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언셀러 소설 따라잡으려 했던 ‘개미’ 과학책 / 최재천

한겨레 2023. 3. 31.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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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Book] 나의 첫 책]나의 첫 책 최재천 석좌교수
개미 인기에 놀라 쓴 ‘개미제국의 발견’
아즈텍개미의 ‘공동 건국’ 발견이 토대
곧 25주년…10만부 넘긴 베스트셀러
‘교양과학책 시대 열어’ 평가 소중해
최재천 교수 제공

내가 하버드대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하던 1983년 에드워드 윌슨 교수의 연구실에는 대학원생과 연구원이 족히 열댓 명은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연구실에 머무는 내내 개미만 들여다보고 개미 얘기만 했다. 잠꼬대를 하더라도 필경 개미 얘기를 할 것만 같았다. 그런 개미 소굴에서 나는 개미를 연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개미와 벌에 비해 사회성 진화 연구가 훨씬 덜 된 흰개미를 연구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흰개미의 사촌뻘인 민벌레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민벌레는 몸길이가 2㎜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고 희귀한 곤충으로서 열대 숲속에서 쓰러져 썩어가는 나무껍질 아래 오그랑오그랑 모여 산다. 그들을 연구하기 위해 코스타리카와 파나마의 열대 우림을 드나들던 어느 날 나는 대나무처럼 속이 비어 있는 트럼핏나무 묘목 안에서 함께 알을 낳아 기르는 아즈텍개미 여왕들을 발견했다. 임관부(canopy)에 다다를 만큼 키가 큰 트럼핏나무 줄기 안에는 언제나 한 여왕이 통치하는 하나의 개미제국이 들어 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피비린내 나는 정쟁이 도사리고 있다.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여왕개미들은 종종 여럿이 함께 알을 낳아 공동으로 일개미 군대를 양성하는 전략을 택한다. 그러나 서로 도우며 힘겹게 나라를 건립하고 나면 하나밖에 없는 권좌를 놓고 서로 물고 뜯어야 한다.

1984년 여름 이 운명 같은 아즈텍개미 건국 설화 현장을 발견한 나는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종(種)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한 살림을 차리는 예는 자연계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발견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끝내 민벌레 연구를 계속하기로 결정했고 아즈텍개미 연구는 1년 늦게 입학한 연구실 후배에게 양보했다. 양보는 했지만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내게 그는 공동 연구를 제안했고 우리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다. 박사 학위를 하는 데 7년이나 걸린 데 대한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실상 두 개의 박사 학위를 한 셈이다.

1994년 서울대 생물학과 교수로 부임하자 동물행동학이라는 재미있는 분야를 연구했다며 강연 요청이 밀려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재미있게 열정적으로 강연해도 질문은 그야말로 가뭄에 콩 나듯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개미에 관한 강연을 하는데 이게 웬일인가? 강연 중간에 여기저기에서 손을 드는 게 아닌가? 질문이 쏟아지는 것도 신기한데 질문의 수준이 상상을 초월했다. “개미와 인간이 대화할 수 있나요?” “개미 사회에도 종교가 있나요?” 10년 넘도록 개미를 연구했지만 나는 한번도 그런 질문을 떠올려본 적이 없었다. 강연을 마치고 나는 질문을 했던 분들에게 다가가 어떻게 그렇게 창의적인 생각을 하실 수 있느냐 여쭸다. 그 대답은 너무나 싱거웠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를 읽으며 궁금했던 걸 질문한 것이란다. 그러면서 그 소설도 읽지 않았으면서 어떻게 개미 박사라고 할 수 있느냐고 핀잔을 주길래 곧바로 책방으로 달려갔다. <개미>는 정말 흥미진진한 소설이었다.

에스에프(SF) 소설은 본래 과학적 사실과 허구가 적절히 배합되어야 흥미로운 법이다. 그러나 그후 개미 강연 때마다 내가 받는 질문은 거의 대부분 허구에 기반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개미에 관한 과학책을 쓰기로 했다. <개미제국의 발견>은 그렇게 탄생했다.

최재천 교수의 첫 책 ‘개미제국의 발견’

당시 이미 밀리언셀러로 등극한 <개미>를 따라잡을 속셈으로 겉장에 ‘소설보다 재미있는 개미사회 이야기’라는 문구를 새겨 넣는 만용까지 부렸건만 끝내 밀리언셀러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그래도 <개미제국의 발견>은 지금까지 거의 10만부 가까이 팔리며 과학책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이 책에는 판매 부수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있다. 1999년 1월 이 책의 발간에 이어 정재승의 <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1999), <과학 콘서트>(2002), 이정모의 <달력과 권력>(2001), 이은희의 <하리하라의 생물학 카페>(2002) 등이 잇달아 출간되며 이 땅에 교양과학책 시대가 열렸다는 평가는 버겁도록 소중하다. 조만간 25주년 기념판이 나올 걸 생각하면 가슴이 부푼다. 내가 그렇게 부르짖던 ‘대중의 과학화’가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생명다양성재단 이사장

·   그리고 다음 책들   ·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출간 이듬해인 2002년 7차 교육 과정 고등학교 국어교과서 첫 단원에 ‘황소개구리와 우리말’이 실리는 바람에 그 무렵 10대들의 필독서가 되며 내 책 중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되었다. ‘알면 사랑한다’는 마음으로 자연에게 써서 바친 내 반성문이다. / 효형출판(2001/2022)

열대예찬
<현대문학>에 1년간 연재했던 글들을 묶었다. 글쟁이들이 읽는 잡지라서 엄청 긴장하고 공들여 쓴 글들이라 개인적으로는 가장 아끼는 책이다. 2002년 어느 행사장에서 만난 박완서 선생님께서 매달 기다리며 읽고 있다고 하신 말씀을 잊지 못한다. / 현대문학(2003/2011)

다윈지능
다윈의 이론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책이다. 학문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혹독한 비판에 시달린 다윈의 진화론은 이제 우리 인류의 활동 분야 어디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더 이상 다윈을 모르고 21세기를 살아낼 수는 없다는 의미로 다윈지능(Darwinian intelligence)이라 명명했다. / 사이언스북스(2012/2022)

다윈의 사도들
아미(ARMY)는 BTS에만 있는 게 아니다. 다윈에게도 있다. 다윈의 이론을 열심히 전파하는 다윈의 사도 12명의 행적을 조명한 책이다. 다윈의 이론을 가능한 한 쉽게 설명한 <다윈지능>으로 기초를 닦고 다윈의 사도들 간의 치열한 대담을 읽으면 당신은 더 이상 ‘다윈후진국’의 국민이 아닐 것이다. / 사이언스북스(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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