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의 창] 국민이 ‘실험 대상’인가
일본에서 과로사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였다. 노동자가 장시간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하거나 무리하는 바람에 돌연사하는 일이 늘어나면서다. 나보다는 조직을 우선하는 사회 분위기, 거품 붕괴로 구조조정이 잇따르면서 일손이 부족해져 업무량이 가중된 게 원인이었다. ‘일 중독’이 칭찬받는 이상한 기업문화도 과로사를 부추기는 데 한몫했다. 일본어로 과로사를 뜻하는 ‘카로시(Karoshi·かろうし)’란 단어가 2002년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등재될 정도였다. 상황이 악화되자 일본 정부는 본격적인 대책 마련에 나섰다. 면밀한 조사와 검토를 거쳐 2014년 11월 뇌출혈, 심혈관 질환에 따른 사망뿐 아니라 직장 내 괴롭힘,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까지도 과로사에 포함시킨 ‘과로사 등 방지대책추진법’을 시행했다.
우리나라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2021년 기준 한국 전체 취업자의 연간 노동시간은 1915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1716시간)보다 199시간이나 길었다. OECD 38개 회원국 가운데 5번째다.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2021년 기준 40시간. OECD 평균보다 3.2시간 길고 주요 7개국(G7) 평균보다는 5시간 더 일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2018년 연장·휴일 근로를 포함한 근무시간을 1주 최대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단축하면서 연간 노동시간이 줄어들긴 했다. 하지만 상당수 노동자가 여전히 장시간 격무에 시달리고 있는 게 현실이다.
며칠 전 열린 ‘과로사 유가족·전문가 기자간담회’에서 나온 증언은 이런 상황을 생생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2020년 한 물류센터에서 야간노동을 하던 20대 청년은 귀가 후 샤워하러 들어간 욕실에 쓰러져 사망했다. 지병도 없고 술·담배도 안 한 태권도 4단의 건강한 청년이었다. 그는 숨지기 전 1주 동안 62시간10분, 2~12주 전에는 주당 평균 58시간18분 일한 것으로 나타났다. 직장 동료들은 이 청년이 가슴을 움켜쥐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고 한다. 유가족들은 “장시간 노동이 건강한 20대에게도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최근 ‘주 최대 69시간 근로제’를 둘러싼 혼선으로 시끌시끌하다. 시작은 이달 초 고용노동부가 주 최대 69시간까지 연장근로를 할 수 있도록 한 ‘근로시간 제도 개편 방안’을 발표하면서다.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쉴 수 있는 유연한 근무환경 구축’ ‘워라밸 문화를 조성해 생산성을 높이고, 노동의 질을 제고하자는 큰 그림’ 등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했지만 비난이 빗발쳤다. 20~30대를 중심으로 ‘장시간 노동을 부추길 수밖에 없다’ ‘주 52시간제를 시행한 게 만 5년도 되지 않는데 다시 옛날로 돌아가자는 거냐’는 반발이 잇따랐다. 심상치 않은 여론에 윤석열 대통령은 ‘주 최대 60시간’을 상한선으로 제시하며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원안보다 후퇴했다는 지적이 이어졌고 대통령실은 ‘주 60시간’은 대통령의 “개인적 생각”이라고 입장을 바꿨다. 그러나 여론이 좋지 않자 대통령이 다시 “주당 60시간 이상 근무는 무리”라고 했고, 결국 ‘69시간 근로제 소동’은 일단락됐다. 민생에 직접 영향을 주는 노동시간 개편을 놓고 정책 조율부터 메시지 관리까지 오락가락하며 난맥상을 드러냈다.
섣부른 정책을 마련해 놓고 현실과 안 맞아 여론의 질타를 받은 뒤 부랴부랴 수습하는 모습은 이번만이 아니다. 지난해 7월 교육부가 초등학교 입학연령을 만 5세로 낮추는 학제개편안을 추진했다가 거센 반발에 부딪혀 철회했고, 박순애 전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자진사퇴했다. 지난주에는 여당이 저출생 대책의 일환으로 3자녀 이상 낳은 20대 아빠에 대해 병역 면제하는 방안을 내놓았다가 하루 만에 없던 일로 하는 해프닝을 연출했다.
현대국가에서 정책이 갖는 파급력은 엄청나다. 개인뿐 아니라 사회와 국가, 어떤 경우엔 국제사회로까지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목표와 수단, 재원, 대상을 꼼꼼하게 조사, 검토한 뒤 다양한 여론 수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사기>의 ‘몽염열전’을 보면 “경솔한 생각을 하는 자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輕慮者不可以治國)”는 대목이 나온다. 충분한 사회적 논의와 공감대 형성 없이 내놓는 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정책은 시민의 삶과 직결된다. 즉흥적 판단으로 ‘지르고 보는’ 정책은 국민을 피곤하게 할 따름이다. 국민은 정부의 ‘실험 대상’이 아니다.
조홍민 사회에디터 dury12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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