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자가 되고 싶었던 유년의 기억, 있지 않나요"
여자아이 눈으로 그린 성장의 순간들
"소설 쓰기 자체가 행복하도록 노력해"
차기작은 가족 이야기 다룬 법정 소설
이국적 감각. 안온한 듯한 중산층 삶 속 균열을 읽는 눈. 2009년 등단한 손보미(43) 작가의 소설에 대한 단골 해설들이다. 소설집 '그들에게 린디합을',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 등을 내고 한국일보문학상, 이상문학상, 젊은작가상 등을 휩쓴 그가 이번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독자 앞에 섰다.
신작 '사랑의 꿈'은 작가의 유년기 기억의 편린이 곳곳에 밴 작품이다. 연작소설집으로 10대 여자아이의 눈으로 그린 단편소설 5편과 그 또래 딸을 키우는 여성을 화자로 한 1편으로 구성됐다. 지난여름 베트남전 파견 근로자 등의 문제를 다룬 장편소설 '사라진 숲의 아이들'로 처음 사회파 탐정소설에 도전한 데 이어 또 한번 예상을 깨는 작품을 선보인 그를 지난 24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만났다.
특별한 경험이 없어 1인칭 소설을 잘 못쓰겠다던 작가가 변한 이유부터 물었다. "몇 년 전, 중학교 일화로 에세이를 쓴 적이 있어요. 이후에 일기를 보니 제가 쓴 에세이와 너무 다른 거예요. 그때 1인칭 소설을 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내가 나의 과거를 잘못 기억하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이야기를 써 간다면요. 어린 시절 매 여름방학을 부산 할머니집에서 보냈던 경험을 변형해서 '크리스마스의 추억'(2019)이란 짧은 소설(엽편 소설)을 쓴 게 시작점이 됐어요."
1인칭 소설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장편소설 '작은 동네'(2020)를 쓰고, 그 외전 격으로 이번 소설집의 첫 수록작인 '밤이 지나면'을 썼다. '크리스마스의 추억'에 나오는 엄마 얘기가 쓰고 싶어 표제작 '사랑의 꿈'을, 그 딸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해변의 피크닉'을 내놨다. 각 수록작 속 여자아이들은 서로 다른 작가의 경험에서 태어났다. 불장난을 했던 일은 '불장난'의 주요 모티프가 됐고, 과외 선생님을 좋아했던 일은 '첫사랑' 서사의 시발점이 됐다. 평범하다고 여겼던 유년 경험 속 감정과 생각을 소설적으로 활용하면서 연작소설 '사랑의 꿈'이 탄생한 것이다.
소설은 10대 초중반 여자아이의 불안과 혼란을 포착하고 성장의 열기를 다각도에서 그린다. 훌쩍 커버린 독자는 아이를 통해 그간 잊었던 기억과 마주한다. 작가는 "유년 시절의 많은 경험이 덧없고 허무한 점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 경험들이 있어 지금의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그런 점을 소설에 담고 싶었다고 전했다.
배신자가 되길 꿈꾸는 '해변의 피크닉'의 화자 '나'를 보며 독자는 사랑하는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 싶은 욕망을 처음 직시하는 순간을 떠올리게 된다. 10대 초반 소녀인 화자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복동생인 삼촌과 가까워지는 게 할머니를 배신하는 일인 것 같다고 느끼면서도 삼촌에게 다가간다. "어린 조카가 어느 날 '배신자가 될 거야'라고 한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정확한 뜻은 몰랐겠지만, 부모님이나 친구들한테 어떤 마음의 상처를 받아서 그런 얘기를 했을 거예요. 어린 시절에는 그 마음이 나 자신한테 주는 상처는 고려하지 않고 사랑하는 부모님 혹은 친구에게 상처 주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 적 있잖아요. 그걸 써보고 싶었어요." '밤이 지나면'과 '불장난'에서 화자가 수치심이란 감정을 처음 인지하는 대목도 작가가 생각한 중요한 성장의 순간이다.
먼 미래보다는 작품 하나하나에 집중할 뿐이라는 그도 소망하는 미래가 있다. 오래 쓰고 싶다는 것. "우울해야 작품을 잘 쓸 것만 같은 때도 있었죠. 이제는 작품을 쓰는 행위 자체가 행복한 일이 되도록 노력하는 편이에요.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경험이 되길 바라죠. 그래야 오래 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어떤 좋은 소설을 쓰고 싶은 걸까. "초창기에는 (좋은 소설에 대한 상이) 있었어요. 그런데 좋은 소설을 하나로 말하기에는 정말 어렵구나라는 생각을 점점 더 하게 돼요. 그래서 예전에 문예창작과 수업에서 했던 말 중에 취소하고 싶은 말도 많아요.(웃음)" 그저 그때 관심을 갖는 내용을 부지런히 쓸 뿐이다. 내년에는 한 가족이 얽힌 법정 소설을 쓸 생각이다. 자신의 삶에서 길어다 쓴 이야기, 사회를 바라본 예리한 시선을 담은 추리 서사 등 손보미 소설의 세계는 그렇게 확장하고 있다.
진달래 기자 az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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