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 “주 69시간이 극단적 가정? 정부, 현실 외면하나”
“지금도 주 52시간을 초과하는 사례들이 적지 않습니다. 주 최대 69시간까지 적법해지면 이를 초과하는 각종 편법과 꼼수들이 반드시 등장한다는 점을 정부는 인식해야 합니다.”
노동법·직업환경의학 전문가들이 ‘주 69시간(6일 기준)’까지 노동을 시킬 수 있는 정부의 노동시간 개편안을 두고 “건강권, 선택권, 휴식권 모두 보장할 수 없는 방안”이라고 지적했다.
노동법·직업환경의학 전문가들과 현장 노동자들은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윤석열 정부의 노동시간 개악과 노동자 건강권’ 토론회를 열었다. 민주노총·한국노총과 더불어민주당 산업재해예방TF, 정의당과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주최했다. 노동부 관계자는 참석하지 않았다.
“연 단위 하면 18주 연속 64시간…극단적? 현실 보라”
발제를 맡은 박성우 노무사(노동법률단체 직장갑질119 야근갑질특별위원장)는 정부의 입법안이 연장노동 상한 제도의 입법 취지를 훼손한다고 지적했다. 박 노무사는 “정부안은 현재 52시간 상한제를 경직적·획일적이라고 비판하면서, 결국 어떻게든 52시간을 초과해 일을 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라며 “주 40시간의 법정노동시간과 12시간의 연장노동으로도 다 못 할 일이라면 다음 주로 넘기거나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는 게 근로기준법의 정신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 노무사는 정부의 개편안대로 근무시간표를 작성해보면, 연장노동 관리단위가 ‘분기 단위’일 경우 5주 연속 주 64시간 노동이 가능해진다고 지적했다. ‘반기 단위’면 10주, ‘연 단위’면 18주까지 연속 주 64시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박 노무사는 “이는 정부도 인정하듯 이론적으로 가능한 내용”이라며 “정부는 이런 주장이 극단적인 가정을 통한 흠집내기라고 하지만, 정부는 위법천지 노동현장의 실태를 모르거나 고의로 외면하고 있다”고 했다. 직장갑질119가 이날 토론회에서 공개한 제보를 보면 “마트 야간조에 속하면 주에 73.5시간 일한다” “연장노동을 주 12시간까지만 표기 가능해서 야근 때는 퇴근카드를 찍고 다시 일한다” 등 다양한 초과노동 사례가 있었다.
연장노동 관리단위를 월·분기·반기·연 등으로 유연화하려면 1일~1주 단위로 적절한 노동시간 상한을 둬야 한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현재 정부는 ‘근무일간 11시간 연속휴식’을 두고 있다. 이 경우 일 최대 노동시간은 13시간(휴식 포함)이 되지만 이는 필수조항이 아니다. 연속휴식을 두지 않으면 ‘주 64시간’이 상한인데, EU 등 대부분 국가에서 준용하는 ‘글로벌 스탠더드’는 주 최대 48시간이다.
김인아 한양대 의대 직업환경의학교실 교수는 “WHO와 ILO는 최근 공동연구를 통해 주 55시간 이상 일하면 뇌졸중과 심혈관질환 발생 위험이 증가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며 “ILO는 현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시간 평균화 제도(노동시간 관리단위를 유연화한 뒤 주 평균 시간으로 계산하는 것)’가 장시간 노동으로 연계될 수 있어 매우 제한적으로 신중하게 도입할 것을 권하고 있다”고 했다. 김 교수는 정부안을 설계한 전문가기구 ‘미래노동시장연구회’에 참여했지만 노동시간과 관련한 이견으로 그만뒀다.
최승현 노무법인 삶 대표 공인노무사는 “정부 자료를 종합해본 결과 최근 5년 동안 2646명이 산재법상 과로사로 목숨을 잃었다”며 “같은 기간 과로로 인한 극단적 선택도 486명으로 심각한데, 신청하지 않은 경우를 생각하면 더 많을 것”이라고 했다.
정부 개편안이 긴급한 연장노동이 필요한 특수한 상황을 일반화하는 제도라는 지적도 나왔다. 박 노무사는 “어떻게 하면 예외를 줄여나갈지가 아니라, 연장노동 자체를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하도록 사회적 신호를 줄 수 있다”고 했다. 김 교수는 “예외적 상황에서 제한적 적용을 검토해볼 문제를 모든 노동자에게 적용해 장시간 노동을 유발하는 현 개편안은 보건학적 측면에서 개악으로밖에 볼 수 없다”고 했다.
“선택권 허울뿐”…노동자들, 동료 생각하다 ‘눈물’
전문가들은 정부가 강조하는 ‘선택권’이 실제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 선택권이 보장되려면 노사 간 힘이 대등해야 하는데, 지금은 사측의 힘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것이다. 특히 노조가 없는 중소·영세 사업장일수록 장시간 노동에 취약하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박 노무사는 “노조조차 만들기 어려운 무노조 사업장에서, 단지 직원 1명일 뿐인 근로자대표 선출권을 민주적으로 설계한다 해서 실질적인 노사대등이 이뤄질지 의문”이라며 “노조가 있는 곳은 장시간 노동을 막을 수도 있겠지만, 가장 큰 피해는 노조가 없는 중소 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에게 집중될 것”이라고 했다.
이정희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비정규직 등)교섭력이 취약한 노동자일수록 근로자대표를 통한 발언권 행사도 어려울 것”이라며 “현행 근로자대표를 손질해 발언권을 보장하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본질에서는 노조를 조직하거나 가입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고, 업종별 교섭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했다.
현장 노동자·활동가들은 과로로 숨진 동료의 사례를 말하다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종란 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 ‘반올림’ 상임활동가는 “2012년부터 2017년까지 주 60시간 일한 반도체 여성노동자 2명이 혈액암으로 숨졌다. 이들이 기억이 난다”며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게임업계 노동자인 차상준 스마일게이트노조 위원장도 “수많은 사람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죽고 암에 걸렸다”며 눈물을 보였다.
조해람 기자 lenn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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