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드라마] 거인이던 우리 아빠가 작아졌다! 도와줘 북한산!

신준범 2023. 3. 31.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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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능선

'드라마 북한산'은 소설적 상상력으로 풀어가는 코스가이드 기사다. 에세이나 현장 르포가 아닌, 가상의 인물이 산행을 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편집자-

"아빠 가만히 있지 말고 사진 찍게 만세 좀 해봐"라는 나의 주문에 기자봉 꼭대기에서 손을 번쩍 든 우리 아빠. 고집스럽지만 의외로 딸 말을 잘 듣는다.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고 했는데, 아빠가 죽을 때가 된 걸까? 참! 아빠에게 '짓'이란 말은 취소. 어쨌든 아빠가 변했다. 퇴직 후 몇 개월 동안 열심히 등산도 다니고, 친구도 만나러 다니던 아빠는 언젠가부터 집에서 나가질 않는다. "하루 술 마시면 이틀은 금주를 해야 간이 제 역할을 한다"고 버릇처럼 하던 말은 잊고선, 매일 술병을 비웠다.

TV 드라마를 보다 슬픈 장면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가 하면, 내가 야근을 하거나 회식이 있는 날이면 지하철역에 나와 기다리기까지 했다. 명언이나 잠언 같은 걸 적은 영상을 퍼와 하루에도 몇 번씩 카톡으로 보내 일의 흐름을 끊었다.

1960년대 생인 아빠는 지방에서 태어나 서울로 올라 온,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엄마가 아무리 맛있는 요리를 해도, '맛있네'가 아닌 '나쁘지 않네'가 최고의 칭찬이던 분이다. 늘 "너는 장녀니까~, 너는 장녀가 되어서 이것도 제대로~, 장녀인 네가~"하는 말을 평생 달고 살았다.

한참 구직 활동을 할 때 자기 소개란에 '자상한 아버지와 가정적인 어머니 사이에서 장녀로 자라 책임감이 강하고'라고 썼지만 실은 아니었다. 아빠는 가부장적인 사람이었고, 엄마는 아빠와 결혼하고서 일을 포기했다. 아빠는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 했고, 엄마는 "당신이랑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라며 문을 "쾅" 닫고 들어가곤 했다.

그러면 며칠은 집안에 침묵만 감돌았고 나의 어설픈 요리 실력이 발휘되었다. 그럴 때면 아빠는 밥 한 공기를 다 비우면서도 "국이 짜다" 혹은 "국이냐 물이냐"하는 말을 남겼다.

아빠는 일간지 기자였다. 늘 내가 아침에 눈을 떠 화장실로 가노라면 조간신문을 펼쳐 심각하게 읽고 있었다. 무슨 소리가 들려서 보면, 신문이나 뉴스를 보며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기사를 읽다 분통이 터지는지 화를 낼 때도 있었지만, 절대 욕을 하지는 않으셨다. 아빠의 영향인지 나도 욕을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어릴 적 빼곤. 중학교 때 학원을 빼 먹고 여러 날 친구랑 놀러 다니다 엄마에게 들통 나, 매를 든 엄마와 언쟁을 벌이다 실수로 욕을 하고 말았다.

아빠는 그때 조금 충격을 받으셨다. '말 잘 듣는 착한 딸'로만 알았던 장녀가 욕을 하다니, 그것도 엄마에게. 아빠가 그날처럼 화를 낸 적은 없었다. 아빠는 "엄마에게 육두문자를 하는 자식을 패륜아라고 한다"며 "아빠도 너에게 쌍욕을 하고 싶을 만큼 화 난 적이 여러 번 있지만, 욕을 한 적은 없었다. 가족 간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더 이상 가족이 아니다"라고 또박또박 말한 후 내 방에 가서 옷과 교과서를 꺼내 가방에 짐을 쌌다.

1시간을 헉헉 거리며 올라 처음 경치가 열린 곳에서 숨을 돌리는 아빠와 나.

실제로 나는 그날 아빠를 따라 보육원에 갔다. 원장실에 들어간 아빠는 아이를 맡기는 절차를 물었고, 진지한 상담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복도에서 기다렸다. 그 10분이 몇 시간 같았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참으려 해도 계속 눈물이 흘렀다.

다시는 욕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 반성문 10장, 3개월간 용돈 삭감, 주말 설거지 당번, 화장실 청소 처분을 받으며 마무리 되었지만, 한 달 동안은 누가 옆에서 욕하는 소리만 들려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지막 10장째 반성문을 채우던 날, 아빠는 짧게 한마디 했다.

"무조건 다 받아주는 게 가족이 아냐. 배려하고 예의를 지키는 게 가족인 거야. 막상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네가 좋아하는 친구들은 큰 도움이 못 돼. 그때 나를 도와주는 사람은 가족 말고는 아무도 없어. 지금은 친구가 전부인 것 같아도… 살아보면 알게 될 거다. 그때뿐이란 걸."

아빠의 말에 수긍할 수 없었다. 아빠야말로 친구나 회사 사람들과 어울리느라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기 일쑤에, 쉬는 날은 엄마를 도와주거나 우리와 제대로 놀아준 적은 없었다. 아빠야말로 주말에 잠만 자고, 자기감정대로 하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맞춰"라고 말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정이 떨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돈을 벌면 어른다운 걸까? 말수가 적고, 덜 웃으면 어른스런 걸까? 욕을 하지 않으면 존경 받는 어른이 되는 건가? 아빠야말로 어른다운 걸까? 가족의 잘못은 지적하면 안 되는 건가? 철없는 시절의 내 잘못도 있지만, 말을 하지 않을 뿐 반발심은 깊은 곳에 쌓여 있었다.

대학 진학도 문예창작학과를 가서 TV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21세기는 글 쓰는 직업 가지면 굶어죽기 딱 좋아"라는 말로 내 뜻을 꺾었다. 아빠는 "은행만큼 여자가 돈 잘 벌고, 안정적인 곳은 없다"며 "장녀면 동생 앞에 모범이 돼야지"라며 회계학과를 추천했다.

보육원으로 보내기엔 현실적으로 어려운 나이였지만, 그날의 일은 여전히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아빠 말대로 하지 않으면 쿰쿰한 냄새가 나던 그 어두운 복도에 또 혼자 남게 될 것만 같았다. 지금도 컨디션이 안 좋을 때면 보육원 복도 끝에서 검은 그림자가 천장에 매달려 쫓아오는 악몽을 꾸곤 한다.

장군바위 끄트머리에 선 아빠와 나. 어정쩡하게 거리를 유지한 게 꼭 우리 사이 같다. 내가 가자고 했지만 기자능선 경치가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다.

아빠 덕분이었는지 대학을 졸업하고 운 좋게 외국계 은행에 취직했지만, 디지털이 대중화되면서 점포를 대폭 줄이게 되었다. 결국 본사 콜센터로 발령 받아 폭언권법을 휘두르는 고객에게 무심권법으로 대응하면서 전화상담을 하고 있다.

아빠는 아침부터 술을 마시는 사람은 아니었다. 술을 좋아하긴 했지만, 술 먹고 행패를 부릴 정도로 실수를 한 적은 없었다. 일주일 전 아침에 출근을 하는데, 아빠가 충혈된 눈으로 방에서 나오더니 내게 90도로 꾸벅 절을 했다. 확 풍기는 소주 냄새에 속이 메스꺼울 지경이었다. "아빠, 눈 뜨자마자 술 드신 거야?"

"우리 딸 출근하는 거 보고 싶어서 나왔지. 기자 정신! 기자는 역사를 바꿀 수 있다! 딸꾹."

"아빠 제발! 엄마 일어나면 식사하고 푹 주무셔."

아빠가 취하면 나오는 단골 레퍼토리, '기자 정신'이다. 아빠는 고지식한 사람이다. "비록 국장도 못 달고 나왔지만, 떳떳한 사람이야"라고 큰 소리를 치다가도 "우리 딸, 아빠가 끼니는 거르게 한 적 없지만 이것밖에 못해 줘서 미안하다"고 불쑥 사과하곤 했다. 아빠의 세세한 사연이야 모르지만 대쪽같이 사느라 박봉의 급여 그 이상은 해준 적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의미쯤은 알고 있다.

우울증이 의심되는 아빠를 어찌할까

학창 시절, 살 수 있는 것보다, "다음에 사줄게"나 혹은 "장녀가 되어서 왜 너밖에 모르니"하는 말을 듣기 싫어 포기하는 것이 많았다. 기자랍시고 폼만 잡는 것 같은 아빠가 무능력하게 보였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직장 생활해 보니, 직장인으로 하루하루 버티는 게 대단한 일이었다.

한 직장을 30년 넘게 다녔다는 것만으로 아빠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물론 엄마 몰래 친구에게 돈을 빌려줬다가 날린 일이나, 주식 투자로 몇 년치 적금이 증발한 걸 생각하면, 경제적인 감각은 뛰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미안하다"는 말은 한 적 없었는데, 퇴직 후 아빠의 자신감이 바닥까지 떨어지고 있음의 반증이었다.

아빠가 식사터로 골라준 7성급 호텔 레스토랑 자리. 식사를 마치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벼랑 끝에 앉아서 골똘히 생각에 잠긴 아빠의 뒷모습.

나는 등산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지난 북한산 잠룡동 산행으로 나름 산행의 재미에 빠져 있었다. 북한산이 아빠를 구원해 줄 것 같았다. 그래, 같이 산행을 하는거다. 어떤 코스로 갈까 포털 지도를 보다가 고민할 것도 없이 목적지를 정했다. 기자능선이다. 왜 기자능선인지, 여기서 기자가 과연 내가 생각하는 기자란 의미가 맞는지 모르지만 거리도 짧고 만만해 보였다.

아빠는 의외로 흔쾌히 승낙했다. 어느 코스로 가는지 자세히 묻지도 않고, "그래"하고 짧게 답하고선, 수요일부터 등산화를 꺼내 살피고, 등산복을 찾아 놓고, 배낭을 꺼내두었다. 술도 안 드시고 며칠 방에서 뭔가 글을 쓰는 것도 같았다. 주중에 일이 피곤하면 산행을 미룰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아빠가 산행 3일 전부터 거실에 배낭을 꺼내 놓고 조금씩 준비를 하는 통에 차마 실망시켜드릴 수 없었다.

대신 짧은 코스라 조금만 늦잠을 자고 점심쯤 출발하고 싶었다. 기자 출신 아니랄까봐 아빠는 "산행은 일찍 시작해서 일찍 끝내는 게 안전해"라고 일침을 놓으시곤 "피곤한데도 산에 가는 게 용하다"며 승낙하셨다.

금요일 퇴근 길, 아빠는 여느 때처럼 골목 구석에서 어정쩡하게 돌아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릴 땐 그렇게 아빠가 엄청 커 보였는데, 왠지 작아진 것만 같았다.

산행 준비를 하나도 해놓지 않고 잤던 탓에 나는 눈을 뜨자마자 씻고 산행 준비부터 했다. 밥을 먹고 가야 한다는 엄마의 말을 뿌리치고, 씨리얼에 두유를 부어 간단히 먹고 나섰다. 1시간 전부터 눈에 띄는 원색 등산복을 차려입고 배낭을 들었다 놨다 하는 아빠가 신경 쓰여 여유 부릴 틈이 없었다. 아빠는 컵라면과 보온병을 챙겼다며, 김밥만 사면 된다고 했다.

드디어 향로봉 정상. 오후 4시가 넘어서인지 전세 낸 듯 산이 조용했다.

"아빠, 간식 몇 개 넣었는데 무슨 컵라면에 김밥까지 먹어요? 딸 살 쪄서 시집 못 가면 어쩌려고 그래요."

"예전에 백운대 갔을 때였나, 신년 특집으로 사회면 기사를 취재하러 갔어. 그때 정상에서 추워서 동동 발을 구르고 있는데, 사진기자가 김밥과 컵라면을 가져온 거야. 조금 얻어먹었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죽을 것 같았는데, 살 것 같더라고. 그때부터 등산 갈 땐, 김밥과 컵라면을 빼놓은 적이 없지."

기자들 살던 마을 뒷산이 기자능선?

집 앞 프랜차이즈 김밥집에 가자고 하니, 아빠는 가는 곳이 있다고 했다. "시장 김밥만큼 맛있는 김밥은 없다"며 옛날 사람 같은 말만 하며, 작은 것 하나도 고집을 부렸다. 산행하자고 제안한 것이 조금 후회되었지만 여기서 돌아갈 순 없었다. 연신내역 연서시장에서 김밥을 포장해서 다시 버스를 타고 산 입구를 찾았다. 스마트폰 앱으로 길을 찾는 나와 달리, "여기 있던 집들이 재개발로 다 사라졌구나. 하나도 알아보지 못하겠네"라고 혼잣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빠, 여기 산행해 봤어?"

"그럼. 10년도 더 되었지만 선배들 따라 몇 번 왔지. 기자촌 살던 선배 댁에 밤에 쳐들어가서 진탕 술 마시고 다음날 해장한다고 여기 능선에 올라 막걸리 마신 적도 있고."

"기자촌이 뭐예요?"

"옛날에도 신문기자들 월급이 워낙 짜서 생계에 곤란을 겪는 사람들이 많았지. 당시 서울시장이 어렵게 사는 언론인들에게 특별히 저렴한 값에 택지를 특별분양해 주겠다고 기자협회에 제안을 한 거야. 처음 제안한 곳이 강남의 논현동이었는데, 이 땅을 본 기자들이 어떻게 이런 곳에 사람이 살 수 있냐고 거절했지. 지금처럼 개발되기 전이었으니 장화를 신지 않으면 걷기도 어려운 곳이었거든. 다시 제안한 곳이 여기 북한산 기슭 진관내동이었고, 기자들이 이주하면서 기자촌이라는 이름이 생겼어. 지금은 재개발로 다 사라졌지만 말이야."

빨리 가자고 무언의 재촉을 하는 아빠. 장군바위 경치가 멋있어서 사진 찍느라 시간이 걸렸다.

"기자들은 어쩌면 그렇게 다 아빠 같을까. 굴러온 복을 걷어차고 말이야."

"장사치는 이윤을 남기는 게 업이고, 기자는 진실을 추구하는 게 업이야. 알 권리와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바위능선 아래 터가 얼마나 멋있게 보였겠니."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선비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은 우리 아빠밖에 없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절대 아빠 같은 사람은 만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수십 번은 한 것 같다.

산행 경력은 아빠가 위지만, 등산앱으로 길 찾는 능력은 내가 한수 위다. 대장처럼 앞장서서 산길을 안내하며 아빠를 끌었다.

곧장 능선으로 올라붙는지, 가파른 산길이 10분 넘게 이어졌다. 천천히 가는데도 아빠는 따라오질 못했다. 약점을 찾은 나는 "아빠, 이번 기회에 술담배 좀 끊어요. 어떻게 등산 시작한 지 6개월도 안 된 저보다 느릴 수 있어요?"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한동안 숨을 고른 후 아빠는 "등산은 몸으로 읽는 독서란 걸 알고 있니"라고 물었다. 독서 습관이 다르듯 어떤 이는 천천히 정독하고, 누구는 빠르게 속독하는데, 느끼는 것은 제각각이란 것. 뭔가 공감이 되면서도 자기 합리화 같았다.

"그럼, 아빠는 산을 정독 중인거야?"

"아니, 난독에서 헤어 나오는 중이란다."

오후 1시가 넘은 시간, 산을 오르는 사람보다 하산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북한산성 입구에 비해 사람이 워낙 적어 처음엔 '이 길이 맞나' 싶었지만 산길은 선명했고, 이정표를 만나자 의심은 사라졌다. 무뚝뚝했던 아빠는 갈수록 여성화되는 걸까? 1시간 만에 경치가 터지는 바위에 올라서자 "우리 딸이 이렇게 멋진 경치를 선물해 주는구나"라며 웃음 지었다.

아빠에 대한 짜증, 미움, 안타까움, 걱정이 엉켜 복잡했는데, 순식간에 지워졌다.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일단 지금은 없다. 얼마 만에 보는 아빠의 웃음인지, 덩달아 내 얼굴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발아래 은평구와 서대문구 빌딩숲이 펼쳐졌다. 저 건물 속 사람들은 분명 콜센터에 전화해서 신경질적인 말투로 언성을 높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아휴~ 어디 장비 같은 남자 없나. 분노조절 장군들 싹 쓸어버리면 좋을 텐데."

"네가 많이 힘들긴 힘든 게로구나. 근데 관우나 제갈공명이 아니고 왜 하필 장비냐?"

"장비는 미련하지만 배신하지 않잖아요. 예측 가능하고, 일편단심이잖아요."

"일리가 없지는 않다만 나는 무식하고 용감한 사위는 싫다. 제갈량처럼 영리하고 선한 근본이 있다면 몰라도."

슬슬 배가 고파와 일찍 컵라면과 김밥을 먹을까 했으나, 아빠는 "여기 오면 먹는 곳이 정해져 있다"며 간식을 꺼내준다. 난독에서 탈출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아빠가 앞서가기 시작했다. 바윗길이 아직은 두려워서, 속도가 느려진 내 탓도 있었다.

"그리로 가면 위에서 디딜 곳이 없어. 아빠 따라와"

역시 경험은 젊음으로 넘을 수 없던가. 아빠의 자신감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다. 성공이다. 속으로 살짝 환호했다.

"이제 기자능선의 하이라이트야."

"우와! 너무 멋있어요."

향로봉에서 본 북한산 주능선. 왼쪽으로 백운대와 오른쪽으로 문수봉, 보현봉이 기막힌 산세를 이루었다.

입이 떡 벌어진다는 건 이런 것. 달 표면 같은 거대한 바위가 펼쳐지고 그 위에 올라서자 멀리 백운대, 만경대가 판타지 영화에 나오는 성처럼 솟아 있었다. 우아한 능선의 흘러내림과 아찔한 낭떠러지, 빽빽한 빌딩숲, 저 멀리 희미하게 드러나는 한강. 미세먼지가 있음에도 충분히 감탄할 만한 장소이자, 경치였다. 이 장소는 마음속에 저장해 뒀다가 장비 같은 남자친구가 생기면 끌고 올라오기로 그 짧은 시간에 결정했다.

이 바위는 이제부터 우리 아빠바위!

이렇게 멋있는 장소의 이름이 궁금했는데, 이름은 멋있지 않았다. 보통 장군바위 혹은 대머리바위라고 부른다는 것. 사람들의 빈약한 상상력에 실망했지만, 어차피 이름은 부르는 자의 몫이다. 나는 '아빠바위'라 붙였다. 비록 정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단단한 뜻을 지켜왔으니 말이다. 차마 낯부끄러워 말은 못 했지만 언젠가 알려드리고 싶었다.

오를수록 멋있는 바위와 시원한 경치가 나왔으나, 배가 고파 "아빠 아직 멀었어"하는 말만 세 번째 내뱉고 있었다.

"다 왔네. 7성급 호텔 레스토랑으로 안내할 테니 조금만 힘내."

벽처럼 높은 능선을 올라서면 다음 능선이 있고, 올라서면 다음 벽이 있었다. 아! 세상살이가 이런 건가. 나는 이제 첫 번째 능선 한 굽이 비탈에서 아등바등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오르내림마냥 즐거움과 허탈함이 등락을 계속 하는데, "환영합니다. 손님"하는 말이 들렸다.

주능선인 향로봉이 가깝게 보이고, 멀리 문수봉과 보현봉이 우락부락한 파워를 과시하고 있었다. 호텔 별 개수는 모르지만, 신선이 있다면 이 경치 좋은 소나무 너럭바위에 앉아 차를 마실 것 같았다. 오후 3시가 넘었고, 등산객 없이 고즈넉했다. 마치 우리를 위한 자리 같았다.

언제 준비했는지 아빠는 휴대용 방석과 매트를 펴고 음식을 꺼냈다. 내가 재킷을 꺼내 입는 사이 컵라면 2개를 뜯어 스프를 넣고 보온병의 물을 부었다. 집에서 식사할 땐 가부장적인데 산에서 아빠는 자상했다. 바람이 없어 오래 머물기 좋았다. 까마귀가 다정한 부녀 사이가 부러웠는지 제자리에서 비행하며 한참을 바라보다 가곤 했다.

아빠 말대로 김밥엔 컵라면이 진리였다. 손과 귀가 차가웠는데, 따뜻한 국물을 마시자 몸이 화사한 빛깔로 변하는 것만 같았다. 영양분이 뇌 끝까지 전달되는지 마음이 온화해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아빠는 잔소리도 하지 않았다. 해가 뉘엿뉘엿 하고 흐르는 시간이 무게감을 갖는 느낌이었다.

"아빠, 나 장군바위, '아빠바위'라 이름 지었어."

까닭을 말하자, 아빠는 뭔가 복잡하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장녀가 이렇게 멋있는 산행에 초대해 줬구나. 내가 요즘 기운이 없었지. 퇴직하고 나서 언제부턴가 평생 믿었던 신념이 진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허탈감이 들었단다. 비록 가난한 월급쟁이 기자였지만, 양심에 어긋남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게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고. 기자 직함 내려놓고 나니 한없이 초라해지는 것만 같고. 너희들 고생시켜, 잘 못 산 것만 같고."

아빠를 위로해 드리고 싶었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배낭 깊은 곳에서 봉투를 꺼낸 아빠는 아무 말 없이 내게 건네주었다. "아빠는 돈이 어디 있다고 이런 걸 줘요"라며 고마워하는데, "돈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아빠가 펜으로 직접 쓴 편지가 들어 있었다. 고등학교 이후 손편지를 받아보긴 처음이었다. 바로 읽지 않았다. 1시간쯤 머물렀을까. 해가 뉘엿뉘엿해져 하산을 서둘러야 했다. 그래도 정상은 올라야지 싶어 주능선 갈림길에 닿자마자 향로봉 정상에 올랐다. 기념사진을 찍고 아빠가 주변 풍경을 찍으며 두리번거리는 사이, 편지를 꺼냈다. 궁금해서 더 이상 참기 어려웠다.

하산을 서둘러야 한다며 아빠가 먼저 걸음을 떼는데, 눈물이 와락 솟구쳤다. 참고 걸으려 했는데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러 시야가 흐려졌다. 바위에서 살짝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고, 나는 소리 내어 펑펑 울었다. 아빠는 달려와 "어딜 다쳤냐? 어디가 아프냐? 뼈가 부러진 것 같냐?"며 연달아 물으며 안절부절못했다.

"아빠, 나 괜찮아. 내 엉덩이 단단해"라고 말하자, 아버지는 가만히 곁에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디선가 따뜻한 바람이 불어와 편안히 감싸주는 것만 같았다.

딸에게 보내는 편지내 딸아 단단한 사람이 되어라.

최선을 다해서 뭐든지 잘하는 사람이 어느 순간 고꾸라지듯 추락하는 걸 너무 많이 보았단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내면이 단단한 사람이 되어라. 타인에게 보여지는 것에 신경 쓰기보다 내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슈퍼우먼이 되려하지 말고 너의 마음을 돌보는 데 늘 신경 써야 한다. 스스로를 절대 자책하지 말고, 부정하지 말고, 못난 아빠처럼 되지 말고, 자신을 사랑으로 끌어줘라.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 말아라. 실패는 너를 더 단단하게 해주고 성장시켜 준단다. 다만 실패를 습관처럼 받아들이지 말고 다음 번엔 궤도를 수정해서 도전해라.

손해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라. 내 이득만 취하지 않고 손해를 볼 줄 아는 사람은 시간이 걸려도 더 큰 것을 얻게 된단다.

배우자감은 돈이 없어도, 최악의 상황에 있어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너를 존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잘못했을 땐 대화로 인정하고 수정하며, 서로에게 더 좋은 배우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아빠 엄마도 사람일 뿐이다. 네게 모진 말로 상처를 준 것들 알고 있다. 네가 잘 크길 바라기 때문이었는데, 지나고 보니 후회되는 순간도 많았다. 미안하다.

아빠는 그리 살지 못했지만, 단단하면서도 사랑을 지닌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라.

2023년 3월 4일 너를 사랑하는 아빠가.

산행길잡이

기자능선은 북한산의 알려지지 않은 조망 명소다. 접근성도 편리해 연신내역에서 버스로 10분이면 기자능선 초입 '기자촌1구역 근린공원' 부근에 닿는다. 구기동이나 불광동에서 주능선에 올라 하산길로 기자능선을 택할 수도 있으나, 능선은 오르면서 봐야 책을 첫 페이지부터 읽듯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

신도중학교에서 하차해 기자촌공원지킴터까지 찻길따라 800m를 걸어야 한다. 북한산둘레길과 연계하는 것도 가능하다. 둘레길 8구간에서 기자능선 초입으로 연결된다. 기자촌공원지킴터만 지나면 거의 외길이라 길찾기는 어렵지 않다.

향로봉을 만나는 비봉능선에서 갈림길이 복잡하게 이어지므로, 하산길을 어디로 택할지 정해야 한다. 향로봉은 바위가 험해 정상까지만 갔다가 되돌아 나오도록 통제하고 있다. 향로봉에서는 다양하게 코스를 잡을 수 있는데, 족두리봉을 거쳐 불광동으로 내려가거나, 계곡을 거쳐 불광사로 내려가거나 문수봉으로 가거나, 구기동으로 내려갈 수 있다. 가장 짧은 하산 코스는 비봉탐방지원센터 방면인 구기동으로 내려가는 것. 갈림길 몇 곳이 헷갈릴 수 있으므로 이정표와 GPS앱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산행 거리는 4km로 짧지만 바윗길과 비탈이 많아 거리에 비해 시간을 넉넉히 잡아야 한다. 경치 좋은 전망바위가 많아 사진 찍고 즐기다보면 시간이 훌쩍 늘어난다. 산행의 하이라이트는 달표면처럼 굴곡진 대슬랩인 장군바위와 기자봉, 진관봉, 향로봉 정상부다. 주능선을 만나는 향로봉부터는 등산객이 많아 도시락을 먹는다면 기자능선 상에 자릴 잡는 것이 더 낫다. 장군바위, 기자봉, 진관봉은 별도의 표지석이 없다.

중간중간 바윗길이 있으나 초보자도 주의하면 갈 수 있다. 향로봉에서 비봉탐방지원센터 방면은 돌계단길이라 어렵지 않다.

교통

기자촌지킴터는 은평구 진관동 기자촌1구역 근린공원에서 가깝다. 연신내역에서 7211번, 720번 버스를 타고 10분 정도 이동해 신도중학교에서 하차하면 된다. 800m 정도 걸으면 기자촌1구역 근린공원이다. 공원 위쪽으로 들어서면 북한산 둘레길 8코스를 거쳐 기자능선 입구로 연결된다.

하산길인 비봉탐방지원센터에서 찻길 따라 800m 내려가면 승가사입구 버스정류장에 닿는다. 7212, 7730번 버스를 타고 경복궁역 방면 혹은 녹번역 방면으로 갈 수 있다. 불광역 방면으로 가려면 300m 정도 내려가서 구기터널삼거리의 버스정류장에서 7022, 7211, 7212번을 타야 한다. 출퇴근 시간 정체만 없다면 불광역까지 버스로 10분이면 닿는다.

기자능선 코스가이드

최고 고도

향로봉 정상 527m

난이도

★★ (산행 초반 가파르며 기자능선 바윗길 주의해야)

총 거리 & 소요시간

4km & 3시간

신도중학교 버스정류장~기자촌 1구역 근린공원~장군바위~향로봉~비봉탐방지원센터~승가사 입구 버스정류장

월간산 3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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