 살아온 인생 여정도 시각화되기 시작했다. 권세가 높고 고관을 지낸 인물이 아니라도 스스로 지나온 일생을 자전적으로 남기거나, 자손이 조상의 일생을 기리고 싶을 때 실명으로 평생도를 그리는 일이 생겨났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의 ‘이력도(履歷圖)’ 10폭 병풍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 각 폭 화면 위쪽에는 제목과 간단하게 그림을 설명한 별지가 붙어 있는데, 첫 폭에 “공(公)의 열 살부터 서른아홉 살까지의 경력을 그린 그림”이라고 적혀 있어서 주인공 생애 중에서 약 30년 동안을 주제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평생의 이력은 아니지만, 지방에서 하급 관리를 지낸 비교적 평범한 인물의 인생이 평생도 형식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이 병풍에 그려진 삶을 산 주인공은 1861년이나 1862년쯤에 태어난 문창석(文昌錫)이라는 인물이다. 화면에 쓰여있는 글을 ‘승정원일기’를 포함한 관찬 사료의 기록과 맞추어 본 결과다. 또 각 폭에 “문창석”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는 점도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그러면 제1폭부터 문창석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쫓아가 보기로 하겠다.

문창석은 유력한 가문에서 태어나지는 못했지만 효심 깊은 좋은 성품을 타고났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집안 환경을 극복하고 주경야독하여 과거에 급제하였다. 제1폭은 춥고 먹을 것이 부족한 초겨울, 10세 된 어린 나이의 문창석이 동생과 함께 이웃의 밭에 버려진 나물거리를 주워다가 그것을 부모에게 드렸다는 내용이다.

제2폭도 어려운 환경에서 부모를 봉양하며 고난을 극복해 나간 이야기다(그림 1). 부모에게 맛있는 음식과 좋은 옷을 드리고 싶었던 문창석은 짚신을 만들어 몸소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길을 나섰는데, 피곤함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짐을 풀어놓고 소나무에 기대어 잠들어 버렸다는 일화가 2폭의 내용이다. 그가 소나무 아래에서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제3폭에서 짐작할 수 있다. 어릴 적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된 문창석은 마음을 굳게 먹고 낮에는 부모님을 봉양하면서 밤에는 사람들에게 빌린 책으로 독서에 온 힘을 쏟았다는 것이다. 독서에 매진했다는 시점이 관례를 치른 후라고 한 것을 보면 제3폭은 15세에서 20세 무렵의 일을 그린 것으로 여겨진다. 화면에서도 달이 높이 뜬 늦은 밤까지 촛불에 의지하여 책을 읽는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다.

문창석은 두 번 혼례를 치렀다. 첫 번째는 동래이씨와, 두 번째는 단양우씨와 혼인했는데 제4폭이 어떤 혼례를 그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산수도 병풍이 설치된 초례청에 신랑 신부가 맞절하려는 듯 서 있다. 문밖에는 신랑이 타고 온 백마와 일산을 든 마부도 보인다.

제5폭에는 과거급제 후 궐에 들어가 사은(謝恩)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님께 영친(榮親)했던 두 가지 일이 함께 그려졌다(그림 2). 화면 위쪽에는 상서로운 기운이 어려있는 경복궁이 배치되고 사은을 마친 문창석 일행이 광화문 앞을 지나 집으로 향하는 모습이다. 홍패와 부채를 든 광대와 삼현육각(피리 2, 대금, 해금, 북, 장구)으로 편성된 악대가 모자에 어사화를 꽂고 백마를 탄 문창석을 인도하고 있다. 집에 도착하여 부모님께 홍패를 드리고 절을 올리는 영친례의 모습은 화면 아랫부분에 그려졌다.

제6폭은 1894년 문창석이 섬진별장(蟾津別將)을 첫 관직으로 제수받고 입궐하여 사은하는 모습을 그렸다. 별장은 조선시대 지방의 산성이나 나루 등의 수비를 맡은 종9품의 무관직이다. 상서로운 기운에 가린 궁궐의 모습은 제5폭과 유사하며 오사모에 공복을 차려입은 문창석은 말을 타고 궁궐로 향하고 있다. 고생을 감내한 결과 첫 벼슬을 제수받았을 때의 심경은 “그 영광이 빛나는 해와 같다”는 말로 표현되었다.

제7폭과 제8폭은 남원부 운봉군수(雲峯郡守) 시절을 배경으로 한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문창석은 1896년 음력 6월부터 1897년 음력 12월까지 운봉군수로 근무했다. 1895년 남원부에 창설된 경무청(警務廳)에서 총순(摠巡)으로 일했을 때의 공적이 멀리 왕에게도 전해져 운봉군수에 임명된 것이다. 제7폭은 멀리 홍살문이 암시하는 운봉 관아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는 도임 행렬을 묘사한 것이다. 갈지자형으로 난 길을 따라 청도기(淸道旗)·순시기(巡視旗)·영기(令旗)·일산(日傘) 등 수령 의장, 악대, 기녀 등이 앞서고 그 뒤를 부인이 탄 가마와 아들을 데리고 문창석이 탄 가마가 따르고 있다.

제8폭에는 1899년 호남시찰사(湖南視察使)에 임명된 문창석의 활동을 그렸다(그림 3). 화면 윗부분에는 문창석이 남원의 교룡산성(蛟龍山城)을 거쳐 목적지인 관가로 가는 모습이 그려졌다. 곁에서 시중을 들 하급 관리 2명이 뒤를 따를 뿐 문창석은 포의(布衣)에 떨어진 갓을 쓰고 짚신 신고 대지팡이 짚은 평범한 차림으로 위장하였다. 중간 부분에는 이속을 대동한 고을 수령이 호피 깔린 교자를 가지고 읍성 밖으로 나가서 신분이 밝혀진 문창석을 영접하는 광경이 그려졌다. 화면 아래 남원읍성 부분에는 누각 안에 자리한 어사 문창석이 궁핍한 백성들에게 골고루 쌀을 나누어 주어 그들을 구휼하는 광경이 묘사되었다. 쌀을 이고 지고 돌아가는 백성들은 흡족한 표정이지만 고개 숙인 고을의 수령은 시찰의 결과가 두려운 듯하다.

제9폭과 제10폭은 1899년 음력 6월부터 1900년 음력 12월까지 낙안군수(樂安郡守)로 봉직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제9폭은 낙안군수에 발령받은 뒤 부친을 부임지로 모셔 온 사실을 표현했다(그림 4). 호위 행렬을 꾸리고 두 아들과 함께 순천 금전산(金錢山) 너머까지 마중 나가서 부친을 모시고 고을로 들어왔다. 낙민루(樂民樓)가 표시된 낙안읍성을 화면 아래쪽 구석에 배치하고 금전산의 금강암(金剛庵), 성북촌(城北村) 등을 표시하여 멀리까지 부친을 마중 나갔음을 나타냈다.

제10폭은 한 줄기에서 난 두 갈래 벼 이삭이 낙안에 출현하자 농부가 이를 문창석에게 바쳤다는 내용으로 이 병풍의 절정을 이룬다(그림 5). 서화(瑞禾), 즉 가화(嘉禾)는 통치자가 선정을 베풀 때 나타나는 길조다. 이를 기념하여 군민들과 경사스러운 잔치를 베풀고 백일장을 열어 많은 선비들이 글재주를 겨루었다고 한다. 화면 위쪽의 서화연(瑞禾宴) 부분을 보면, 농부가 두 개의 이삭이 달린 벼를 바치고 건물 안에 문창석과 두 아들, 그리고 고을의 사림(士林)들은 술과 음식을 나누며 이 경사를 축하하는 연회를 즐기고 있다. 연회가 열리는 건물 마당에는 석류나무, 오동나무, 소나무, 괴석, 국화 등 길상의 식물들을 에워싸듯 배치하여 이날의 상서로운 조짐을 강조하였다. 그 아래에는 백일장 장면을 그렸다. 마당 가운데 소고풍(小古風), 대고풍(大古風), 시(詩), 부(賦) 등 4가지 종류의 시문으로 제시된 시험문제가 걸려 있다. 대청에서 문창석은 답안지를 점검하고 머리에 꽃을 꽂은 급제자들은 각자 음식상을 받았는데 이들의 연령대는 제각각으로 보인다. 준비된 음식상이 속속 대청으로 옮겨지는 가운데 삼현육각의 반주에 맞추어 한바탕 춤판이 벌어지는 분위기는 흥겹기만 하다. 장원을 한 답안지가 누각 한쪽에 큼지막하게 게시되어 있고 누각 위에서는 낙폭지(낙방한 답안지)를 나누어주고 있다. 여러 방면에 요긴하게 쓰일 낙폭지를 서로 받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모습이 흥미롭다.

‘이력도’ 병풍은 첫돌 장면 대신 주인공의 효심을 나타내는 일화로 시작하지만 글공부, 혼례, 관직 생활 등 대략적인 내용 구성은 일반적인 평생도와 부합한다. 문창석은 낙안군수를 지낸 이후에도 회인, 여수, 함열, 장기 등 주로 호남지방에서 1904년까지 군수를 역임했다. 그의 몰년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이 병풍에는 문창석의 전체 일생이 담기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이 병풍은 관내의 서화 출현과 백일장 개최를 계기로 선정을 베풀었던 훌륭한 지방 수령을 기리는 뜻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문창석 본인이 스스로를 기념했다기보다 그의 이력을 기억하려는 낙안 군민들이 선정을 베푼 군수를 위해 제작한 작품이 아닐까 한다. 이 병풍은 지방에서 활동하는 화사의 작품이 분명하다. 중앙 제도권의 미술교육을 받은 화가만큼의 세련되고 능란한 표현력은 부족하지만 그 지역을 잘 아는 화가로서 나름대로의 사실적인 묘사와 생기가 살아있다.

미술사학자·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시리즈 끝>

■ 경무청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관제를 개편함에 따라 포도청(捕盜廳)과 전옥서(典獄署)가 폐지되고 대신 경찰 업무와 감옥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설치 당시에는 경무사, 부관, 경무관 외에 서기관, 총순, 순검을 두었다.

■ 서화

상서로운 벼 이삭이라는 의미다. 주나라 당숙(唐叔)이 한 줄기에 여러 개의 이삭이 달린 벼를 얻어서 성왕(成王)에게 바치니 성왕이 이를 주공(周公)의 덕으로 돌렸다는 고사에서 비롯됐다. 정치와 자연현상은 긴밀하게 감응하여 군주가 통치를 잘하면 하늘은 길조의 징표로 이에 응답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상서로운 벼 이삭, 버섯, 구름, 동물이 출현하면 이를 상서로운 징표로 여겨 통치자에게 올리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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