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당신의 자리로 돌아갈 시간” 김선영·조형균·송용진·홍륜희·이예은의 뮤지컬 호프 [양형모의 일일공프로젝트 14]

양형모 기자 2023. 3. 30.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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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공’임에도 완벽했던 호프…빛났던 베테랑 배우들
-김선영, ‘호프 스페셜리스트’다운 관록의 연기
-조형균, 꿀에 담근 듯 미성에 매혹…K 명대사의 울림
‘첫공’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역시 첫날이니만큼 아무래도 배우들의 연기, 노래, 호흡은 물론 무대 기술적으로도 베스트의 완성도를 보여주기 어렵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출연하는 배우들이 저와 같은 사람들(네, 기자입니다)이 첫공을 보러 오는 것을 살짝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첫공은 배우들에게도 엄청 긴장이 되는 날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공은 첫공만의 확고한 매력이 있다는 겁니다. 어느 공연이나 첫공은 ‘단 하루’ 뿐이죠. 마치 ‘평생 단 한 번만 받을 수 있는’ 신인상 같습니다. 그날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첫공날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답니다.

심지어 배우, 스탭들의 우려와 달리 첫공은 의외로 퍼펙트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만큼 모든 사람들이 실수를 할까봐 긴장을 하고, 120%의 기운을 끌어올려 공연에 임하기 때문인데요. 그런 점에서 대부분의 실수, 사고는 첫공이 아닌 두 번째 공연에서 발생하곤 한다죠. ‘아, 무사히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하는 마음에 긴장감이 풀려서일까요.

여하튼, 뮤지컬 호프의 첫공도 그러했습니다. 오랜만에 방문한 대학로 유니플렉스 1관은 그야말로 첫공날의 ‘포스’가 넘실넘실. 마치 오후 7시 즈음의 이마트 식품매장 같은 열기와 긴장감, 기대감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뮤지컬 호프는 이번이 세 번째 시즌이지만, 저는 첫 관람입니다. 인터미션 없이 110분 줄창 달리기. 중극장 뮤지컬 작품치고는 길지 않습니다. 호프는 워낙 평가가 좋은 작품이죠. 이 작품의 원제는 ‘호프: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입니다. 러닝타임과 달리 제목은 꽤 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음악, 대본에 앞서 제목이 가장 먼저 정해졌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만큼 ‘힘이 센’ 제목입니다. 과장하자면, 제목만으로 이미 절반을 먹고 들어갑니다.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이 작품의 이야기는 실화에서 가져왔지요. 현대 문학의 거장 프란츠 카프카의 미공개 원고, 개인편지 등의 소유권을 두고 이스라엘 국립도서관과 에바 호프 간의 장장 30년 소송 사건이 모티브입니다.

이 얘기를 들으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런 얘기가 재미있을까? 그것도 뮤지컬로 굳이?’였습니다. 하지만 뮤지컬 호프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금방 부끄러워졌습니다. ‘뮤지컬로 만들 수 없는 건 없구나. 예술적이고, 심지어 재밌기까지 해!’

많은 장면, 넘버가 기억에 남지만 가장 좋아하는 것은 어린 호프의 솔로 중 마리가 K에게 안겨 있는 장면입니다. K(의인화된 원고)를 유대인 수용소에서까지 갓난아기처럼 품고 있던 마리가 딸의 절규와 같은 노래를 들으면서 역설적으로 ‘원고’에게 안겨 있는 모습은 꽤 충격적인 연출이었습니다.

‘안녕’ 넘버는 역시 가장 좋아하는 넘버. 매우 인상적이면서, 상징이 풍부합니다.

김선영 배우의 ‘호프’는 정평이 나 있습니다. 클래식 쪽 표현을 가져오자면 ‘호프 스페셜리스트’라고 해도 좋을 겁니다. 추하고 괴팍한 노파의 굴곡진 인생과 극적인 심리 변화를 풍부한 연기력으로 잘 표현해 냈습니다.

‘마리’ 홍륜희 배우는 마치 현악기 같은, 아름다운 바이브레이션을 가진 배우입니다. 이 배우가 노래할 때면 무대의 공기에 잔물결이 일렁입니다. 호프에서도 그 마술 같은 경험을 해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딸 호프보다 더욱 ‘심각한’ 인생을 살아야 했던 체코의 교사 마리 역에 홍륜희 배우는 더할 나위없이 잘 어울렸습니다. 그의 마리는 마지막까지 기품이 배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호프를 연기한 이예은 배우는 작은 체구지만 에너지가 무척 강하더군요. 선배들과의 듀엣, 트리오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습니다.

이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이 느껴지는 송용진 배우는 베르트와 판사의 1인 2역입니다. 베르트는 기껏 마리에게 원고를 맡겨놓고는, 훗날 배신을 하는 역이죠. 상반된 두 캐릭터를 베테랑답게 잘 소화해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배를 잡게 만드는 판사의 개그캐가 너무 좋습니다. 설록홈즈에서 보여주었듯 송용진 배우는 은근 개그도 잘 표현합니다.

조형균의 K. ‘조형균 브랜드’의 허니 보이스를 이 작품에서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목소리에 꿀을 바른 정도가 아니라, 성대를 꿀통에 푹 담갔다 꺼낸 것 같습니다. 들어도 들어도 귀가 가게 되는 소리입니다.

뮤지컬 호프는 대사들의 울림이 적지 않습니다. 몇 개의 대사는 이 작품의 메시지를 통째로 압축해 놓은 듯해, 무대에서 들으면 몸에 전기가 찌릿합니다. 특히 K의 대사 중 음미할 만한 대사들이 있는데요. 재판정에서 호프에게 전하는 “그래, 이젠 네 자리로 돌아가”라든지, “우리가 가진 유일한 인생은 일상”이라는 대사가 그렇습니다. 후자의 경우, 실제로 카프카가 한 말이라고 하네요.

제가 좋아하는 K의 대사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제 그만 (책 말고) 당신을 읽어 보시라”. 꼭 제게 하는 말 같았거든요.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사진제공 |알앤디웍스

※ 일일공프로젝트는 ‘일주일에 한 편은 공연을 보자’는 대국민 프로젝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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