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진달래 옆 산유화
진달래 피었다. 경주 동국대학교 뒤 큰갓산에서 옥녀봉 사이 능선길. 진달래만 피었다. 족제비고사리 찾아서 꽃동무들 뒤따라 걷는 산길. 나에게 고사리 공부는 너무 어려운 주제다. 꽃 옆에서 ‘산유화’가 생각나고 진달래에 그만 마음을 홀랑 빼앗겼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 물론 붉기도 했겠지만, 공해가 있었겠나 황사가 덮쳤겠나, 오늘의 진달래보다 틀림없이 엄청 선명했을 것이다. 진달래는 꽃보다 잎을 나중에 천천히 바깥에 내놓는다. 꽃을 꽃으로 돋보이게 하려는 잎들의 배려다. 동백처럼 통꽃이라서 하나로 연결된 꽃잎. 마음이 한번 기울어지면 온통 그리로 왈칵 쏟아지듯, 무심히 툭, 떨어지는 진달래 꽃.
너무 많은 꽃이라지만 저마다 다들 최선을 다해 각각 피어난 꽃 한 송이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피는 그 꽃 옆에서 산유화를 읊는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는 산유화에서 유(有)는 얼마나 어려운 글자인가. 짝이 되는 무(無)까지 보살펴야 하는 그 말은 또 얼마나 난해한가. 옥편에서 ‘유’가 그렇다지만 산유화에서는 산과 꽃을 연결하는 출렁다리처럼 너무나 알맞게 안겨 있다. 자연과 나를 이어주며 저만치에 지금 홀로 자리잡고 있는 저 한 그루의 진달래처럼.
때마침 큰갓산을 뒷산으로 둔 듯한 분이 지나가길래 말을 붙였다. “경주의 꽃이 참 좋습니다.” “…” “이런 곳에서 만나면 어째 꼭 신라시대 분들 같다는 생각을 부러라도 하게 됩니다.” “…” 여인이 걸음을 멈추고 마스크를 벗으신다. 진달래와 함께 막 도착하시어 나를 동네꼬마로 만드는 느낌이다. “어디서 오셨니더? 사흘 전만 해도 꽃이 어찌 좋던지요. 벌써 한숨 처졌어요, 그새…. 잘 노다 가셔요.”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며 지금 ‘산에서 우는 작은 새’는 박새다. 소리를 좇아 잠깐 한눈파는 사이 왼쪽으로 살짝 꼬부라지는 길은 또 허전하다. 고개 들어 보면 아무도 없고 새소리와 꽃향기만 가득 찼다. 아, 그분은 이제부터 나에게는 서울 가도 많이 생각이 날, 꽃 사이로 숨은 틀림없는 신라 사람! 행여 오늘 이 희한한 공화국에서 산중으로 망명이나 해볼까, 국적도 신라로 바꿀까.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무열왕한테 산지기 임명장이라도 달래볼까. 진달래 옆에서 찬란한 봄꿈 몇 개 꾸었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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