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형의 책·읽·기] 만화·공연·음악이 된 활자… 문학도 기획이다
‘제사 코디네이터’ 소재 눈길
‘체공녀 강주룡’ 원작 소리극도
최승호, 우화·시·그림 결합
빙하기 홀로 남은 눈사람 그려
동명 제목 예술의 전당 공연도
장르 허물고 죽음 기억하는 문학 2선
문학의 장르를 허무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철원 출신 박서련 소설가는 소설과 만화의 형태를 결합한 ‘제사를 부탁해’를 출간했고, 춘천 출신 최승호 시인은 자신의 시와 산문, 우화를 섞은 책 ‘마지막 눈사람’을 펴냈다. 특정 장르로 명확하게 규정짓기 어려운 이들의 작품은 출판계에 융합 문학의 미래를 묻게 만든다. ‘삶과 죽음의 교차’라는 두 작품의 주요 소재도 묘한 연관성을 가진다. ‘제사를 부탁해’는 죽은 이를 위해 제사를 지내는 것을 직업으로 둔 사람을, ‘마지막 눈사람’은 빙하기가 도래해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남은 눈사람 이야기이다. 서로 다른 길의 갈래에서 떠난 것을 생각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마음을 재현하는 일이기도 하다. 무거운 주제이지만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만큼은 우주 속 먼지처럼 가벼워진다.

■ 제사를 부탁해
‘제사를 부탁해’는 소설과 만화를 결합한 문학동네의 ‘보이는 이야기’ 시리즈 첫 작품이다. 박서련의 소설 ‘둘이 먹다가’에서 정영롱의 만화 ‘죽어도 모르는’으로 이어진다. 무덤덤한 성격의 주인공 ‘권수현’은 타인의 제사를 직접 챙겨주는 ‘제사 코디네이터’라는 특이한 직업을 갖고 있다. 수현은 시한부 판정을 받은 친구 ‘박정서’로부터 1주기 제사를 요청 받았다. “거짓말을 밥먹듯이 했던” 친구 정서가 죽은 뒤 수현은 그때서야 친구가 정말로 좋아했던 음식이 무엇인지, 추억을 되짚어본다. 정서가 좋아하던 비주류 아이돌 ‘머스트 데저트’의 멤버 이아고의 사진도 제사상에 함께 올려 놓는다. 정영롱 작가는 죽은 정서가 자신의 제사를 바라보는 모습을 통해 소설의 이해도를 높인다.

여성 서사를 주로 써온 박서련의 작품답게 주요 인물부터 소설가와 만화가, 그리고 작품을 기획한 박해인 편집자까지 모두 여성이다. 서로 다른 두 인물이 미처 몰랐던 자신의 내밀한 감정을 알아차리는 섬세한 묘사가 눈길을 끈다.
박서련은 지난해 ‘배달의 민족’과 협업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을 확장해왔다. 우아한 형제들이 운영하는 ‘배민다움’ 사이트에서 에세이 연재를 한 것이다. 그의 소설 ‘체공녀 강주룡’을 기반으로 한 소리극도 앞두고 있다. 판소리공장 바닥소리가 서울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에서 31일부터 진행하는 ‘체공녀 강주룡’ 공연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최초로 고공농성을 벌인 노동운동가 강주룡의 삶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박서련 작가는 “어릴 때 내 꿈은 만화가였는데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만화책을 낸 소설가가 되었다”며 “누군가를 기리고 추념하는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의 중요한 증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 마지막 눈사람
“다 죽었는데 나만 혼자 구경꾼처럼 남아 있어도 되는 것일까. 마치 지구의 종말에 대한 긴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어느 우울한 외계인처럼”
이지희 작가가 그림을 그린 이번 작품은 언뜻 최승호의 전작 ‘눈사람 자살사건’의 다른 버전처럼 읽혀진다. 전작의 눈사람은 따뜻한 물에서 녹아갔지만, 이번에는 얼어붙은 대도시의 적막과 어둠, 고독에 직면하는 눈사람이다.
우화와 산문, 시의 경계에서 ‘사이’를 고민하는 ‘마지막 눈사람’은 시인의 젊은 시절을 이해하는 일종의 묵시다. 짝수 페이지에는 1997년 출간된 시집 ‘여백’의 1부 ‘눈사람’ 중 마지막 작품인 ‘그로테스크’를 27개의 장면으로 구성했다. 홀수 페이지에는 시집과 산문에서 발췌한 단상들을 실어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뒀다. 왼쪽의 서사를 오른쪽의 시가 부연설명한다. 그러면서 이미지의 표출과 더불어 핵심적인 문제의식으로까지 들어가게 한다. 세상에 홀로 남아 점차 거대한 얼음으로 커져만 가는 눈사람은 과연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시인은 의지와 상관없이 던져진 세상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는다. 성별도 없이 빚어져 죽음이 ‘유보’된 눈사람의 염세적 인식은 물질 문명의 한계점을 명백히 드러낸다.

해체와 자기부정을 통해 새 삶을 모색해온 최승호의 작품은 ‘시’라는 틀에도 국한되지 않는다.
2011년 한글의 음악성에 집중한 ‘말놀이 동요집’을 출간, 작곡가 방시혁(하이브 의장)과 협업했고, 지난해에는 한글을 그림으로 형상화 시킨 ‘쌍둥이 자리 별에는 다른 시간이 흐른다’ 등을 펴냈다. 또 지난해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는 최우정 서울대 교수가 그의 시를 모티프로 작곡한 ‘마지막 눈사람’이 초연되기도 했다.

최승호 시인은 “어린 왕자가 그랬듯이 우리가 어느 아득한 먼 별로부터 와서 다시 어느 별로 돌아가는지 모를 때 별들은 더 빛나는 듯하다. 이 책은 우리 은하계의 한구석에 있는 어느 별의 죽음에 관한 짧은 이야기”라고 했다. 김진형 formatio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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