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해원의 말글 탐험] [190] ‘개판’ 되기 전에
‘신입 사원이 연차 20개 있는 줄 알고 자꾸 쓴다.’ 인터넷 동아리 게시판에 이런 글이 올랐단다. 10년 넘도록 못 본 월·수·금 휴가를 그가 쓰더라나. 어이없는 화제다 싶었는지 여러 매체가 다룬 이 얘기에 엇비슷이 쓴 표현 또한 어이없었다. ‘근속 기간 1년 미만인 근로자는 1개월 만근 시 1개, 1년 기준 최대 11개 유급 휴가가 생긴다.’
보자 보자 하니 정말 ‘개판’이군. 그 새내기나 회사 꼬집으려는 게 아니다. ‘하루 이틀(1일 2일)’ 세야 할 날수를 ‘개(個/箇/介)’로 표현하니 말이다. 근로기준법 문구도 엄연히 ‘○일’ ‘○○일’이건만, 애초 보도한 매체를 베낀 듯 한결같이 ‘○개’ ‘○○개’다.
고작 이깟 사례로 ‘개판’이랄 수야…. ‘이 업체는 맥주 마니아를 위한 클럽 등 무료 멤버십 서비스를 7개 운영하고 있다.’ 서비스가 한 개 두 개 세는 물건인가? ‘일곱 가지’ 하면 좀 좋으련만. ‘시진핑·푸틴 (중략) 10개 문서 서명.’ 문서를 세는 단위 역시 ‘가지’나 ‘건(件)’이 어울린다. 혹시 종이 낱낱을 가리킨다면 ‘장(張)’이라야 할 테고. 어순까지 손보자면 ‘문서 10건(에) 서명’이 자연스럽겠다.
다시 입에 올리기 끔찍한 일에도 ‘개’가 끼어든다. ‘온몸이 멍든 채 숨진 인천의 초등학생 다리에만 200개가 넘는 상처가 있었다.’ 친부(親父)와 계모(繼母)의 학대에 비하랴만, ‘군데’라고 표현해야 할 상처를 ‘개’로 쓰는 지경에 이른 우리말 현실 또한 끔찍하지 않은가.
‘식목일에 휴가 한 개 냈어. 노래 몇 개 들으며 뒤뜰에 나무 두어 개 심을 거야. 낮엔 삼겹살 반 개 구워 먹고 영화 한 개 봐야지. 참, 이번 주말 친구들이랑 차 두 개에 나눠 타고 여행 가기로 했는데. 옷은 몇 개 챙겨야 하나.’ 하루(휴가) 곡(노래) 그루(나무) 근(고기) 편(영화) 대(차) 벌(옷) 같은 단위명사 다 버리고 ‘개’밖에 몰라 이런 저급한 언어 되지 말란 법 있을까. 우리말이 벼랑 끝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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