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망각과 위선, 그리고 피해자

한겨레 2023. 3. 30.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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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더 글로리>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세상읽기] 황필규 |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학교폭력과 사회적 권력구조, 피해자의 복수를 다룬 드라마를 본다. 무엇이 보이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피해자가 보인다. 피해자가 보이지 않고 뭐라도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됐을 것이다. 피해자는 숨죽인 채 계속 고통스러워하고 가해자는 그 가해성을 사회 속에서 확대재생산했을 것이다. 피해자가 나서지 않는다면 그 어떤 심각한 인권침해도 해결은커녕 전혀 인식조차 되지 않는 사회는 얼마나 절망적인가. 그러면서도 얼마나 현실적인가.

과거 학교폭력에서 더 심했을 수도 있는 교사들의 폭력은 왜 문제되는 경우가 거의 없을까. 초등학교 때 공짜로 야구를 배울 수 있다는 말에 야구부에 가입했다가 거의 매일 엎드려뻗쳐를 하고 감독에게 야구방망이로 엉덩이를 맞았다. 중학교 수업 때 한 교사가 종종 학생을 세워놓고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성기를 만져대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고등학교 때는 한 교사가 숙제를 안 해 왔고 거짓말한 입을 찢어버리겠다고 소리치며 한 학생의 입을 붙잡고 세게 벌리려고 했던 모습이 기억난다. 이건 아니다 싶어 앞으로 뛰쳐나가 교사를 뜯어말렸고 그 교사는 분을 참지 못하며 집으로 가버렸다.

학교에서 체벌이 용인되던 시절이기는 했지만 단순한 체벌이 아닌 성범죄, 감정적 구타에 대한 면죄부는 ‘공인’됐던 권력에 대한 용인인가. 아니면 나이 들어 사라져가는 이들에 대한 무시인가.

과거의 폭력이 문제가 된다면 가장 광범위하고 대규모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뤄진 군대 내 폭력은 왜 제대로 다뤄지지 못하나. 고등학교 때 꽤 친했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가 사망하고 한참 뒤에야 군대에서 의문사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챙기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어머님께 연락드렸는데 찾을 땐 안 보이더니 왜 이제 연락하냐, 이미 보내버렸다며 연락하지 말라 하셨다. 군대에서 사람을 정말 답답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괴롭힘이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 느낄 수 있는 상황을 경험하기도 했다.

비록 군대 내 사망사건은 별도 조사기구가 있지만 나머지 다른 폭력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공인’된 철저한 권력구조, 계급 변화에 따라 절대적(잠재적) 피해자에서 절대적(잠재적) 가해자로 점차 변화해가는 구조 때문에 사실상 모두가 망각과 침묵의 동맹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학생 폭력에 대한 강한 분노의 표출은 선별적이고 위선적이지는 않은가.

얼마 전 한 지방일간지에 전방지역에 살포된 고엽제 노출 피해와 관련해 군인과 군무원은 피해 지원이 이뤄지는데 민간인은 제외되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1967~1971년 전방비무장지대에 북한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발암물질인 다이옥신계 제초제인 고엽제가 살포됐고, 군인이나 군무원뿐만 아니라 민간인의 피해도 광범위하게 확인됐는데 민간인 피해 구제는 관련법에 전혀 규정돼 있지 않다는 지적이었다.

정부는 1959~1973년 북한의 선전촌 건설에 대응해 전방지역에 99개 자립안정촌, 12개 재건촌, 2개 통일촌을 각각 조성했고 상당수 제대군인이 이곳으로 이주했다. 피해지역 주민 상당수는 정부의 정책적 유도로 이주한 이들이다. 미군이 결정하고 한국 공권력에 의해 심각한 유해물질 살포가 있었지만, 1차적인 책임 주체인 미군에는 사실상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2000년 전후 관련법 개정안 심사 과정에서 국회 전문위원도 민간인 피해구제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당시 여당과 정부도 민간인 피해구제를 위한 별도 특별법 제정을 약속했지만, 법안은 발의조차 되지 않았다.

피해자의 목소리가 미미하거나 없으면, 조직화된 피해자가 나서지 않는다면 이처럼 체계적이고 중대한, 그리고 그 피해가 유전적으로 대를 이어 가해질 수도 있는 국가폭력의 경우에도 아무런 구제조치 없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될 수 있단 것인가. 가장 힘없고 고통스러운 피해자들이 나서고 목소리를 낼 때에야 비로소 폭력과 가해자, 이를 용인하는 구조가 보이는 현실은 너무도 잔인하지 않은가.

드라마 속 복수에는 열광하지만 피해자의 작은 목소리, 미미한 움직임에도 불편해하고 심지어는 온갖 낙인을 찍어대는 현실은 또 어떤가. 피해자는 ‘힘’이 없어야만 피해자인가. 피해자가 먼저 나서지 않아도 피해자가 충분히 대표되고 피해자 중심으로 작동하는 사회시스템을 함께 꿈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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