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급진적 환경정책, 물어 뜯기기 시작했다
[Cover Story] 유럽서 친환경 정책 반대하는 정치세력 약진
지난 11일 네덜란드 정치 수도 헤이그에 국기를 거꾸로 든 농부 1만명이 모였다. 이들은 ‘농민이 없으면 식량도 없다’ ‘질소 문제는 없다’ 같은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질소 감축 계획을 폐기하라”고 외치며 도심 공원을 행진했다. 지난해 정부가 ‘2030년 질소 배출량 절반 감축’ 목표를 위해 농장을 최대 3000개 사들여 폐쇄하고 가축 수를 3분의 1가량 줄이겠다는 계획을 내놓은 이후 네덜란드 전역에서 이런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최근엔 이들을 대변하는 신생 정당 ‘농민-시민운동당(BBB)’이 지방선거에서 압승을 거두는 이변도 일어났다. 네덜란드에선 지방의원이 전국 상원의원을 선출하는 구조라 오는 5월 BBB가 상원 75석 가운데 17석을 차지해 최대 정당으로 등극할 것으로 예상된다.
유럽에서 ‘녹색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친환경 정책이 일반 국민의 삶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구체화하자 이에 대한 국민의 반발도 뚜렷해진 것이다. 성난 민심에 부닥친 유럽 각국이 현실론을 앞세워 친환경 목표에서 한 발씩 후퇴하면서 유럽연합(EU) 내 불협화음도 커지고 있다.
◇거세지는 녹색 반발
최근 유럽에선 급진적인 친환경 정책에 반대하는 정당들의 지지도가 오르는 추세다. 작년 9월 스웨덴 총선에선 친환경 정책에 반대하는 극우 성향의 스웨덴민주당이 2위를 차지하며 원내 주요 정당으로 올라섰다. 이후 연립정부에 합류하지 않고도 의석수를 바탕으로 정부 의사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스웨덴은 그동안 기후 문제 해결에 앞장서온 국가 중 하나지만, 이런 여파로 새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기후환경부를 폐지하고 관련 조직을 기업·에너지부 산하로 보냈다. 환경 관련 예산을 삭감하고, 친환경 연료로 평가받는 바이오연료 혼합 비율도 낮추기로 했다.
독일에선 친환경 정책에 중점을 둔 독일 녹색당 지지율이 작년 여름 23%에서 최근 17%까지 떨어졌다. 스페인에선 극우로 분류되는 복스당이 EU의 환경정책을 앞장서 공격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민자 반대에 초점을 맞춰온 포퓰리즘 정당들의 의제가 환경 정책으로 옮겨가고 있는 과정이라고 분석한다. 급진우익분석센터의 발사 루바르다 이념연구팀장은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에 “극우 단체들은 이제 기후 정책 문제를 표심을 얻거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주제로 여기고 있다”고 했다.
특히 친환경 정책이 일자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순간 반감이 폭발할 가능성이 있다. 가령 EU는 대표적인 친환경 정책으로 내연기관 자동차 퇴출을 추진 중인데, 유럽에서 자동차 관련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1300만명이 넘는다. 이 가운데 자동차 제조 일자리만 340만개로, 전체 제조업 일자리의 11.5%를 차지한다. 석탄과 석유 산업 같은 분야에서도 일자리 손실이 불가피하다. 이들 일자리는 대부분 특정 지역에 몰려 있어 고통을 분산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예컨대 폴란드 남부 슐레지엔에 있는 탄광들은 이 지역에 7만개 넘는 일자리를 제공하지만 EU 온실가스 감축 목표에 따라 폐쇄될 가능성이 크다.
농업 등 일부 산업에선 벌써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네덜란드는 물론 벨기에, 체코, 폴란드 등에서 농업 부문 탄소 중립 목표를 두고 농부들의 저항이 노골화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 3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시위에서 농민 단체들은 “현재 정부가 목표로 하는 온실가스 감축 방안은 사회·경제적 대학살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위에 참여한 염소 농장 운영자 리제 반룬은 로이터통신에 “우리는 이미 많은 노력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의향이 있지만, 정부는 우리에게 점점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유럽 전역에서 농업을 둘러싼 ‘녹색 반발’이 거세지자 최근 EU 국가들은 감축 대상이 되는 농장의 수를 줄이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물론 전문가들은 녹색 전환 과정에서 새로 생겨나는 친환경 일자리가 이런 손실을 대부분 상쇄할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근로자들이 새로운 일자리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혼란과 갈등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유럽노동조합연구소(ETUI)는 작년 보고서에서 “온실가스를 줄이려는 계획은 다른 조치가 없다면 사회적 불평등을 악화시킬 가능성이 크지만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여전히 단편적이고 구속력이 없다”며 “노동 시장 등에서 나타날 변화를 EU 차원에서 관리할 법률을 마련하고, 새로운 일자리로 전환하는 근로자를 위한 기금도 제공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커지는 불협화음, 후퇴하는 목표
국민들의 반대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각국 정부의 친환경 의지도 흔들린다. 최근 독일 정부는 ‘2035년 내연기관 신차 판매 금지’ 목표에 이의를 제기하고 이를 관철시켰다. 이 방안은 이미 작년 10월 EU 차원의 합의를 거쳤고 사실상 형식적인 승인만 남은 상황이었는데, 독일이 이를 한순간에 뒤집은 것이다. ‘이퓨얼(e-fuel)’이라 불리는 합성연료를 사용하는 내연기관 차는 금지해서는 안 된다는 게 독일 측의 논리다. 이퓨얼은 수소와 탄소를 합성해 만드는 연료로, 탄소를 대기 중에서 포집해 쓰기 때문에 친환경 연료로 분류된다. 하지만 경제성이 떨어지고 연소 시 여전히 오염 물질을 배출하는 단점이 있다. 한 EU 관계자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 “이번 사태의 가장 큰 위험은 협상이 이미 타결된 법안에 대해 다른 나라들이 반대하고 나설 가능성을 열어줬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런데도 독일이 막판 딴죽걸기에 나선 것은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독일에서 자동차 관련 일자리는 80만개에 달하는데, 전기차 전환 과정에서 적게는 9만개, 많게는 40만개가 사라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볼커 비싱 교통장관은 지난 22일 “독일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내연기관 기술을 잘 안다”며 “친환경 운송 수단이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에 명확한 답이 없는 상태에선 이 기술을 계속 보유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했다.
독일 정부가 야심 차게 추진해온 ‘2024년 화석연료 난방장치 신규 판매 금지, 2045년 전면 금지’ 조치도 삐걱대고 있다. 이 조치를 실행하려면 매년 50만 가구에 신규 난방 장치를 설치해야 하는데 관련 장치 한 대 가격이 1만1000~2만5000유로(약 1500만~3500만원)에 달하고, 정부가 지급해야 하는 보조금 규모도 수천억 유로에 이른다. 이 때문에 최근 독일 매체 RTL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79%가 반대 의사를 밝혔다. 독일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자유민주당의 하원의원 대표 크리스티안 뒤르도 “전면적인 금지는 잘못됐다”며 반대 의사를 표했다. 독일 정부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에너지 비용이 치솟자 애초 운영 중단 예정이던 석탄 화력발전소 2기도 2024년 3월까지 연장 운영하기로 했다.
유럽의 친환경 리더 독일이 흔들리자 유럽의 공동 전선에도 균열이 생겼다. 독일에 이어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네덜란드, 프랑스 등도 운영을 중단하거나 폐쇄 예정이던 발전소 재가동에 나섰다. 이들 국가는 “일시적인 조치로 화력발전소를 단계적으로 폐쇄하겠다는 기존 계획엔 변동이 없다”는 입장이지만, 위기 상황이 닥치면 언제든 결정이 번복될 수 있음을 보여준 셈이다.
사안에 따라 국가별 불협화음도 커지고 있다. 이탈리아는 건물 분야 탄소 중립 방안에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EU는 현재 개·보수를 통해 건물의 에너지성능등급(A~G)을 올리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비주거용 건물은 2030년까지, 주거용 건물은 2033년까지 D 등급으로 개선해야 한다.
이탈리아건설협회는 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180만개의 주거용 건물에 앞으로 10년 동안 4000억유로(약 560조원)를 투입해야 한다고 추산한다. 이탈리아 건물 가운데 하위 2개 등급에 속한 건물 비율은 60%로, 프랑스(17%)나 독일(6%)보다 훨씬 높다. 이탈리아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진이탈리아(FI) 대표는 “유럽은 우리에게 재앙이 될 에너지 효율 지침을 부과하고 싶어한다”고 비판했다.
체코와 폴란드는 독일, 이탈리아 등과 함께 ‘2035년 내연기관 신차 금지’ 정책에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체코의 보수 정당인 시민민주당 소속 알렉산드르 본드라 유럽의회 의원은 이달 현지 언론 유랙티브에 낸 기고에서 “전기차로의 전환은 가치 있는 목표지만 금지가 현실화하면 소비자에게 악몽이 되고 녹색 전환에 대한 반발을 불러올 것”이라며 “내연기관 중고차 시장으로 눈을 돌리는 소비자가 많아져 배출량이 오히려 증가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더 꼬이는 셈법
EU 구성원들 사이에 녹색 전환 파열음이 나오는 가장 큰 원인은 일자리 손실과 막대한 전환 비용 때문이다. 하지만 친환경 전환 과정에서의 ‘중국 딜레마’가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신재생에너지 분야를 키울수록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는 모순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희토류는 전기차 배터리 등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원자재인데, 유럽에서 사용하는 희토류 광물의 98%가 중국산이다. EU 재생에너지 목표에 핵심적인 태양광 발전이나 풍력 발전도 마찬가지다. 2021년 기준 EU는 풍력 터빈 수입의 64%, 태양광 패널 수입의 89%를 중국에 의존했다.
유럽은 최근 중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역내 자체 생산량을 2030년 40%까지 늘리는 방안을 발표했다. 관련 사업 인허가 과정을 간소화하고 필요한 인력을 양성하는 방안, 공공 조달 시 관련 기술의 지속가능성을 고려하는 방안 등이 담겼다.
그러나 일각에선 이런 방안이 오히려 친환경 전환을 늦추는 결과를 낳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중국의 재생에너지 관련 기초 소재 제작 능력과 가격 경쟁력이 유럽보다 한참 앞서 있는 만큼 결국 비용 증가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유럽 태양광 개발업체인 라이크소스BP 관계자는 FT에 “비용이 많이 드는 재생에너지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며 “자칫하면 이 분야를 20년 전으로 되돌릴 것”이라고 했다. 블룸버그 에너지 분야 칼럼니스트인 데이비드 피클링은 “EU 규제는 재생에너지 사업자와 자동차 구매자에게 더 높은 비용을 물게 하면서 결국 탈탄소화 시점만 늦출 것”이라고 했다.
유럽이 중국산 원자재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추진 중인 ‘핵심원자재법’에도 회의론이 나온다. 이 법안은 광물 채굴부터 제련·가공·재활용 단계에 이르기까지 관련 규제를 풀어 전기차·풍력 터빈·태양광패널 등에 들어가는 원자재를 역내에서 최대한 자체 조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를 두고 환경운동가들과 일부 지역 주민들은 “원자재 채굴과 제련 과정에서 심각한 수질·토양 오염이 벌어질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스페인·독일·포르투갈 등의 신규 광산 후보지에선 이미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유럽은 ‘무엇이 친환경 에너지인지’를 두고도 뚜렷한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특히 원자력을 친환경 에너지로 인정할 것인지를 두고 두 쪽으로 갈라진 상태다. 프랑스는 유럽 탈탄소화를 위해선 원자력 발전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지난달 불가리아·헝가리·크로아티아·핀란드 등 10국과 함께 원자력 동맹을 결성하기도 했다. 반면 독일과 스페인, 덴마크, 룩셈부르크, 포르투갈 등은 “원자력 발전은 재생가능한 형태의 에너지가 아니기 때문에 친환경이 아니다”라는 입장이다.
이들 국가는 최근 EU 회의 곳곳에서 부딪치고 있다. 원전에서 생성된 전기로 만든 ‘저탄소 수소’를 녹색 수소로 인정할 것인지, 원자력 발전을 녹색 기술로 보고 EU 차원의 자금을 지원할 것인지 등 다양한 의제에서 갈등이 벌어지는 중이다. 독일을 포함한 7국은 이달 순번 의장국인 스웨덴에 공동서한을 보내 “(2030년 재생에너지 목표에서) 저탄소 수소를 받아들이면 결과적으로 재생에너지 배치가 늦어지고 기후 목표 달성이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대립이 각국의 주력 에너지원 차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만큼 단기간에 합의에 이르기는 쉽지 않다. EU에선 13국이 총 103기의 원자로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프랑스가 절반이 넘는 56기를 보유하고 있다. 프랑스는 전력 생산의 70%가량을 원자력 발전에서 얻는 덕분에 러시아발 에너지 위기에서도 비교적 타격을 덜 받았다. 반면 독일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계기로 탈원전에 나섰고 현재 3기의 원전만을 운영하고 있다. 이마저도 애초 작년 운영 종료 예정이었다가 에너지 위기 탓에 올 4월로 연장한 것이다. 대신 전체 전력 생산에서 재생에너지 비율이 40%에 달한다. 유럽 매체들은 “원자력 에너지에 대한 상반된 입장이 유럽의 에너지 시장 개혁을 더 복잡하게 만들 것”이라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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