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칼럼] 누구를 위해 지체되는 정의인가

노자운 기자 2023. 3. 30.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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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5년, 전쟁과 재정난에 시달리던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들이 존 왕에게 항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참다 못한 귀족들은 규약을 정해 왕에게 서약을 강요했고, 그 결과로 탄생한 게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대헌장)'다.

40조엔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권리나 정의를 팔지 않을 것이며, 거부하거나 지연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적혀있다.

최근 우리 사법부에서는 '정의의 지체'가 폐단을 낳는 사례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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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5년, 전쟁과 재정난에 시달리던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들이 존 왕에게 항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참다 못한 귀족들은 규약을 정해 왕에게 서약을 강요했고, 그 결과로 탄생한 게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대헌장)’다. 마그나 카르타는 근대 민주주의 헌법의 토대이자 민주주의의 초석과 같은 상징적 존재다.

무려 800년 전 작성된 이 헌장에는 시대를 관통해 지금까지도 통용되는 당위가 명시돼있다. 40조엔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권리나 정의를 팔지 않을 것이며, 거부하거나 지연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적혀있다. 여기서 파생된 아주 유명한 격률이 “법은 지체되는 것을 싫어한다(Lex dilationes abhorret)”는 말이다. 오늘날에는 “지체된 정의는 거부된 정의”,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등으로 번역돼서 전래되고 있다.

최근 우리 사법부에서는 ‘정의의 지체’가 폐단을 낳는 사례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사법부의 정의는 재판을 통해 구현된다. 재판이 지연되면 정의의 실현도 미뤄진다.

지난해 대한변호사협회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변호사 10명 중 9명은 최근 5년 간 재판 지연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1심 재판만 3~4년 간 진행돼 피해가 극심하다는 답변도 있었다.

재판 지연은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 고질적 문제다. ‘청주 간첩단’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자주통일충북동지회 사건은 최근에야 1심 법원에서 본격적으로 심리를 시작했다. 재판이 시작된 건 무려 1년 6개월 전인데 피고인들이 잇달아 재판부 기피 신청을 내며 답보 상태에 놓였다. 가장 최근 낸 기피 신청은 대법원에 올라간 지 한참 지나도 결론이 나지 않았고, 결국 검찰이 서둘러 처리해 달라며 ‘신속 결정 요청’을 낸 뒤에야 85일 만에 기각되며 재판이 가능해졌다.

재판부가 사건 병합을 제대로 해주지 않는 것도 정의를 지체시키는 주된 요인이다. 보통 검찰에서 여러 개의 관련 있는 사건들을 기소하면 재판부는 효율성을 위해 이를 병합해 심리한다. 갭 투자를 활용해 355명에게서 800억원을 편취한 ‘세 모녀 전세 사기’도 검찰이 사건 병합을 요청했지만 일부만 받아들여졌다. 사건은 하나인데 재판은 두 개로 나뉘어 진행되니 검찰은 물론이고 피고인 입장에서도 비효율적이다. 신속한 구제만 기다리고 있는 피해자들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재판지연 문제를 심화하는 또 다른 주범이 김명수 대법원장의 ‘판사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중시 정책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김 대법원장이 법원장후보추천제를 도입한 이후 부장판사들의 재판 실적이 승진에 별 영향을 못 미치게 됐다는 것이다. 실적에 기반한 인사 관리 시스템이 자리잡는다면, 적어도 일부 판사들이 재판을 거부하고 미루는 낯부끄러운 행태만큼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판사를 지금보다 2배 늘린다 해도 재판지연이 해결되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보단 사법에 들어가는 비용을 절감할 방법을 다각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법원의 재판이 아닌 조정, 중재 등으로 분쟁을 해결하는 대체적 분쟁해결제도(ADR)의 도입도 대안이 될 수 있겠다.

13세기 영국까지 갈 것도 없다. 우리 헌법 27조도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형사피고인은 상당한 이유가 없는 한 지체없이 공개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한다. 지체된 정의는 누굴 위한 정의도 아니다.

[노자운 법조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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