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일의 보이스 오버] 자라지 않는 소년의 미학과 역사관
일본 애니메이션들의 흥행 몰이 속에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신작 <파벨만스>가 개봉했다. 영화광 소년의 아픈 가족사를 담은 자전적 영화다. 노감독은 부모가 인도한 영화의 세계, 8㎜ 카메라에 찍힌 비극 그리고 화해와 용서를 소년의 심정으로 회고하고 있다.
<인디아나 존스: 마궁의 사원>이 자극한 흥분을 잊기 어렵다. 보물찾기 플롯을 온갖 영화적 기교로 완성해 시청각적 쾌감을 극대화한 영화였다. 영화가 끝나갈수록 초조하게 시계를 자주 봤다. 모험극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던 조바심 때문이었고 유일한 경험이었다.
스필버그는 충만한 호기심과 충족되지 않은 결핍감 사이에서 시소놀이하는 덜 자란 아이의 감정에 충실하다. 그의 영화가 대중성을 확보한 비결이다.
태평양전쟁이 배경인 <태양의 제국>의 주인공은 상하이 영국 조계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사는 도련님이다. 지미(크리스천 베일)는 일본군 전투기 ‘제로센’에 열광한다. 미쓰비시와 스미토모(현 신일본제철)의 합작품 제로센은 군국주의 일본을 상징하는 비행기다. 짧은 선회 반경 기술로 놀라운 전과를 기록했다. 상당 기간 미군에 위협적인 전투기였다. 일본군 자살특공대 ‘가미카제’에 동원된 비행기도 제로센이었다. 제로센 조종사들의 영웅적 활약을 그린 <영원한 제로>를 보고 감격한 아베 신조처럼 지미는 제로센을 숭배한다.
철부지에게 적에 대한 개념이 온전할 리 없다. 오직 전투기의 기능과 형태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었을 따름이다. 소년이 겪는 산전수전도 제로센 장난감 때문이었다. 일본군에 잡혀 혹독한 수용소 생활을 할 때도 지미는 제로센을 발견하면 하던 일을 멈추고 엄숙하고 숭고한 표정으로 경례를 올린다. 부모를 잃고 자신이 겪는 고난의 원인을 모른 채 적의 병기가 자아내는 미학에 황홀해하는 어리석음을 비난할 수 없다. 소년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태양의 제국>은 비평가들의 호평과 달리 흥행 성적이 저조했다. 특히 한국과 일본에서 성적이 좋지 않았다. 한국 관객들은 일본군을 찬양하는 장면이 불쾌했고, 일본 관객들은 잔혹한 일본군에 대한 표현이 불편했다. 군국주의 일본에 대한 반감을 괄호 안에 넣고 볼 수 있다면 소년의 입장에서 전쟁을 어떻게 체험하며 얼마나 망가져가는지를 냉정하게 그린 반전영화임을 알 수 있다. 표정이 지워진 소년의 얼굴과 함께 영화는 끝난다. 마지막 장면으로 미뤄 성장한 지미가 자신의 유년기를 유린한 일본군 전투기를 아름답다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소년의 미학에 역사가 첨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을 방문한 윤석열 소년은 일본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일본은 미국의 지원과 때마침 터져준 한국전쟁의 특수를 누리며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전기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유학 중인 아버지를 따라 돈가스와 오므라이스를 맛보았을 수도 있었겠다. 혀로 감지되는 선진국의 느낌은 순진한 소년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윤석열 소년의 일본인에 대한 도덕성 평가에서 주춤한다. 길지 않은 체류 기간 동안 ‘정직한 일본인’에 대한 인식의 근거를 어디서 발견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일본 문부성 장학생이었던 아버지의 평가를 반성 없이 내면화한 것일 수도 있다. 괜찮다. 무구한 소년의 감수성을 어찌 탓할 수 있겠는가.
소년은 열심히 공부하여 최고 학부를 졸업하고 아름답고 정직한 일본이 업신여기는 나라의 대통령이 되었다. 식민사관의 근간인 ‘동양’의 개념을 창안한 일본인 말을 인용하면서까지 일본과 친해지고 싶은 한국의 대통령인 게 문제다. 윤 대통령의 역사 인식은 소년 윤석열 수준에서 크게 자라지 않은 게 아닐까 의심된다. 자라지 않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건 흉하다.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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