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정국 소련은 조선인 정치 세력 인정, 미국은 불허

고승우 민언련 고문·언론사회학 박사 입력 2023. 3. 30. 13:10 수정 2023. 10. 5.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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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관계 탐구 (09)] 미국·소련의 종전 후 한반도 점령

[미디어오늘 고승우 민언련 고문·언론사회학 박사]

소련은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연합군이 유럽에서 승리할 경우 3개월 이내에 태평양전쟁에 참여할 것이라고 밝힌 약속을 이행했다. 소련은 같은 해 8월8일, 독일이 항복한 5월9일에서 3개월 되는 날 일본에 전쟁을 선포했다.

소련이 대일선전포고를 한 날 미국은 나가사키에 두 번째 핵폭탄을 터뜨렸다. 소련의 대일 참전이 예고된 상황에서 미국의 원폭 투하는 소련에 대한 무언의 압박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당시 참전한 소련 병력은 보병 160만 명, 대포 2만7000문, 탱크 5600대, 전투기 3700 대 등으로 주력 부대는 독일군을 패전시킨 최강의 전력이었다. 소련군은 일본 관동군의 병력(병력 100여만 명, 탱크 400대, 전투기 230대 등)을 파죽지세로 압도했다(LTC David M. Glantz, "August Storm: The Soviet 1945 Strategic Offensive in Manchuria". Leavenworth Papers No. 7, Combat Studies Institute, February 1983, Fort Leavenworth Kansas).

소련군은 만주 등에서 일본군을 패퇴시킨 뒤 신속하게 진군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할 기세였다. 하지만 그 해 8월10일 미소 두 나라는 북위 38도 선을 미소의 점령 경계선으로 삼기로 합의했다(Walker, J Samuel (1997). Prompt and Utter Destruction: Truman and the Use of Atomic Bombs Against Japan. Chapel Hill: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p. 82. ISBN 978-0-8078-2361-3). 이는 미소 두 나라가 정부가 그 이전부터 물밑 작업을 통해 전후 한반도 처리문제에 대한 협의를 계속했고 특히 미국이 원자탄을 개발한 것이 주효한 것으로 추정된다.

두 나라 합의 내용을 보면, 서울은 미군의 점령 지역 안에 포함됐다. 이에 따라 한반도 주민 가운데 1600 만 명은 미국 점령지역으로, 900만 명은 소련군 점령지역으로 나뉘어졌다. 미소의 이 합의는 일본 항복이후 최초로 8월17일 연합군이 발표한 '일반명령 제1호'가 되었다<Seth, Michael J. (16 October 2010). A History of Korea: From Antiquity to the Present.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published 2010). p. 306. ISBN 9780742567177. Buzo, Adrian (2002). The Making of Modern Korea. London: Routledge. p. 53. ISBN 978-0-415-23749-9).

▲ 1945년 8월 소련군이 중국 동북부 만주를 공격, 일본군 관동군을 격파하고 한반도에 진입한 상황 지도. 사진=위키미디어

소련군은 8월14일 수륙 양면에 걸쳐 한반도에 상륙해 북동부 지역을 신속히 접수하고 8월16일 원산항에 상륙했다. 소련군은 8월24일 평양에 도착했지만 미군은 9월8일까지 남한에 진주하지 못했다(Seth, Michael J. (16 October 2010). A History of Korea: From Antiquity to the Present.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published 2010). p. 86. ISBN 9780742567177).

남한에 진주한 미군이 점령군의 배타적, 독자적으로 통치방식을 채택한 것과 달리 소련군은 북한 주민의 자발적 기구와 협의하는 방식을 썼다. 소련군은 평양에 진군했을 때 현지에 결성되어 있던 조만식 선생이 이끄는 인민위원회의 존재를 인정하고 합동 작업을 벌였다(Jager, Sheila Miyoshi (2013). Brothers at War The Unending Conflict in Korea. London: Profile Books. p. 23. ISBN 978-1-84668-067-0).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한 뒤 설립한 소비에트 민정청은 1945년 8월25일부터 1948년 9월까지 존속하면서 1946년 북한 주민들이 설립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와 형식상 공동지배 형식을 취했다(https://en.wikipedia.org/wiki/Soviet_Civil_Administration).

9월19일 김일성과 조선인 붉은군대 장교 66명이 원산항에 도착했고 소련군은 김일성을 북한 지역 주민들에게 게릴라저의 영웅이라고 소개했다. 김일성은 1930년대에 만주에서 일본군과 싸운 후 1941년까지 소련에 살면서 붉은군대에서 훈련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Buzo, Adrian (2002). The Making of Modern Korea. London: Routledge. p. 56. ISBN 978-0-415-23749-).

1945년 12월 미소는 모스크바 회의에서 한반도를 독립이전에 5년간 신탁통치하기로 합의해 김일성 등은 이에 찬성했지만 조만식 선생은 반대 의사를 밝힌 뒤 1946년 1월초부터 가택연금을 당했다(Cumings, Bruce (2005). Korea's Place in the Sun: A Modern History.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pp. 187190. ISBN 978-0-393-32702-1).

1946년 2월 소련군과 인민위원회는 토지 개혁, 기간산업 국유화, 노동법 개혁과 여성평등 법 등을 시행했다. 소련군의 북한 점령은 3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졌다(https://office.kbs.co.kr/tongil/archives/4265). 하나는 소련의 정책 관철, 즉 소련의 정책을 반대하는 경우를 수용하지 않는 것, 둘째는 소련의 정책을 지지하는 세력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 셋째는 각종 지원과 선전을 통한 조선인의 지지 및 실질적인 이익 획득이었다.

▲ 1945년 10월14일 평양에서 열린 소련군 환영대회. 사진=위키미디어

서울 주둔 일본군 사령관, 미군에게 한반도 공산화될 위험 높다고 보고

공식적인 일본의 항복 조인식은 1945년 9월2일 도쿄 만에 정박한 전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맥아더 장군과 일본 외상, 일본군 사령관이 항복문서에 서명하면서 이뤄졌다. 트루먼 대통령은 9월 6일 '일본 항복이후 미국의 초기정책'을 승인했다.

이 정책은 두 개의 목표를 세웠는데 △일본군 무장해제와 일본이 향후 미국이나 세계의 평화, 안전에 위해가 되지 않게 하며 일본의 전쟁 가능성의 배제 △이 정책의 궁극적 목표는 일본 국민의 의사에 따라 일본 정부를 구성하고 일본을 유엔 헌장에 맞는 민주국가로 만드는 것 이었다(text in Department of State Bulletin, September 23, 1945, pp. 423427).

미군은 8월30일 일본에 도착해 연합군의 일본인 공격 금지. 일장기 사용 금지 등의 포고령을 발표했다. 9월8일에는 미국이 점령군의 위상을 앞세워 인천항을 거쳐 서울에 진주했다. 존 하지 장군이 지휘하는 제24군단 휘하의 제7사단은 그 날 서울의 일본군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그 다음 날 총독부 건물에서 일장기가 내려진 뒤 조선에서 게양되는 것은 불법이 되었다.

하지 중장이 인천에 도착한 9월8일 이전에 서울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사령관 고쓰키 요시오는 일본에 도착한 미군과 접촉해 한반도가 공산화될 위험이 있으며 조선인들이 흥분해 동요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하지 중장의 첫 번째 과제는 맥아더 사령부가 제시한 포고령을 선포해 집행하면서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본국 송환이었다. 그 결과 1945년 말 일본인 40만 명이 송환되고 전문 인력 1천 명만 미 군정청에 남았다(https://www.koreatimes.co.kr/www/news/issues/2013/02/363_103138.html).

하지는 미 정부로부터 인민위원회등 조선인의 어떤 자치기구도 인정하지 말라는 지시와 함께 일본인 관리와 일제에 협조해 공직에 있던 조선인들을 미 군정청이 고용하라는 지시를 받아 실행했고 이로 인해 남한에서 비판과 원성이 높았다. 하지 본인은 한때 조선인을 일본인과 같은 고양이 종자라고 부른 적이 있고 이런 이유로 조선인과 친근하게 지내지 못했다(https://www.koreatimes.co.kr/www/news/issues/2013/02/363_103138.html).

미국은 일본 항복 이후 한반도 남쪽에 군대를 진주시키고 발표한 맥아더 포고문 제1호에서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 임을 분명히 밝히고 북위 38도선 이북에 들어온 소련군과 대치했다. 미군의 군사통치 체제인 미군정은 1919년 중국 상하이에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해방직후 독립정권을 수립하기 위해서 선포된 여운형 중심의 조선인민공화국 등 모든 정치조직이나 단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은 군정을 선포한 뒤 일본총독부 소속 일본 간부들을 미군정의 고문으로 위촉하고 과장급 아래의 일본인 실무자들은 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 근무하게 했다. 미군정은 이어 한국인으로 일제 치하에서 공공기관에 근무한 사람들을 원래 자리로 복귀시켰다. 1948년 이승만 정권 등장까지 지속된 미군정의 이런 조치는 결국 일제 잔재를 청산치 못하게 만든 가장 핵심적 요인의 하나로 지적된다.

▲ 1945년 미군이 제물포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제물포분회를 방문한 모습. 사진=위키미디어

미국, 종전 후 장개석 지원과 남한 사회주의 세력 척결 동시 추진

미국이 채택한 태평양전쟁 종전이후 대중국 정책은 사회주의 세력의 동북아 진출을 저지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졌고 이는 한반도와 일본 점령정책에서도 중요하게 반영되었다. 맥아더 장군은 남한의 친일세력을 권력기구에 복귀시킬 때 북한의 사회주의 세력과의 대결과 남한내 친사회주의 세력의 척결이라는 목표를 세웠다.

미국은 태평양전쟁이 끝나자 한반도와 인접한 중국 대륙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1945년 9월2일 미 해병 5만 명과 7함대를 중국 북부에 파견해 일본군 항복을 접수하고 장개석 군이 일본군 점령 지역을 확보하는 것을 지원토록 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미 해병대 5만 명을 중국 하북과 산동 등에 1949년까지 주둔시켰다(https://www.encyclopedia.com/history/encyclopedias-almanacs-transcripts-and-maps/chinese-civil-war-us-involvement).

미군의 주둔 목적은 2차 대전 종전이후 중국에 남아 있던 일본인과 한국인 60만 명을 송환하고 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작전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약 4년 동안 미군은 외국인 수만 명을 송환하고 대피시키는 작전을 수행하면서 1945년 10월 이후 모택동 군과 수차례 충돌했다. 미국 정부는 장개석, 모택동 군간의 평화 조약을 추진했지만 실패했다.

미국은 1947년 10월 장개석 군을 지원하는 군사고문단을 만들었고 장개석 군에 2천 770만 달러를 지원하고 4억 달러를 추가로지원했다. 그러나 1948년 미국은 장개석 군의 부정부패가 자심하자 신뢰감을 상실하고 지원 정책 변경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모택동 군은 장개석 군을 계속 공격해 1948년 9월 만주 일대를 점령하면서 장개석 군의 탄약 등을 빼앗았고 중국 중부와 남부 주요 도시도 지배도 목전에 두게 되었다.

태평양전쟁이후 격화된 장개석과 모택동이 대립한 중국내전 기간 동안 미국은 1945년부터 1949년까지 개입해 장개석을 지원했다. 미국은 러시아 혁명과 소련 사회주의가 군사대국을 만들고 나치독일을 패퇴시키는 것에 자극받아 사회주의에 대한 경계심과 공포심을 갖고 있었다. 그 결과 동북아에서 중국이 소련을 견제할 역할을 맡을 것으로 기대해 장개석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면서 모택동 세력과 대결하게 만들었다.

모택동의 내전 승리 이후 미국, 애치슨 라인 선포

소련군이 1946년 만주에서 철수하고 미국의 강력한 지원으로 무장한 장개석 군이 만주에서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면서 모택동 군은 그 위세가 급격히 위축됐다. 모택동 군은 미국이 장개석 군을 지원해 중국 내전을 격화시키는 것을 맹렬해 비판하면서 즉각 중단을 촉구하는 것과 함께 유엔에 1946년 갖가지 방식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모택동은 우선 장개석은 중화민국이 유엔에서 중국인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전체 중국 인민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고 반박했다. 이어 미국이 장개석 군을 지원하는 것에 대해 “미국이 장개석 군을 지원해 중국에서 내전이 벌어지도록 하는 것은 유엔 헌장 2조에 위배된다. 헌장 2조는 모든 회원국들은 국제관계에서 영토의 보전과 정치적 독립을 저해하는 위협이나 폭력 행사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라는 식의 비판을 쏟아냈다(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46v10/d220). 모택동은 미국이 장개석 군에 대해 지원하고 있는 상황을 상세히 공개했다(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46v10/d220).

“미국은 장개석 군을 무장시키고 훈련시켜 중국 북부와 중부, 만주에 이송해서 동족상잔의 전쟁을 벌이도록 부추기고 있다. 미국은 장개석 군 60개 사단을 지원했고 20개 사단에 대해서는 일본군이 항복한 직후 일본군의 장비로 무장토록 했다. 미국 해군과 육군은 약 50만 명의 장개석 군을 북부에 수송해 내전에 임하도록 만들었다. 미국이 장개석 군에게 제공한 비행기와 탱크, 대포 탄약과 의약품 등은 40억 달러에 달하고 이는 미국이 일본군과 전쟁을 할 때 충당했던 전비의 4배에 달한다.

미국군이 중국 영토에서 장기간 주둔하는 것은 중국의 영토보전 권리에 저촉된다. 미국은 미 해병대 5만 3천 명을 톈진, 칭다오 등에 주둔시켰고 미 7함대 함정을 일본 항복 뒤 중국 북부 항구로 진입시켰다. 미국 군사력은 중국의 도시에 주둔하면서 도로, 항구를 건설하고 장개석 군을 육로로 해로로 이송하는데 이용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 미군이 일본군의 본국 송환 임무를 마치면 철수할 것이라고 밝혔고 1946년 7월 이런 임무가 완결되었는데도 여전히 중국을 떠나지 않고 있다. 미군은 중국 민간인을 공격, 강간하는 범죄를 저지르면서 장개석 군이 친왕따오, 안핑, 페이타이호 등을 점령하도록 직접 지원했다. 이들 지역은 모택동 팔로군이 점령했던 지역이었다. 미국은 수많은 중국 민간인들을 비행기 공습으로 죽거나 다치게 만들었다. 미국은 장개석이 중국 민간인에게 테러를 가하는 비밀경찰 조직을 만들도록 지원해 반인륜적 범죄가 저질러지도록 만들었다.”

미국 정부는 1948년 12월 모택동 군의 승리가 임박한 것으로 판단했고 투르먼 대통령은 장개석 군에 대한 추가 지원을 거부했다. 미국 정부는 1949년 4월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이 함락되자 5월 미국 공관원 전원을 중국에서 철수하되 미국 대사에게 대만으로 패퇴하는 장개석 군을 따라가지 말고 난징에 남아 모택동 군과 협상하라고 지시했다(https://www.encyclopedia.com/history/encyclopedias-almanacs-transcripts-and-maps/chinese-civil-war-us-involvement).

미국은 장개석 군이 부정부패로 자멸하다시피 모택동 군에게 패퇴하는 것에 충격을 받아 한반도까지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제외하는 애치슨 라인을 선포하게 된 것으로 전해졌다. 즉 1950년 1월12일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애치슨은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서 '아시아에서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언급한 '애치슨 선언'을 통해 소련의 스탈린과 중공의 마오쩌둥의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해 태평양에서의 미국 방위선을 알류산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획정하고 한국과 타이완·인도차이나 반도를 제외시킨다고 밝혔다.

▲ 애치슨 라인. 사진=위키피디아

이 선언은 미국이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 공격에는 대응하지 않는다는 입장으로 비춰져 북한의 오판을 불러일으켰고, 6·25전쟁 발발을 묵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후에 공화당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철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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